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끌어 갔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역사로 이끌고 가서 그 곳에서부터 역사의 진행과 함께 앞으로 끌고 오는 방식이었다. (480.1)
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볼 것이라고 약속했다. 2장과 3장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교신이 드러나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서한에서는 예수님께서 “내가 속히 임하리”(계 3:11)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4장부터 7장까지는 요한의 시대인 기원 1세기부터 시작되는 일곱 인의 사건들이 나오고 있다. (480.2)
여섯째 인(계 6:12~17)을 뗄 때에 재림의 징조들이 해와 달과 별들에 성취되었다. 죄인들은 바위와 산들을 향하여 자신들을 “어린 양의 진노”로부터 숨겨 달라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8장부터 11장까지의 일곱 나팔의 기사에서는 다시 우리를 요한의 시대로 끌고 간다. (480.3)
세 천사의 마지막 기별(계 14:6~12)이 소개된 후에 요한은, 재림의 준비를 마치고 흰 구름에 앉아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는 알곡과 포도를 추수하라는 음성을 듣는다(14~20절). 그러나 그 다음에 요한은 일곱 재앙에 관하여 알려 주려고 다시 멀지 않는 과거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480.4)
재림은 요한계시록에서 거듭 나타나는 중심 주제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도 재림의 주제가 매우 광범위하게 논의된다. (480.5)
일곱 인의 단원이 시작될 때 요한은 하늘 성소의 열린 문을 통해 그 안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계 14:1, 2). (480.6)
대쟁투의 단원이 시작되는 부분에서는 요한이 하늘 성소의 더 깊숙한 부분을 들여다. 보았는데 거기에서 그는 십계명을 담은 법궤를 보았다(계 11:19). 그러나 여기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요한은 “하늘” 자체가 “열린 것”을 보았으며 예수님이 하늘의 대장군으로서 “백마”를 높이 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예수님은 수많은 “하늘에 있는 군대들”의 선두에서 넓은 광장을 질주하고 있다. 이 하늘의 기사(騎士)들은 하나같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으며 주님과 마찬가지로 모두 눈같이 흰 백마를 타고 있다(계 19:11~16). (480.7)
그리스도의 다섯 이름
한국의 군인들은 군복에 명패를 부착한다. 요한이 본 예수님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이름을 부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밖에도 “하나님의 말씀”, “충성된”, “참된” 등으로 알려졌다. 그는 완전히 믿을 수 있고 전적으로 참된 분, 계약을 지키는 하나님, 약속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는 친구이기 때문에 “충성된”, “참된” 이란 이름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480.8)
요한은 “충성된”과 “참된”이란 이름을 “그 눈이 불꽃 같고”란 묘사와 연결 지음으로써 우리의 하늘 전사(戰士)가 바로, 요한계시록 1장부터 3장에 걸쳐 예언된 것처럼 수세기 동안 “그을음 투성이며 칠칠치 못한” 그의 교회를 사려 깊게 보살펴 오신 세심한 목자이심을 상기시키고 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한에서는 예수님이 일곱 촛대 사이에 서셔서 자신을 “충성되고 참된”(계 3:14)이로, 그리고 “그 눈이 불꽃 같은”(계 2:18)분으로 소개하셨다. (480.9)
재림 때에 하나님의 어린 양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군대들을 이끄시고 나타나실 것이다.
(481.1)
요한은 말하기를 말을 타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컬어지고 있다고 했다(계 19:13). 이 이름은 신약 성경 중에서 요한계시록 19장 13절과 요한복음 1장 1절, 그리고 요한일서 1장 1절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또는 하나님의 “말”)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 대해 생각하시는 그 깊은 사랑의 마음을 부분 적으로나마 우리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482.1)
요한에 의하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그리스도의 직함이 “그 옷과 그 다리에” 기록되어 있다(계 19:16)고 한다. 요한의 시대에는 칼을 왼쪽 넓적 다리에 차고 다녔다. 오늘날 사람들이 권총을 궁둥이에 차고 다니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검(칼)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성령의 검”이다. “성령의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히 4:12). (482.2)
그리스도의 다섯번째 이름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요한은 그 이름을 눈으로 보기는 했으나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말하기를 오직 예수님만이 그 이름을 아신다고 했다(계 19:12). 우리 주님의 성품에는 불가사이한 아름다움이 많이 들어 있다. 우리가 영원토록 연구한다 해도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어떻게 그는 그토록 참을성 있게 용서하실 수가 있는 것이며 어떻게 그토록 친절하실 수가 있는 것일까? (482.3)
피로 물든 예수님의 옷
그리스도께서 타신 말은 눈같이 희지만 그의 옷은 붉다. 그는 “피 뿌린 옷”을 입고 계셨다(계 19:13). 이 표현은 이사야 63장 1~6절에서 온 것이다. 그가 “포도주 틀”을 밟겠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이사야 63장에서는 하나님의 옷이 원수의 피로 더럽혀지고 있다. 이 피는 하나님이 포도즙 틀을 짓밟음으로 말미암아 짓이겨진 주홍 빛깔의 포도액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아직 예수님이 포도즙 틀을 밟고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하여 예수님의 옷이 붉게 되었는가? (482.4)
흔히 그렇듯이 요한은 구약 성경의 사상을 단순히 채택하고 있다기 보다는 번안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옷은 그 자신의 피로 얼룩졌다. 십자가에서 뱀은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다. 이제 재림 때에는 그리스도가 와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기 시작한다(창 3:15). (482.5)
우리는 이미 앞에서, 하나님은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대쟁투의 초기에 사단을 멸망시키지 않으셨음을 확인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급하게 사단을 멸망시켰다면 많은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참을성 없고 전제적이어서 사단의 주장과 크게 다를바 없는 분이라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482.6)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으로 하여금 자기를 고문하고 죽이도록 허용함으로써 자신의 무한한 미덕과, 유례없은 사단의 악독함을 표출시킬 수 있었다. 이제 예수님은 오해받는 일 없이 압제자들을 근절시키고 마귀를 영원히 멸망시킬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로써 그는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줄 수”(히 2:14, 15)있게 되셨다. (482.7)
예수님의 옷에 묻은 피는 그의 백성들을 멸망시키려던 자들을 멸할 수 있는 그의 권리를 보증하고 있다. 그분은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그들을 “구속하였다”(벧전 1:18, 19). 그들은 예수님의 소유이다. (4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