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새 연구 제 6 장 바벨론의 멸망(단 5장)
 ④ 다음에는 그의 아들 라바쉬 마르둑이 즉위했으나 2개월 만에 느브갓네살의 다른 사위인 나보니더스를 지지하는 모반자들에 의해 살해당하였다(556 BC). (98.17)
 ⑤ 어머니를 통하여 느브갓네살의 의붓 아들이 되기도 하고 부인을 통하여 그의 사위가 되기도 하는 나보니더스는 정치나 군사 문제보다는 종교와 고고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문약(文弱)한 군주였다(총론 III. 나. 나보니더스 참조).

 그는 신병(身病)등 이런 저런 이유로 바벨론성을 떠나 있으면서 정치문제를 등한하여 바벨론의 지배계급에게 소외당하고 있었다. 특히 신전들에 막대한 수익(收益)을 올리게 해주는 신년 축제의식을 여러 번 생략함으로써 제사장 계급들과 반목이 심했다. 더우기 바벨론의 주신인 마르둑보다 자기와 자기 어머니가 이전에 섬기던 하란의 월신(月神)인 신(Sin)을 높임으로써 더욱 그랬다. SDABC. vol. 3, 48. (98.18)
 ⑥ 그는 기원전 553년 동부 팔레스틴 정복에 나선 동안 와병(臥病)하여 병 회복을 위해 레바논으로 가서 요양하였다. 이 때 맏아들 벨사살이 섭정(攝政)하기 시작하였으며 552년부터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스렸다. 그랬으므로 그가 벽 위에 나타난 글자를 해석한 다니엘에게 줄 수 있었던 최고의 자리는 첫번째의 아버지와 두번째인 자신을 제외한 “세째 치리자”의 자리였음이 명백해진다(5:16). (98.19)
 ⑦ 병에서 회복된 후 나보니더스는 서북 아라비아 정복에 나서 오아시스인 테마(Tema)를 빼앗고 기원전 545년까지 때때로 거기 머물러 살았다. 수도 바벨론성에는 아들 벨사살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Gane, 21, 22. (98.20)
 라. 느브갓네살과 벨사살의 관계
 다니엘은 벽 위에 쓰인 글자를 해독(解讀)하라는 요청을 받은 자리에서 벨사살 왕을 정면으로 견책하면서 “왕의 부친 느브갓네살”(5:18)이라는 말과 “왕은 그(느브갓네살)의 아들이 되어서”(5:22)라는 표현을 썼다. 어떻게 이러한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가? 로버트 딕 윌슨(Robert Dick Wilson)의 세밀한 고증(考證)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아랍과 바빌로니아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들”이란 말이 “손자” 혹은 “양자”를 비롯하여 적어도 열 두 가지 이상의 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98.21)
 “아버지”라는 말도 “조상” (ancestor)을 비롯하여 “조부”, “증조부”, “고조부”, 그 이상도 가리키는 등 적어도 일곱 가지 용법을 지녔었다는 것이다. Strauss, 146. 그 한 예가 앗시리아의 비문에도 나오는데 이스라엘의 왕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썼다. 두 사이에는 아무런 혈족관계가 없고, 오히려 예후는 오므리의 집안을 멸족(滅族)한 인물이었다(왕하 9:10). 다니엘서 주석, 131. (98.22)
 벨사살의 경우 느브갓네살의 딸인 그의 어머니를 통하여 느브갓네살의 외손자일 수도 있고 느브갓네살의 의붓 아들인 그의 아버지 나보니더스를 통하여 손자(의붓)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앞서의 예처럼 단순히 선왕(先王)의 관계에서 그렇게 불릴 수도 있다. (98.23)
 II. 바벨론 멸망의 전야(前夜)
 다니엘 5장의 사건은 정확하게는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밖에 일어난 사건으로, 앞 서 4장의 사건을 느브갓네살이 죽은 기원전 562년 10월 초의 사건으로 기준한다면 Thiele, 43. 두 장 사이의 시대적 간격은 23년이 되는 셈이다. (98.24)
 5장의 사건은 금 머리와(2장) 독수리의 날개를 단 사자로(7장) 표상된 바벨론의 마지막 밤으로, 금 머리가 떨어져나가고 은 팔 가슴이 들어서는 순간이었으며(2장), 사자가 넘어가고, 곰이 올라오는(7장) 세계사의 엄숙한 찰나였다. 바로 그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다니엘은 5장에서 바벨론의 최후에 관하여 적어도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열거하고 있다. (98.25)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5:1-4)

 각종 우상신들을 찬양했다(5:4, 23)

 벨사살이 성 안에 있었다(5:1, 2 6-9)

 벨사살이 그 밤에 죽임을 당했다(5:30)

 메대와 폐르샤에게 망했다(5:28)

 메대의 다리오가 왕국을 차지했다(5:31) (98.26)
 실제로 이러한 사실들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또 얼마나 실제적이고 역사적인가 (98.27)
 가. 마지막 잔치
 성경은 바벨론의 멸망이 큰 잔치가 베풀어지던 밤에 있었다고 말한다(5:1-4, 28, 29). 이 사실에 대하여 희랍의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도 바벨론이 함락되던 당시 「온 바벨론에 어떤 잔치가 있었는데 이 잔치가 있을 동안 바벨론이 온통 마셨고 밤새도록 흥청거렸다」는 Xenophon, Cyropaedia, vii. 5. 15. 기록을 남겼다. 동시에 고레스는 이렇게 환락의 잔치가 바벨론성 안에서 베풀어져 밤새 흥청거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밤을 도와 공격했다고 썼다. Xenophon, On the Institute of Cyrus, Book vii, Ch.v. 이렇게 마지막 밤이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배경을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98.28)
 ① 나보니더스 통치 초기에 동방에서 새로운 별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그는 메대의 봉신왕(封臣王)인 안산(Anshan․페르샤)왕 고레스였다. 그는 마침내 기원전 553년 종주국 (宗主國)인 메대를 반역하고 550년에는 수도 엑바타나(Ecbatana)를 점령했다. (98.29)
 ②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된 나보니더스는 고레스를 대항하기 위해 이집트와 사데(Sardis)의 리디아(Lydia)와 연맹을 맺고 대항했다. (98.30)
 ③ 그러나 기원전 547년 고레스에 의해 사데에서 크뢰수스(Croesus)가 패하자, 바빌로니아는 직접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98.31)
 ④ 기원전 539년, 충분한 전쟁 준비를 끝낸 고레스는 바벨론 영토로 진격하여 바벨론의 풍요한 동부 방어성인 구티움(Gutium)을 쉽사리 점령했다. 이에 놀란 나보니더스는 바벨론의 여러 신들의 힘을 빌어 자신을 지키고, 고레스가 들어와서 이러한 신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침략이 예상되는 성들로부터 그 성의 신들의 조상(彫像)들을, 539년 봄과 여름에 걸쳐 모두 바벨론 본성으로 모아들였다. 그의 이러한 처사는 신을 도적질해 가는 것으로 여겨져, 성들의 지방민들과 지방 제사장들을 분노하게 했으며 마르독 신만을 최고의 신으로 받들던 바벨론성의 제사장들을 시기나게 했다. SDABC. vol. 3, 49. (98.32)
 ⑤ 이에 벨사살은 고레스가 티그리스 강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티그리스 강변의 요충인 오피스(Opis)에 군대를 이끌고 나갔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9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