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2 장 구약과 재림소망
 구약 시대에 살았던 신자들은 주님의 강림에 대한 그들의 소망을 어떻게 표현하고 또 경험 했는가? 재림에 대한 그들의 기대는 얼마나 간절했는가?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란 결코 용이하지 않다. 그 이유는 강림의 소망의 내용과 범위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나타내 보이신 계시와 더불어 성장했기 때문이다. (30.1)
 본 장의 목적. 본 장은 구약 시대의 강림의 소망의 기원과 발전을 추적하고자 한다. 주님의 강림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다양한 주제들을 간략하게 고찰해 볼 것이다. 이 간략한 연구는 독자들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는 의미 심장한 신약의 구별의 의미 뿐 아니라 신약과 구약 사이에 존재하는 통일성과 연속성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30.2)
 제 1 부 구속주의 강림에 대한 소망
 1. 구약의 강림 소망
 중심 신앙. 미래에 야훼(Yahweh)가 오시리라는 이스라엘의 소망은, 당시의 동방 종교에는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하시며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독특한 신앙에 뿌리 박고 있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방문하셨던 하나님, 그들의 역사 가운데 자주 방문 하셨던 하나님은 이 지구의 역사를 궁극적으로 완성시키기 위해 오시리라고 기대되었던 하나님과 동일하시다. (30.3)
 야훼의 강림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구약적 이해에 중심을 두고 있으며, 온 지상에 질서와 평화를 회복하심으로써 자신의 뜻을 완성하시기 위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오실 것인가에 대한 이해는 점차 발전되어 왔다. 같지 않은 시대마다 다양한 주제들이 미래의 하나님의 강림과 구속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번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깊어가는 이해와 경험이 결합되어 하나님의 왕국의 설립에 대한 이해와 영화(靈化)를 증가시켰다. (30.4)
 점진적 이해. 점진적인 특성을 가진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감안할 때 우리는 주님의 초림과 재림에 대해 분명하게 묘사된 교훈을 구약에서 찾아내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같은 관찰이 구약에서는 배(胚)와 발아의 형태로만 나타나 있는 삼위일체,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속죄와 같은 주요 교리들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를 고려하면서, 우리는 놀랍게도 구약이 심판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미구에 오시리라는 강한 믿음과 소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30.5)
 열렬한 기대감.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강림에 대한 기대는 구약 역사가 흘러가면서 커갔으며 특별히 그리스도의 시대에 매우 열렬했다. 신약은 메시야에 대한 열렬한 기대감이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 주고 있다. 예컨대 누가는 나이 많은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눅 2:25)고 있었으며, 그가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눅 2:30)다고 외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같은 때에 여선지자 안나가 아기 예수를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救蹟) 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눅 2:38)했다. (30.6)
 침례 요한도 감옥에서 그의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라고 물었을 때 동일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라”(요 4:25; 참고 1:41)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생애의 거의 마지막 때 대제사장이 그에게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며 질문하면서 심문하였다. (31.1)
 2. 통치권에 대한 소망
 창조에 그 뿌리가 있음. 신약 시대에 열렬하게 타올랐던 구속주의 강림에 대한 기대감이 여러 형태로 구약 시대에 나타난다. 이러한 기대감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무질서에서 질서를, 혼돈 상태에서 우주를 이끌어 내시기 위해 최초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창조 이야기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31.2)
 어떤 의미에서 종말론으로 알려진 마지막 사건들에 관한 교리 이해는 원인론(etiology)으로 알려진 첫 사건들에 대한 교리의 이해에 좌우된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시기 위해 이 지구 처음 찾아오신 것을,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회복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최종적 강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수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자연적으로 배척할 것이다. (31.3)
 영광스런 미래에 대한 약속.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창조의 여섯째 날에 인류에게 베푸신 축복 가운데 가장 잘 표현되어 있으며(창 1:27, 28), 그 뒤에 곧 바로 일곱째 날의 축복이 따른다(창 2:2, 3). 처음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풍성한 생애(“생육하고 번 성하라”)와 “다스림”을 약속하셨고, 두번째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임재와 교제에 대한 보증을 주셨다. 창조의 일곱째 날을 자신과 피조물들과의 교제 시간으로 떼어 놓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지구를 창조하신 자신의 목적—즉, 자신의 임재와 교제를 피조물들과 나누시기 위한 것—을 드러내셨다. (31.4)
 이 놀라운 광경은 그것이 소망의 근거를 계시해 주기 때문에 미래에 있을 강림의 소망의 기초가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직 완전히 달성되지 않은 영광스러운 미래의 운명 즉 미래의 인간의 통치와 하나님과의 동행을 약속하시기 위해 창조시에 인류를 방문하셨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31.5)
 에덴을 상실했을 때 통치와 교제에 대한 하나님의 첫 약속은 피조물을 처음 창조했을 때와 같은 완전함으로 회복하시기 위한 주님의 강림에 대한 기대의 기초가 되었다. 저자는 여러 다른 곳에서, 본래의 완전과 평화, 쉼, 그리고 기쁨의 상징이 되는 안식일이 고대하던 메시야의 소망을 어떻게 요약하고 장려하는 데 기여했는지를 설명하였다.1 (31.6)
 3. 승리의 소망
 첫 약속.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기대가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산산히 부서졌을 때, 장래의 구속에 대한 첫 선포가 약속의 형태로 주어졌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이 약속은 첫 부부의 후손들과 뱀의 후손으로 상징된 사단의 권세 사이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첫 소망의 좋은 소식(원 복음—protoevangelium)으로 올바로 불리웠다(계 12:9; 요 8:44; 롬 16:20). (32.1)
 어떻게, 언제 또 어디서 그 전쟁이 끝마쳐질 것인지는 이 때에 상세하게 제시되지 않았는 바, 그 이유는 이 단계에서는 그것들을 인간의 죄와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이 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여자의 후손을 통한 승리의 약속은 잃어버린 낙원을 신자들로 하여금 자포 자기 하면서 뒤돌아 보도록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래의 승리와 회복을 소망 가운데서 바라보도록 힘을 주었다. 비록 인간의 구속에 대한 이 첫 약속이 인격적인 구세주의 오심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후기의 약속들과 같이 그것이 메시야의 구속적인 성취 가운데서 그 성취를 발견하기 때문에 메시야적이라고 불린다. (32.2)
 4. 우주적인 축복에 대한 소망
 아브라함의 역할. 첫 약속의 계보는 셋(창 4:25, 26), 노아(창 5:29), 그리고 셈(창 4:25~27)을 통해, 구속사의 전개에 있어서 십자로가 되는 아브라함에게 이른다. 편만한 다신주의가 야훼에 관한 지식을 말살시키려고 위협하고 있을 때 아브라함은 한 분이신 참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대로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의 적극적인 반응으로 인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의 나라가 차지할 땅에 대한 소망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창 12:1, 2, 13:14~17, 15:7) 그의 후손을 통해 “천하 만민”(창 22:18, 26:4, 28:14)에게 축복이 되리라는 보증도 주셨다. (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