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2. 엘로힘—능하신 언약 체결자 (지킬 약속을 가지신 하나님)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선언적인 말씀으로 시작된다. 여기 “하나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엘로힘 인데, 이 말은 성경에 2,555번이나 나온다. 그중 2,310번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말하고, 나머지는 보다 저급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다. 그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엘로힘 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엘로힘 야훼 로라”(출 20:1, 2)고 함으로써 엘로힘야훼 가 한 분이심을 나타낸다. 이 점에 대하여는 나중에 더 깊이 연구할 것이다. (21.1)
 첫째 계명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엘로힘 을 내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여기서 하나님은 당신 외에도 다른 엘로힘이 있음을 인정하셨다. 그는 이 말을 각종 신들을 총체적으로 부르는 일반적 용어로 쓰신 것이다. 서언에서 엘로힘 은 당신께서 출애굽을 주도하셨음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제 4 계명에서는 자신을 창조자요 안식일을 제정한 분으로 말씀하신다. 우리가 보통 신이라고 말할 때 혼동이 없는 것처럼 엘로힘 이란 말도 성경에서 어느 신을 말하는지 혼동이 없이 사용되고 있다. 문장의 전후 관계가 내용을 분명히 밝혀 주기 때문이다. (21.2)
 엘로힘('Elohim)이란 말은 아마 “강하다”란 뜻을 가진 ('el)과 언약이나 약속을 “맹세하다”의 뜻을 가진 올라('olah)에서 왔을 것이다.1올라('olah)는 아랍어로 알라('alah)이다. 그래서 ('El)과 올라('olah)를 합쳐서 생각해 보면 엘로힘('Elohim)은 피조물들에게 하신 모든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는 “힘있는 언약 체결자”란 뜻이 된다. (22.1)
 “능하고 강한 자”(겔 31:11; 32:21)란 의미를 가진 보편적 히브리어로 능력과 힘을 의미한다(창 31:29; 잠 3:27). 그는 전능하시다. 이 말이 산들과 백향목을 수식할 때(시 36:6; 80:11)는 크고 뛰어나고 장엄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은 동시에 지도자, 주, 또는 앞장선 능한 자를 말하기도 한다(겔 31:11). 이 말은 두 번 천사에게 적용되었고(시 29:1 난외주), 한 십여 차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이방 나라의 신들을 수식하는데 사용되었다(사 43:10). (22.2)
  은 200번 이상 참 하나님을 가리키는 데 쓰였다(창 14:18-22; 첫 예: 35:1, 3, 등). 하-엘(ha-‘El, The God, 또는 유일하신 참 신—창 31:13), 엘림 (신들의 신, 단 11:36)처럼 쓰인 경우도 있고, 다음 장들에서 보게 되겠지만 지극히 높으신 자, 전능자 등 다른 칭호와 어울려서 함께 쓰인 경우도 있다. 또 다른 형태로는 시(詩)에 쓰인 것으로 엘라 또는 엘로아 를 들 수 있다(신 32:15, 17). 본문의 내용을 볼 때 그 칭호들을 쓴 의도는 정신 작용이 없는 우상과 달리(신 32:15, 17) 하나님은 뜻을 정하고, 뜻하신 일을 이루시는 분임을 강조하는 데 있는 것 같다. , 엘라, 엘로아 엘로힘 은 모두 모세의 송별사에 야훼 와 함께 사용되었다(신 32:15-19). (22.3)
 복수형 엘로힘-단수형 동사 또는 형용사와 함께 쓰임
 엘로힘('Elohim)은 복수 명사이다. 어미에 -(-im)이 달렸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위엄(威嚴)의 복수라고 말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엘로힘 의 복수형은 신격의 복수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고 그 이름 속에 삼위일체 교리의 첫 단서가 숨어 있다고 믿는다. 더구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2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복수 인칭 대명사들은 공동으로 확증을 제시한다. 구원의 드라마가 진행됨에 따라 성령께서는 신격을 구성한 삼위(三位)가 누구누구인지를 공개하고 그 각 위(位)가 담당한 기능을 알려주신다. (23.1)
 그러나 창세기를 시작하는 첫 문장의 주어가 엘로힘 이란 복수임에도 불구하고 “창조하시니라”는 동사는 단수형이다(창 1:1). 히브리어 문법은 주어와 동사의 수적 일치를 요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엘로힘 의 행적을 살펴보면 시종일관 단수형 동사를 쓰고 있다. 이 문법적 변칙으로서 영감의 손가락(참고 눅 11:20; 마 12:28, “손가락”“성령”을 뜻함)은 신의 본질을 지적하며, 엘로힘 을 구성하는 분들이 하나로서 창조에 임하셨고 그 밖에 무엇을 하시든지 완전한 일치와 조화 속에 하심을 보여준다. 이 진리를 깨달은 솔로몬은 젊은이들에게 “너는 청년의 때 ... 너의 창조자들을 기억하라”(전 12:1-히브리 원문)고 권고했다. (23.2)
 이런 독특한 문장 구성의 특례는 존재 동사의 사용에도 나타난다. 이사야는 이렇게 썼다: “Your Makers [is] your Husbands.”“너를 지으신 자들은[복수] 네 남편들[복수]이시라[단수]”(사 54:5). 여기서 “너를 지으신 자들”은 창조주 엘로힘 인 동시에 신랑—남편이 되신다(사 62:5). 이런 은유는 구약에도 있지만 신약에도 몇 군데 나온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으니”(엡 5:23). “보라, 신랑이로다!”(마 25:6). 복수 주어인 “너를 지으신 자들”을 단수 존재 동사로 받은 것은 엘로힘 을 구성하는 세 분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을 주목하게 한다. 단수형 타동사 또는 단수형 자동사인 존재 동사의 사용은 엘로힘 을 구성하는 세 분이 본성과 존재에 있어서 하나이며 동시에, 모든 활동에 있어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엘로힘(복수형) 여호와는 오직 하나['eḥaḏ, 에하드]인 여호와시니”(신 6:4). (23.3)
 엘로힘 의 성격은 형용사로 표현되었다. 히브리 구어법에 의하면, 이 품사들은 수식하는 명사나 대명사와 수가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복수형 엘로힘 을 수식하는 형용사들은 모두가 단수형이다(예: 의로우신, 시 7:9; 전능하신, 시 50:1; 영원하신, 사 40:28). 이 진기한 특례는 삼위의 하나님을 구성하는 세 분의 본성이 동일함을 분명히 나타낸다. 성경 연구에서 얻은 지식으로 우리는 그 삼위가 아버지, 아들, 성령이심을 알고 있다. (24.1)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구원의 드라마에서 단수형 형용사와 단수형 동사가 복수형 명사인 엘로힘 과 어울려 사용된 것은 삼위께서는 한 뜻으로 일하시며 세 분의 본성이 동일하심을 의미한다. (24.2)
 예수는 신격을 완벽하게 나타내셨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인성을 받으시고 그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 일은 삼위 중 어느 분도 하실 수 있는 일이었으나 각 위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기로 자원하셨다. “만일 아들 대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영광을 가리어 인생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의 행적과 역사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예수의 모든 행적에서, 또 그가 가르치신 모든 교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듣고 인식하게 된다. 보기에나 듣기에나 그 효과에 있어서나 그것은 아버지의 음성과 몸짓이었다”(Ellen G. White, That I May Know Him, 338). 예수께서는 종종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고 말씀하셨다(요 10:30; 17:1). (24.3)
 “태초에 엘로힘 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그 때 그가 불러내신 모든 만물의 수효와 복잡성을 생각할 때 인간의 두뇌는 상상만 해도 어지러움을 느낀다. 연구를 깊이 할수록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그는 만드신 만물 하나 하나와 창조적 언약을 체결하셨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하나의 소우주로서 그 각 부분은 다른 부분들과 관련이 있고 그 소우주는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창조된 소우주와 어떤 관계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생태계라고 말하거니와 그 상호 관계는 참으로 복잡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 주변 천연계의 각 부분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롬 1:20). 바울은 여기서 달리는 알 수 없는 신격의 본질과 “영원한 능력”과 하나님을, 그가 만드신 피조물의 연구로 알게 됨을 설명한다. 그러면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25.1)
 엘로힘“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예수는 아버지를 나타내시기 위해 하나의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을 때 “나는 빛이라”고 선포하셨다. 빛을 창조하신 엘로힘 은 빛의 모든 특성과 힘이 당신 자신의 본성의 일면임을 나타내도록 고안하셨다. (25.2)
 빛이란 엘로힘 이 만드신 물질 속에 갇혀 있는 에너지가 발산되는 최고의 형태이다. 빛 에너지는 핵이 폭발할 때 방출되어 모든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멀리 분산된다. 비록 모든 생물이 살려면 빛에 의존해야 하나 빛의 태우는 힘은 보호받지 않은 것들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엘로힘 은 빛을 고안하실 때 빛과 무수한 생명체들과의 미묘한 관계를 섬세한 통제 아래 묶어 두셨다. 오늘날 발달된 광학(光學)은 거의 무한한 의미를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준다. (25.3)
 빛 에너지
 봄마다 세상의 모든 숲의 나무 가지들에 돋아나는 잎사귀들과 나무의 내피 섬유 층을 통해 빨려 올라가는 물의 분량과 무게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세상의 방대한 수림에 우뚝우뚝 서 있는 그 무수한 나무들의 뿌리 끝으로부터 몸통과 가지의 섬유를 통해 그 잔 가지들에 달린 잎들에까지 필요한 수백만 톤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일 사람이 만든 펌프를 사용한다면 얼마나 큰 어떤 모터를 몇 개나 써야 할까? 아마 사람이 그런 숲 속에서 그늘을 즐기려 한다면 모터 소리 때문에 귀가 멍멍해질 것이다. 그러나 파릇파릇 새 싹이 돋는 큼직한 참나무 등걸에 가만히 귀를 대고 들어 보라. 하나님의 능력이 가지 끝에 새 잎이 돋게 하려고 수액을 빨아올리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신비가 다 엘로힘 의 고안이다. (25.4)
 광합성 과정에서 태양 관선은 동물들이 숨을 내쉴 때 나오는 탄산가스를 가지고 잎 세포의 조화로 식물(植物)의 생명에 절대 필요한 탄수화물을 만든다. 이야말로 기막힌 “폐물” 이용이다. 동시에 잎은 이 탄소 동화작용을 통해 사람과 그 밖의 동물들이 필요로 하는 산소를 내보낸다. 그러므로 엘로힘“빛이 있으라”는 명령으로 모든 생명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신 것이다. (26.1)
 엘로힘 은 바다와 육지를 갈라 경계를 정하심으로 물이 마른땅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셨는데, 그 둘 사이에는 돌고 도는 순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상상의 귀로 하나님이 속삭이시는 명령을 들어 보라.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땅에는 풀잎들이 돋아나고 각종 크고 작은 나무들이 자라나 빛을 향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나무가 새보다 더 귀한 것일까? 그들은 다 같은 생명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새를 더 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왜 엘로힘 은 나무들을 만들기 전에 새들을 만들지 않으셨을까? 나무가 없었다면 그 많은 새들이 어떻게 했을까? 창조된 첫날 밤 그들은 잎들에 가리워 아늑히 쉴 만한 나뭇가지들이 없어서 좀 불편했을 것이다. 나는 간혹 저녁 산책을 하다가 나무로 몰려드는 새 떼를 본다. 그들은 날마다 해질녘이면 나무에 몰려와서 저녁 노래를 지저귄다. 다른 나무들도 가까이 많이 있는데, 웬 일인지 그들은 정한 나무로만 밤마다 찾아 든다. 그 까닭을 알고 싶으나 새들은 아직 나에게 그 비밀을 말해 주지 않고 있다. (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