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트 니부르(1892-1971년)는 인간이 자유와 제한성, 자유롭게 됨과 매임의 역설적 관계에 놓여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인간은 불안 곧 죄의 내적인 전제를 경험한다. 니부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개념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죄를 연약성으로 보는 자유주의적 견해도 논박했다. 그에게 원죄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실이다. 니부르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자기 시도에 죄의 뿌리가놓여있다고 역설했다. (321.2)
 2. 사회복음
 사회복음을 주장하는 자들은 죄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다양한 방식으로 거부했다. 리췰은 죄를, 무지 또는 윤리적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개인적인 행동 곧 열등한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칭의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계시되지만 그것은 인간의 일인 화목을 통해서만 효력이 있게 된다. 다른 사회복음 옹호자들은 경제적 착취나 계급적 압제에서 죄의 뿌리를찾는다. (321.3)
 3. 해방신학
 해방신학은 압제와 착취와 사회 부정의라는 관점에서 죄를 정의한다. 교만의 죄는 사람에게서 인간성을 빼앗아 탐욕스럽게 만든다. 그것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것이다. 죄는 주로 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빈자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압제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죄는 빈자에 대한 부자의 착취, 무산자에 대한 유산자의 착취이다. 그것에는 사회적 부정의뿐 아니라 환경의 약탈도 포함된다. 따라서 죄는 제도나 관계, 태도, 사회적 이기심, 특히 집단적 이기심이라는 부패된 네트워크를 통해 전이된다. (321.4)
 H. 재림교회의 이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 짐을 짊어지고 돌아가신 후 2,000년 동안 죄 교리의 역사는 죄의 실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데서부터 죄의 부패성과 치명적인 지배력에 대한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사이에 문자적인 성경적 견해로부터 철학적 사변과 사회적 선입견을 혼합시킨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가르침들이 있었다. (321.5)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 죄에 대한 재림교회의 가르침으로 주의를 돌린다 재림교회는 1860년대 공식적인 조직을 형성하기도 전에 죄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중 대부분은 예수께서 1844년쯤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기대한 밀러주의자들이었다. 재림을 고대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과 관련한 도덕적이고 영적인 준비가 이들의 특징이 되었다. 예수께서 1844년에 재림하시지 않자 한 그룹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안식일과 성소 진리를 발견하고 후에 그들 스스로를 공식적으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고 일컬었다. 계속하여 초기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과 임박성을 전하면서 안식일과 재림 전 심판 같은 진리를 발견함으로 역사의 최종적 클라이맥스를 맞을 준비를 갖추었다. 그런 준비의 정신이 죄 문제 및 십계명에 순종하는 삶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에 나타났지만, 그들의 감리교적 뿌리로 인해 완전에 대한 깊은 관심이 되살아났다. (321.6)
 죄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는 선과 악의 초인간적인 세력들이 연루된 우주적 대쟁투를 말하는 성경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투쟁은 루시퍼의 반역으로 하늘에서 시작되어, 루시퍼가 그와 연합한 천사 3분의 1과 더불어 하늘에서 추방되기에 이르렀다(사 14:12-14; 계 12:3-9). 이 투쟁의 중심 이슈는 하나님의 품성이다.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인가 아니면 그분의 피조물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폭군인가? 사탄의 추방과 더불어 대쟁투의 현장이 하늘에서 땅으로 옮겨져, 그 후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재림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구원을 가능하게 했을뿐아니라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확실히 했다고 믿는다. 죄및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은 천년기 말에 대쟁투가 끝날 때 이 우주에서 최종적으로 근절될 것이다(참조대쟁투,V.D. 1-3). (321.7)
 죄, 죄의 기원 그리고 하나님이 죄를 처리하시는 방법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는 엘렌 G. 화잇의 글들에 가장 잘 제시되어 있다. 그에 대한 그녀의 이해는〈부조와 선지자〉라는 책의 처음 몇 장에서 개진된다. 그 부분 전체는 죄에 대한 성경의 정보를 설명한 것으로, 성경의 죄 개념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를 대표한다. 이 설명은 아홉 가지 주요 논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하나님은 사랑이며, 그분은 모든 피조물이 그분을 인정하고 사랑에서 우러나온 충성을 그분께 바치기를 바라신다.

   (2) 천사장 루시퍼는 교만과 기만의 행위로써 창조주께만 돌려야할경배를 받고자했다.

   (3) 그 결과, 하늘의 특징이었던 완전한 조화가 깨어져 루시퍼와 그의 추종자들은 하늘에서 쫓겨났다. 죄는 루시퍼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4) 세상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아담과 하와를 그의 창조물을 맡은 청지기로 삼으셨는데, 하나님과의 그들의 긴밀한 관계가 그분의 계시된 뜻에 대한 그들의 순종에 달려있다는 조건 하에 그렇게 하셨다.

   (5)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들의 독립을 선언했다.

   (6) 부패와 죽음을 포함하는 모든 결과와 함께 죄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7) 곧바로 하나님은 지구를 창조하기 오래 전에 세우신 계획, 곧 그분의 아들이 죄를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드림으로 타락한 인류를 구속할 계획을 선포하셨다.

   (8) 아들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용서와 영생을 얻을 것이다.

   (9) 하나님은 천년기 후에 예수의 재림과 결부된 종말론적 심판에서 죄를 최종적으로 제거하고새 하늘과새 땅을설립할 것이다. (322.1)
 이런 논지들이 죄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가 기초된 주요 가르침이다. 재림교회는 “개인의 도덕적인 죄책이 아담의 죄 때문에 그의 후손들에게 유착되어 있다.”라는 의미에서의 원죄 개념은 강조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아담의 죄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가져왔음을 강조한다. 이런 분리는 죄를 짓도록 하는 타고난 성향을 포함한다.”(Neufeld, 1351). (322.2)
 1888년은 죄와 의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를 분명히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재림교회의 책과 정기간행물에서 불충분하게 다뤄졌다. 율법에 대한 순종이 강조되었고, 그리하여 E. J. 왜거너와 A. T. 존스가 1888년 미니애폴리스 대총회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역설했을 때 처음에는 교회 지도자들을 포함한 다수가 그 기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322.3)
 재림교회 내에서 교리의 역사는 대부분 완전의 이슈를 중심으로 선회하였다. 완전에 집착한 것은 초기 재림교인들이 자신들을 요한계시록 7:4; 14:1에 나오는 144,000, 곧 흠도 없고 점도 없다고 언급된 특별한 무리와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엡 5:27) 교회를 가질 것이라는 신약의 종말론적인 목표와 맥을 같이 하여 이런 이해로 인해 어떤 재림교인들은 이 땅에서 완전이 이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이에 반대하면서, 무죄한 완전은 재림 때까지 하나님께 신실하게 남아있는 자들에게 부어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이런 견해가 현세에서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을 부인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이들의 입장은 사도 요한의 입장과 동일하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322.4)
 종말에 죄를 근절시키는 일에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재림교회의 확신은 다음의 힘 있는 진술에 표현돼 있다. (323.1)
 “대쟁투는 끝났다. 죄와 죄인들은 없어졌다. 온 우주는 깨끗해졌다. 오직 조화와 기쁨의 맥박만이 온 우주의 만물을 통하여 고동(鼓動)한다. 생명과 빛과 환희가 만물을 창조하신 분에게서 끝없이 넓은 우주로 퍼져나간다. 가장 작은 원자(原子)로부터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678). (3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