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2 장 구약과 재림소망
 분명한 것은, 역사 가운데 어떤 왕도 이러한 놀라운 기대를 성취시키지 않았으며 또 성취시킬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림하시는 구세주이신 왕에 대한 기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러한 소망이 인간적인 왕의 주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당신의 왕국을 건설하시기 위해 오실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왕의 모습에 대한 이상화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히 1:1) 가운데 하나를 대표한다. 당시에는 쉽게 이해되었던 인물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주이신 왕의 미래 강림에 대한 백성의 믿음을 북돋는 데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셨다. (35.3)
 8. 아이—구원자에 대한 소망
 평화스러운 본성. 고대했던 구세주이신 왕의 모습은 그분의 사명에 대한 도덕적·사회적·중보적 그리고 평화스러운 특성을 빈번히 강조하는 선지자들의 기별에 의해 더욱 풍부해졌다. 예컨대 이사야는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로 불리워질 아이—구원자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다(사 7:14). 어떤 주석가들은 그러한 이름을 가진 아기가 쉽게 이사야 자신의 아내로부터 탄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구절을 메시야적인 예언으로 간주하기를 주저한다. (35.4)
 그러나 두 다른 고지(告知)는 분명히 메시야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 9장 6절에서 고대했던 아기 구원자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사 9:6)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분의 통치는 무궁한 평화와 의의 통치로 묘사되어 있다(사 19:7). (35.5)
 이사야 11장 1~8절 가운데는 아기 구원자의 메시야적 특성이 그에 대한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에 대한 묘사를 통해 더욱 강조되고 있는 바, 그것은 그에게 의와 공의로 세상을 통치할 지혜와 지식을 그에게 줄 것이다. 그의 통치는 무궁한 평화(사 9:7; 미 5:5; 슥 9:10 참조)와 억압받는 사람을 위한 공의, 그리고 자연계 가운데 낙원의 상태(사 11:6~9) 등으로 특징 지워진다. (35.6)
 역시 주목할만한 것은 의의 중보자(렘 23:5, 6)와 신자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새 언약의 관계와 평화의 중보자로서의 그분의 기능이다(사 42:6, 49:6, 8). 그는 자신의 백성을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처럼 돌볼 것이다(겔 34:23, 24, 37:24). 평화와 축복의 통치의 결과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36.1)
 9. 고난 당하는 종에 대한 소망
 대리적 고난. 고대했던 구세주의 중보 사업 역시 잘 알려진 고난을 당하는 종의 모습을 통해 이사야서에 표현되어 있다(사 42:1~4, 49:5~7; 52:13~15; 53;). 자신의 백성의 완고함과 불신에 직면해서(사 53:6), 선지자는 참된 구원은 강림하시는 야훼의 종의 대리적 고난을 통해 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36.2)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6). 그분의 자발적인 속죄의 고난으로 인하여 야훼의 종은 “많은 사람을 의롭게”(사 53:11) 하시며, 그같이 하여 신자와 하나님 사이에 개인적인 관계를 회복하신다. (36.3)
 제 2 부 주님의 마지막 강림에 대한 소망
 1. 여호와의 날에 대한 소망
 잘못 지도된 소망들. 이미 고찰한 많은 메시야적 개념은 강림하시는 구세주의 소망과 기대가 구약 시대에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넉넉히 보여 준다. 그러한 강한 기대는 쉬 그릇된 소망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물질적인 번영과 육욕적인 쾌락의 열망이 주의 강림으로 성취될 도덕적인 혁신에 대한 갈망에 앞섰다. (36.4)
 여로보암 2세(788~747 BC)의 번영기에 살았던 선지자 아모스는 이러한 문제의 배경 증거를 마련하고 있다. 그는 여호와의 날을 소망이 성취될 황금 시대의 소망으로 바꾸어 버린 자신의 당대 사람을 책망하면서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 그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암 5:18~20)라고 말하고 있다. 선지자의 기별 가 운데서 여호와의 날의 기능은 주님의 강림하시므로 초래될 최종적인 징벌과 보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36.5)
 우주적인 멸망.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을 악한 자를 멸망시키고 자연계의 질서를 붕괴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일으키시는 대 격변과 재난으로 묘사하고 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암 8:9, 10). (36.6)
 어떤 학자들은 이 말씀을 시적인 공상(poetic fantasy)이나 자연의 재난에 대한 암시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범 세계적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는 선지자의 주장을 거의 공평하게 취급하고 있지 않다.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암 7:4). 노쓰(C. R. North)는 “이것을 시적인 풍부한 표현으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 아모스가 마음에 그리고 있는 것은 범 세계적인 규모의 어떤 자연의 변동처럼 보인다. 그것은 진정한 종말론이다”4라고 옳게 논했다. (37.1)
 구약의 후기 선지자들과 신약 저자들이 천체를 포함한 자연계의 격동을 여호와의 종말론적인 날로 분명히 그리고 자주 연관짓고 있다는 사실은 아모스가 종말에 대한 일관된 예언적 견해의 동일 선상에 서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어떻든 주목할 만한 것은 그러한 견해가 우리 성경에 있는바 최초에 수집된 예언의 말씀(BC 750년경) 속에 잘 표현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37.2)
 아모스가 여호와의 날을 파괴적인 심판의 날 뿐 아니라 건설적인 구원과 회복의 날로 보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 그 때에 밭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암 9:11, 13). (37.3)
 파멸과 회복. 여호와의 날의 두 국면—징벌의 파멸과 구원의 회복—이 후기 선지자들에 의해 천명되었다. 예컨대 요시아의 통치 시기에 예언했던(BC 640~608) 스바냐는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습 1:14, 15)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심판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주적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 나를 기다리라 ∙∙∙ 나라들을 소집하며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습 2:10, 11, 3:8 참조). (37.4)
 이러한 우주적인 심판의 궁극적 목적은 징벌적일 뿐만 아니라 구속적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선지자는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기를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고 말하고 있다. 남은 무리의 마지막 구원에 대한 보증(습 3:12, 13)이 끝 부분에서 강조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곳에서 스바냐는 백성들이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니”(습 3:14, 15) 노래하고 찬양하라고 촉구한다. (37.5)
 심판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강림에 대한 이 주제는 호세아(2:21~23), 이사야(2:13, 29, 35, 59:20), 미가(4:1~5), 예레미야(30:8~11, 50:30~33), 에스겔(7:30), 요엘(1:15~20, 2:1~11, 30~32, 31:1~21), 오바댜(15~21절), 그리고 스가랴(2:10, 11, 14:1~ 21)와 같은 다른 구약 선지자들에 의해 충분히 발전되었다. (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