우리의 대제사장(하늘 성소의 예수 그리스도) 제 3 장 그리스도 우리의 희생
 이러한 우주적 드라마의 핵심 인물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잃어버린 자를 건져내고 구속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가장 포악한 죽음인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희생의 크기는 문제의 크기를 보여준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희생이 죄에 대한 완전한 대답을 제공하는가? 여기에는 죄에 대한 어떠 한 타협도 있을 수 없고, 죄를 무시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죄 문제를 다루시는 두 국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찾을 수 있는 두 국면이 있다. 하나는 율법과 정죄의 국면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와 구속의 국면이다. 하나님이 의롭고 그분의 법에 진실하다면, 어떻게 그분이 모든 죄인들에게 죽음의 형벌을 집행하는 일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자비로우시다면 어떻게 죄의 대가를 그분의 자녀들에게 집행할 수 있겠는가? (34.10)
 죄에 관한 하나님의 문제
 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문제이다. 죄는 그분의 다스리심에 침투한 가장 비극적인 실체이다. 죄는 죄 없던 우주에 분리, 반역, 고통과 죽음을 가져왔다. 죄는 거기에 포함된 모든 피조물의 운명적 원수이다. 하나님과 죄와의 투쟁에서 하나님은 천사의 삼분지 일과 지상의 수백만의 인간 존재들을 잃으셨다. 그들 모두는 그분의 피조물들이요, 그분의 자녀들이었다. 어떠한 인간 존재도 죄를 피할 수 없었다. 소수만이 죽음을 피해 왔다. (35.1)
 죄를 없다고 하거나, 그것을 잊어버리거나 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능하지 않다. 절대적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반응하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여 그것을 추방하거나 그것을 관용하여 같이 지내거나 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죄를 처리하지 않으면 거룩한 정부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법은 전복될 것이다. 사람들과 마귀들은 반역 가운데 대담하게 될 것이다. (35.2)
근본적으로 문제의 핵심은 양심에만 제한되어 있거나 영적인 세계에 한정된 것이 아닌 ∙∙∙ 실재하는 세계의 모든 차원에 침투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반응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James Denney, The Christian Doctrine of Reconciliation[New York: George H. Doran Co., 1918]).
(35.3)
 그리스도에 의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속죄 안에 포함된 도덕적 필요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러한 거룩한 비극을 통하여 성취하려고 한 것이 무엇인가? 성부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자신과 화목시키기 위한 최상의 노력과 최종적으로 멸망시키기 위하여 죄를 심판하는 일없이 그들의 운명대로 포기하거나 단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우주 앞에 자신의 품성을 나타내고 옹호해야 만 한다. (35.4)
구속은 단지 예수의 승리나 한 비극이 아니라 사람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두렵고 가장 영광스러운 사건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신약에서 주장하고 있는 화목에 대한 어떠한 교리에 대해서도 핵심을 잃게 된다(Denney, 263).
(36.1)
 죄 문제에 대한 신적인 해결로서 하나님 아들의 희생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의로운 사랑의 품성을 옹호하게 하였다. 바울은 선포하기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하나님께서 ∙∙∙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려 하심이라”(롬 3:25)하였다. 요한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 자를 주셨으니”(요 3:16)라고 하였다. (36.2)
 결과적으로 갈바리에 대한 참된 해석은 의로우며 사랑이신 그분의 속성 가운데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을 나타내야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존재의 기본 동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는 역사는 그 사랑의 표현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은 우주 안에 그것과 필적할 것이 없는 사랑에 대한 거룩한 역량을 나타내었다.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그들의 죄됨을 징계하며,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그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할 도덕적 권리를 갖고 있다. (36.3)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15).
(36.4)
최후의 수단으로 화목 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었고, 그것에 대한 신의 분노로 고통 당하고 있는 영혼이 필요한 것은 죄 자체나 영혼의 정죄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사랑을 나타냄이며 ∙∙∙ . 죽음으로 성취되는 그것에 대한 신의 분노가 우주에 있어서 마지막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마지막 실체는 우리의 죄를 실제 그대로 나타내게 하는 사랑 그 자체이며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가운데서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화목은 이러한 사랑이 나타날 때에 성취되며, 죄의식과 불신과 두려울 때에도 이것은 죄인이 신뢰를 갖게 한다(Denney, 218).
(36.5)
 사람들은 종종 십자가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계시인 도덕적 요구임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하나님 사랑의 계시로만 말할 때,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을 무시해 오지 않았는가? (37.1)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고 죽어 가며 드러낸 논증은 반드시 구속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것은 적대감을 자아낼 수 있다. 하나의 의도적인 논증으로써 단지 사람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에는 구원하는 힘이 없다. 십자가는 사랑의 논증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단지 사랑의 논증으로써 그분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허락 하는 것은 왜 그리스도의 희생이 참으로 필요한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오셔서 수천 년을 사시며, 사람들을 사랑하며 고치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면서 십자가에 죽는 것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만일 십자가의 가치가 죄인에게로부터 올바른 반응을 얻는 것이라면, 왜 죄는 이러한 희생을 요구할 만큼 치명적이었는가? 죄는 단지 사람이 그것을 나쁘게 느끼기 때문에 악한 것이 아니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나타난 논증으로써 십자가는 그것에 의해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하고, 충분히 지성적인 사람들에만 유익 될 수 있다. (37.2)
하나님께서 자신과 사람을 다루시는 그분의 길, 역사에 개입하시는 목적, 자신의 뜻에 대한 책임의 모든 설명은 ∙∙∙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안에 있으며, 다른 곳에는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의롭다 하심이다. ∙∙∙ 십자가는 사람 안에서보다 하나님 안에서 더 많은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심판을 자비로 바꾸는 그분 자신의 행동이며, 그분 자신의 이적이다. 그리고 그것의 첫째 관심은 그분이 거룩한 사랑이며, 우리의 사랑이 아니다(P. T. Forsyth, The Justification of God[London: Independent Press, 1957], 37).
(37.3)
구속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 그것은 도덕적 정당함을 가진 하나님에 의한 악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하며 ∙∙∙ 자신에게 어떠한 대가가 지불되든지 의에 대한 공의를 행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행동이며 ∙∙∙ 하나의 거룩하고, 사랑스럽고, 강하며, 최종적이고 영원한 행위 안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도덕적인 조정(調整)이다(상게서, 69).
(38.1)
 하나님 아들의 희생에 대한 도덕적 필요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의로움에 기초해 있다. 왜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이러한 무서운 대가가 지불되어야 했는가? 누가 그것을 요구했는가? 어느 쪽에 도덕적 필요가 있는가?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의 죽음 없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었는가? 만일 그분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왜 그분의 죽음이 꼭 필요했는가? 바울은 십자가가 하나님이 자신을 의롭다 하기 위한, 하나님 공의의 계시가 된다고 선포했다. (38.2)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 26).
(38.3)
 정확하게 바울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전에 지은 죄들은 무엇인가? 언제 하나님께서 죄를 간과하셨는가? 구약 시대의 4,000년 동안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죄에 대한 어떤 적절한 심판을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명확하였고 종종 잘못 이해되어 왔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이 그들의 동물의 희생을 드릴 때에 그들을 용서하시고 용납하셨다. 그런데 바울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합당한 근거 없이 분명히 거저 용서하셨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죄를 적당하게 다루지 아니하셨다. 동물의 희생은 죄를 담당하거나 없이하며 적절한 속죄를 하지 못했다(히 10:3, 4 참고). 만일 죄에 대한 반응으로 동물의 희생이 나타났다면 그분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공의는 죄를 합당하게 다루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죄는 거저 지나칠 수 없었으며, 확실히 하나님에 의해서 그냥 묵과 될 수 없었다. (38.4)
 결과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과 정부가 죄에 대하여 관대하다는 불공정에 대한 의심을 가져왔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운 데 이와 같은 의심 아래 있을 수가 없다. 그분의 의로운 품성은 그림자 아래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자신이 공정하고 의롭다는 것이 선포되어야만 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공의로움을 증거하시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선포한다. (39.1)
 그리스도의 희생은 먼저 신성, 그 자체의 필요를 채워야만 한다. 그것이 우선 순위이다. 이 거룩한 필요를 채우는 것 없이 구원이 죄인들에게 올 수 없었다. 공의는 무엇보다도 거룩한 질서대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