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단순히 악일 뿐 아니라 구체적인 종류의 악이다. 모든 악이 다 죄는 아니다. 병이나 지진, 토네이도, 홍수 같은 자연재해도 정상적인 삶에 해악과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죄는 그런 악이 아니다. 죄는 영적, 도덕적 및 윤리적인 악이다. 더 나아가 죄는 단지 가끔씩 일어나는 외적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반역 상태의 외적인 표현이다. 인간은 단순히 외적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의 상태에 있기에 죄를 짓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및 동료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 그리고 자신과의 내적인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악이다. 앞에서 조사한 성경의 용어들은 죄의 구체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핫타아트는 단순히 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표준을 빗나간 죄의 행위를 가리킨다(레 5:5, 16; 시 51:4). 아온은 하나님 앞에 있는 “죄악, 죄벌”이라는 개념을 지니며(창 4:13; 15:16), 죄가 패역 또는 굽음(애 3:9), 거짓과 기만(시 36:3), 헛된 것(사41:29)임을 나타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마르티아, 파라바시스, 아노미아, 아디키아 등과 같은 신약의 단어들도 하나님의 뜻과 율법을 거역하는 인간의 의지로 말미암아 자행된 구체적인 행위를 죄로 정의한다. (302.4)
 단순히 죄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에게 임한 수동적인 재앙이 아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자유 선택권을 잘못 사용하여 자행한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반역이다. 우리의 첫 부모가 저지른죄의 구체적인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그분의 권위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위치에 둠으로 그들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지위를 탐한 데 있었다. 자기중심주의, 교만, 반역, 하나님을 부정하는 반대와 탐욕 등은 모두 우리 조상의 죄가 얼마나 구체적이었는지 보여 준다. 이에 덧붙여,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고 기만자에게 복종함으로써 다른 권위를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에 도덕적 및 영적 측면이 관련되었고, 따라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으로서의 죄의 구체적인 성격이 매우 분명하고 논박할 수 없게 되었다. (302.5)
 죄의 구체적인 행위는 작위와 부작위(commission and omission)라는 서로 다른 죄의 행위에서 드러난다(부작위의 죄에 대해서는 아래 J. “의무 태만으로서의 죄”를 참조하라). 이런 죄의 목록은 인간의 경험만큼이나 포괄적이고 인간의 행동만큼이나 편만하고 패역한 것들이다. 예를 들자면, 바울의 목록으로 충분하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죄의 다른 목록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5:10; 마가복음 7:21, 22; 고린도전서 5:9-11; 6:9, 10; 에베소서 4:25-31; 5:3-5; 디모데전서 1:9, 10을 보라. 마태복음 12:31, 32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 곧 성령을 거역하는 죄에 대해 말한다(참조 신론 VII. C. 5). (303.1)
 E. 하나님의 표준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서의 죄
 구약과 신약에서 죄를 가리키는 주요 단어인 핫타아트하마르티아는 표적을 빗나가는 것 또는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들이 지닌 의미의 도덕적 측면이 죄에 적용되면 개인이 하나님의 행동 표준을 빗나가거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을 상실했음을 나타낸다. 표준에 못 미침이라는 이런 개념은 단순히 어떤 특정한 율법이나 일련의 법들을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 정신적인 태도를 말한다. 또한 신약에서 하마르티아의 개념은, 죄가 헬라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인간의 부족함이나 무지로 저질러진 실수 같은 악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께 대한 도덕적 및 영적 결함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죄인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에 대한 성경의 개념에 의하면, 죄란 무지나 인간적인 결점, 이성적인 부족 또는 육체적인 유한성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율법에 도전하고 불순종하고 그것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선택의 행위임이 매우 분명하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진지하게 고려하면 이런 강조점을 놓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에덴에서 보는 것은 불완전한 부부가 아니라 창조주의 손에서 새롭게 창조된, 모든 선을 부여받은, 도덕적 및 영적 충만으로 관 씌워진, 악으로 기우는 성향이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자녀였으나(사 1:2), 그들의 고의적이고 반역적인 선택으로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자녀였다. (303.2)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말한다. 죄는 하나님이 사랑 가운데서 그분의 피조물을 위해 세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인데, 그 목표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친교와 영광이었다(고전 11:7). 하나님은 이루지 못할 목표를 세우지 않으셨다. 그분의 기대치는 불합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목표를 거부하고 우리 자신의 목표를 선택하며 우리를 위한 그분의 뜻을 제쳐두고 우리 자신의 욕망을 선택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표준을 세우고 하나님의 표준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율법을 우리 자신의 뜻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무엇이든 그분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죄이다. (303.3)
 F. 불법으로서의 죄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요한은 죄(하마르티아)가 불법(아노미아)이라는 성경의 개념을 요약한다. 하마르티아아노미아를 연관 지음으로 사도는 죄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율법이 지닌 중심 역할을 강조한다. 죄는 단순히 인간의 실패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한 행위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의 피조물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를 정의한다. 십계명의 형태로 복사된 사랑과 의와 거룩이라는 하나님의 품성은 인간이 어떻게 살고 판단 받아야 할지를 규정하는 표준을 구체적으로 말한다. 이 율법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곧 율법을 주신 분과 완전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원칙은 아담과 하와에게 준 하나님의 요구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그 율법이 아담과 하와에게 십계명의 형태로 구체화되진 않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요구는 인간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표준을 반영했다. 우리의 첫 조상의 죄는 이 율법을 거역한 것이었다. 그것은 불법이었다. (303.4)
 바울도 죄를 율법과 연관지어,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도 있을 수 없다고 논증한다(롬 5:13). 죄를 창조주의 율법이 다스리는 도덕적 우주의 배경 안에 두지 않는다면 죄의 실상은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따라서 죄의 엄숙성과 구체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고 “불법”에 빠지며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주장하기로 선택하는 데 놓여 있다. 불법 또는 범법으로서의 죄가 데살로니가후서 2:7, 8에 추가적으로 언급되는데, 거기서 바울은 “불법의 사람”을 묘사하면서 죄를 의인화하고 있다. 따라서 죄를 짓는 자는 그들의 삶에 율법을 주신 분을 위한 자리를 두지 않는다. 죄는 무법(lawlessness)으로 인하여 불경(하나님 없음, godlessness)이 된다. (304.1)
 율법은 인간에게 부과된 독단적인 의무가 아니며,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 그분의 품성에서 그 역할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과 사망의 차이는 그들을 위해 그분이 제시하신 율법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에 놓여 있다고 지시하셨을 때 그분은 독단적이지 않았다. 금단의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한 명령은 가혹한 주인이 아니라, 사랑으로 반응하기로 선택하는 사랑이라는 토대 위에서 그분의 피조물과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사랑 깊고 은혜로운 창조주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304.2)
 피조물은 사실상 “왜 어떤 법이 필요한가?”라고 물을 수 없다 피조물은 언제나 피조물이며, 창조주는 언제나 창조주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피조물의 유한성이다. 율법은 그 주권을 반영하며, 피조물이 존재하고 거동하는 데 있어서 한계를 지닌 그 유한성을 말한다. 그 한계 밖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파괴된다. 그 한계에 대한 규정은 독단성이 아니라 질서와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304.3)
 시내산에서 율법을 성문화한 것 및 하나님의 율법을 그분의 손가락으로 돌비 위에 기록한 사실은 율법의 원칙들이 하나님 자신만큼 영원한 것임을 추가적으로 확증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조명하고, 하나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에 기초한 관계에 있어서 율법이 지닌 영원한 타당성을 요약했다(눅 10:27). (304.4)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반영으로서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며(롬 7:12), 사람들이 이해하고 깨닫지 못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율법의 도덕적 및 영적 원칙들은 단순히 금지조항이 아니라, 그것을 순종할 때 하나님과 인간 공동체 내에서 유쾌한 관계를 보증해 주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지침이다. 그러나 율법을 범하는 것은 인간 존재를 불법과 반역과불순종의 상태에 둔다. 그러므로 죄란 단순히 법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 안에서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304.5)
 G. 이기심과 교만으로서의 죄
 죄의 본질의 핵심적인 부분은 자기중심성과 이기심이다. 루시퍼의 경우나 우리의 첫 부모의 경우나 죄는 결국 자기추구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모든 미덕의 본질이라면,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분 안에 거하기 위해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하나님을 삶의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을 자아사랑으로 뒤바꿔 놓은 것이 곧 죄이다. (304.6)
 하늘과 에덴에서 일어난 타락은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처럼 되려한 자기 욕망이 죄의 참극으로 끝장났음을 나타낸다. 사실상 자기중심성은 온갖 종류의 악한 행동이 솟아나오는 뿌리로 여겨질 수 있다. 욕심, 부도덕, 탐욕, 오만 방자함 질투 등 모든 악은 부적절한 자아사랑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예수님은 시종 일관 자아 부정을 요구하셨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인간의 삶과 정반대되는 삶을 자기중심성에서 보았다(눅 17:33).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도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롬 8:7)을 보았다. (304.7)
 자기중심성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며, 그것은 자아를 여타 모든 관계들 위에 둔다 따라서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및 영적 삶에서 어떤 역할도 띠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기심]이나 허영[자만]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고 권면한다. 그는 더 나아가 로마서 7장에서 자아를 보좌에 앉히고자 하는 욕망이 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주요 걸림돌이며, 따라서 예수님만이 이 걸림돌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기심은 바울의 죄 개념에 대단히 결정적인 역할을 띠기 때문에 그가 되도록 가장 강력한 신학적 표현을 사용하여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논증의 요지는 놓칠 수 없다. 즉 자기중심성은 그리스도 중심성과 정반대이다 따라서 구원은 자아로부터 그리스도께로의 근본적인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는 매일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다(롬 12:2;참조 눅 9:23; 갈 2:20). (305.1)
 자기중심성과 결탁되어 있는 것은 교만이다. 사실 교만의 본질은 자아에 대한 왜곡되고 어긋난 견해로, 그것이 사람을 의존의 위치에서 독립자존하려는 참담한 시도로 내몰아간다. 그것이 바로 루시퍼가 타락한 이유가 아니었던가?(사 14:12-15). 사탄은 아담과 하와의 맘속에 이런 과도한 교만심을 불어넣어 그들이 그들 자신의 주인이 되도록 했고, 그때 이후로 인간의 본성은 교만에 전염되었다(롬 1:21-23). 교만이 루시퍼가 타락한 원인이었다면, 여전히 그것은 쉽사리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딤전 3:6) 수 있는 남녀들의 타락의 원인이 된다(딤전 3:6; 참조 딤후 2:26). (305.2)
 교만은 파멸을 위한 길을 닦는다(잠 11:2; 16:18; 29:23). 그것은 하나님이 증오하는 태도이며(잠 8:13),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막 7:23) 죄악의 목록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교만과 자기 의가 불신의 뿌리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그는 복음에는 “자랑”을 위한 자리가 없고(롬 3:27), 따라서 누구도 구원을 이룬 것에 대해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고전 1:26-31; 엡 2:9) 참사랑은 무례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고전 13:5)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교만은 너무도 죄된 것이어서 하나님이 교만한 자는 흩어버리고 물리치시지만 온유한 자는 높이고 사랑하신다(참조 잠 3:34; 눅 1:51-55; 약 4:6; 벧전 5:5). 이렇게 교만을 죄로 정죄한다고 해서, 그것이 적절한 자존감이나 자기 이미지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설 자리가 없다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는 예수님의 명령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 15:10)이라는 바울의 인식은 적절한 자기 확신과 자존감을 방증한다. 자아는 탁월성을 추구하고 그 성취를 위해 분투노력하고 가능한 가장 높은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피조물이 평범하게 남아있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자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되어 자기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동료 인간을 짓밟으려고 투쟁할 지경에 이를 만큼 자아를 내세운다면 그것은 이미 경계를 넘어 죄에 빠진 것이다. 자기중심성과 자아를 포기하는 것의 차이는 죄된 교만과 경건한 온유의 차이와 같다. (305.3)
 H. 속박하는 세력으로서의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