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에 대한 성경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과 하나 되어 연합하는 가운데 창조하셨고, 모든 일에 그분과 자신의 동료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향유하도록 하셨다는 하나의 기본 사상에 중심 되어 있다. 사람은 먼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그는 그의 조물주와 하나 됨을 즐기며 화목하게 살도록 만들어졌다. (21.1)
 그러나 죄가 이 하나 됨을 끊어지게 했고, 모든 곳에 부조화를 가져왔다. 그래서 이러한 연합에 근본적인 틈이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과 사람은 죄로 인하여 분리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라는 아담의 죄의 결과를 물려받았다. 사람 스스로는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없다. (21.2)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21.3)
 속죄는 화목을 가져오며,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래서 영어 단어로 “속죄”(atonement)는 “하나로 됨”(at—one—ment)이다. 속죄에 대한 이러한 개념과 진리는 그것을 전달해 주거나 또는 고립되어 사용된 단어들을 연구함으로 단순히 그 의미를 적절히 이해하기 불 가능한 것들을 다 포함하며 초월한다. 속죄에 대한 성경적 교리는 특별한 단어들의 사용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영어, 헬라어, 히브리어 단어들의 실제적 의미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이 정확하게 동일하지는 않다. (21.4)
 히브리어의 중심 단어는 카파르(kaphar)이다. 이 단어의 본래의 의미를 단정하기는 힘들다. 학자들은 “덮다.” “숨겨 주다”의 의미를 아랍 어 어근이나 “씻어 주다,” “문질러 없애다.” “도말하다”의 의미인 아람 어 어원에 관련된 단어로 추정해 왔다. 구약은 어떤 형태의 화목이나 속죄에 의해 사람의 죄를 덮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구약에 네 가지 형태의 어원을 갖고 있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첫째로, 속전(ransom)에 대하여 말한다. “사람의 재물이 그 생명을 속할 수는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잠 13:8).

 둘째는, 표상적 의미로서 “덮다”(to cover over)라고 번역된 것인데, 그것은 “속죄하다,” “화목하다”는 뜻이다. 야곱은 그의 형제 에서에게 많은 선물로 전에 지은 불의함을 덮거나 속죄하기를 구했다. 그는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창 32:20) 대면할 것을 생각하였다.

 셋째로, 복수 형태의 단어인 킵푸림(kippurim)은 “속죄일”(레 23:27)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현대어로는 욤 킵푸르(Yom Kippur)이다. 출애굽기 30:15, 16“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모든 이스라엘인에 의해서 지불되어야 할 속죄의 돈인 반 세겔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속한 그분의 행위의 공로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이 그분께 속했음을 주장하신다. 사람이 이것을 인정하는 표로 반 세겔의 속전(贖錢)을 지불하였다. 이와 같이 함으로 써 이스라엘은 자신의 생애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하나님의 주장을 인정하였다.

 넷째로 단어가 속죄나 화목의 장소로서 언약궤의 뚜껑 혹은 속죄소를 언급하는 데 사용되었다.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출 25:17). 이 단어의 사용은 장차 올 그리스도의 희생을 표상하는 것으로서 동물의 희생에 의해 상징적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덮어지거나 화목 된 장소를 표시했다. (22.1)
 이 모든 경우에 숨겨진 사상은 적절한 어떤 과정과 응답에 의해 하나님과 화목 됨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카파르(kaphar)는 죄를 정결케 함으로서 화목을 이루는 것이 기본 사상이다. 그래서 종종 그것은 “화목하게 하다”(reconcile)로 번역되었다. (23.1)
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하게 한 속죄제 희생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를지니라(레 6:30).
(23.2)
모세가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끌어오니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속죄제 수 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매 모세가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그 피를 단의 네 귀퉁이 뿔에 발라 단을 깨끗하게 하고 그 피는 단 밑에 쏟아 단을 속하여 거룩하게 하고(레 8:14, 15).
(23.3)
그 지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산 염소를 드리되(레 16:20).
(23.4)
 선지자 다니엘은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날”(단 9:24) 것을 예언하면서 장차 올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23.5)
 그리스도의 희생을 가리키는 레위의 희생 제도에 의하여 진실로 사람들은 죄로부터 구속받을 수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 의하여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되었다. 장벽이 제거되었고,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하였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나아올 때, 그들의 분열이 치료되었고,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그들 편의 계속적인 확신으로써, 동물을 가져와 개인적인 희생을 드렸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의식들의 참된 의미를 시야에서 잃어버린 사실은 희생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속죄의 참된 의미에 사람들의 마음이 소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23.6)
 이스라엘은 계속적으로 죄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깨뜨리며 하나님이 이루기를 바라시는 하나 됨을 파괴시킨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만일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하고 그분과의 교제를 유지하기 원한다면 죄는 제거되어야 만하며, 그렇게 함으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주님 앞에 깨끗한 생애를 살아야 한다는 속죄의 기본 진리로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교훈 하시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것의 중심 사상은 “하나 됨”(at one), 곧 속죄이다. (24.1)
 신약에서 속죄의 교리는 속량(ransom), 화목(reconciliation), 그리고 화해(propitiation) 또는 속죄(expiation)이라는 세 가지의 주된 사상을 표현하는 세 단어의 용례에 집중되어 있다. (24.2)
 두 헬라 단어가 속량의 사상을 주고 있는데, 종종 “구속”(redemption), “구속하다”(to redeem)로 번역되었다. 더 중요한 단어는 루트론(lutron) 인데, “속량,” 다시 말해서, 대가를 지불하고 어떤 사람이 풀려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그 값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된다. 왜냐하면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기”(히 9:22) 때문이다. “인자의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마 20:28; 참고 딛 2:14). 같은 어원을 가진 다른 헬라어 형태는 누가복음 1:68에서 볼 수 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구속”(히 9:12)을 이루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여기에 사용된 단어의 형태는 포로를 값을 주고 사오는 것, 희생에 의하여 속박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를 기억나게 한다. (24.3)
 다른 단어인 엑사고라조(exagorazo)는 “되사 오다”(buy back)는 의미인데 “구속받은”(redeemed)으로 번역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라고 한 것은 그 자신의 희생에 의하여 율법의 정죄와 저주로부터 우리를 되샀다는 의미이다. 신약에서 영어 단어인 “속죄”(atonement)는 「흠정역」(KJV)에 오직 로마서 5:11에 나온다. 헬라어의 카탈라게(katallagé)가 후의 번역본에서는 단어의 의미에 좀 더 접근하는 화목(reconciliation)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카타(kata)와 알라소(allasso)의 합성어이다. 그것은 바뀌는 것이나 교환을 의미한다. (24.4)
 종교적 의미에서 신약은 이것을 적대감에서 화목으로 바뀐 하나님과의 관계를 언급하는데 사용한다. 이 단어의 사용된 또 다른 예는 동사형에서 화목의 의미를 준다.(마 5:23, 24; 고전 7:11; 고후 5:18-20; 롬 5:10 참고), 화목과 속죄의 사역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조화를 회복시키는 아들의 희생과 아들을 주심으로 우선권을 취하신 하나님께 돌려져 있다. 화목은 이와 같이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항상 영향을 미친다. (25.1)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에 관련된 세 번째 헬라어는 “화목 제물”(propitiation) 또는 “속량(물)”(expiation)이라고 번역된 힐라스테리온(hilastérion)이다. 이 헬라어는 “자비를 베풀다”(눅 18:3)라는 단어의 어근에서 왔다. 그 단어는 고전적 헬라어에서 선물이나 희생의 수단에 의해 신들에게 속량되고 구속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25.2)
 하나님과 죄 사이에 화목 되거나 또는 범죄가 영원히 계속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나로 됨(at-one-ment)은 우주에 분열을 가져 온 죄를 멸망시킬 하나님의 의의 표현이다. 하나로 되는 회복은 십자가에서 다 성취되지 않았다. 죄 문제는 최종적으로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십자가는 사람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최고의 행위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적으로 하나로 됨(at-one-ment)을 향하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측면이다. 화목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효력이 발생한다. 이것은 이천 년 전에 일어난 어떠한 것이 아니다. 속죄는 오직 그분을 의지하며 신뢰하는 사람들의 날마다의 생애에 체험된다. 그분 자신에게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구속하는 것은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순종의 생애로 획득하기까지는 성취되지 않는다. 구원하고 구속하며 화목케 하시는 분은 살아계신 현재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앞에 우리의 변호자요, 우리의 중보자요, 우리의 대표자요, 우리의 대제사장이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일은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과 하나가 되라는 거룩한 초청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위에 있는 성소에서 속죄의 사역을 하고 계신다. 진실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서 마지막 속죄를 향하는 그분의 목적을 계속 이루지 않는다면, 악의 세력을 사로잡고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멸망시킬 어떠한 세력도 세상에는 없음을 단언할 수 있다. (25.3)
 그리스도의 죽음은 거룩한 사랑의 표현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사단과 죄의 세력을 깨뜨렸다. 최후까지 계속된 그분의 봉사에 의해 죄와 악의 세력과 분열은 또한 멸망될 것이다. (26.1)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을 인류에게 영원히 일치시키셨다. 그분이 하나님 보좌에 앉아 계실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인자이시다. (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