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소 (재림교회 신학의 심장) 제 1 장 구속과 회복의 은유1):시종일관(始終一貫)갈바리를 바라봄
 창조 후 얼마 지나지 않아—그 정확한 때는 아무도 모르지만—우리의 첫 부모는 죄에 빠졌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그들의 슬픈 이야기가 창세기 3:22~24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20.1)
 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첫 번째 관심은 인간의 회복과 우주의 영원한 안전에 있었다. 신격을 이루는 한 분의 죽음—예지(豫知)로써 하나님의 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비상 대책(참조 계 13:8)—이 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20.2)
 이 최선의 노력에 인간의 참여와 협력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첫 부모에게 그 계획을 알리는 신속한 조치를 취하셨다. 이와 함께, 그분은 그들과 오는 세대의 관심속에 그것을 영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일종의 교육적 장치를 마련하셨다. (21.1)
 우리는 창세기에서 이 거룩한 계획에 관한 신비스런 증거를 발견한다. 첫 부부가 분명히 듣는데서 하나님은 뱀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역사적으로 이 구절은 메시야의 오심과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 주는 예고(豫告)로 해석되어 왔다. 이런 뜻으로 고안된 이 구절은 앞에 놓여 있는 악과의 투쟁에서 우리의 첫 부모에게 힘찬 동력(動力)을 부여해 줄 구원과 회복의 약속이었다. (21.2)
 창세기 3:15의 원복음(原福音, 프로토에방겔리움[protoevangelium])2)에 이미 내포된 구속의 계획과 궁극적인 승리의 확실성을 그들의 기억 속에 끊임없이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은 유혈(流血) 제사를 제정하셨다. 상징의 신학적인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고안된 창세기 4장의 구절에 그것에 대한 최초의 암시가 나타난다. (21.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지라”(창 4:3~5). (21.4)
 적어도 시초에는 분명 몹시 고통스럽고 끔찍한 행사였을 그 제도를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최소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우기를 의도하셨다.

 (1) 죄는 값을 치러야 함,

 (2) 죄는 죽음을 가져옴,

 (3)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해 대속물을 준비하실 것임(참조 창 22:8).

 인간 역사의 첫 2,500여 년 동안(출애굽 시대까지), 이 유혈 제사 제도는 단순히 무죄한 희생 동물을 죽이는 것, 피 뿌림, 그리고 그 사체(死體)를 번제로 드리는 것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한 증거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다. 사실상 번제 드린 것을 보여 주는 첫 번째 확실한 성경 기록은 노아 홍수 직후에야 나타난다. 그 기록에 의하면, 분명 홍수 동안에 베푸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노아가 “번제”(창 8:20)를 드렸다고 말한다. (21.5)
 같은 구절에 단을 쌓은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즈베아흐(mizbeah)이다. 이 단어는 “죽이다”를 뜻하는 자바흐(zabah)에서 나온다. 이것은 아마도 단을 쌓는다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희생 동물을 죽이는 것과 그것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떠올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인들에게 의미를 전달해 준 개념이다. 그렇다면, 부조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유혈 제사의 몇 가지 경우가 있다. 아브라함(창 12:7), 이삭(창 26:24, 25), 야곱(창 35:7), 모세(출 17:15). (22.1)
 홍수 직후에 노아와 그의 가족이 제사를 드린 이후로 나타난, 유혈 제사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는 아브라함의 시험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대는 아브라함이 순종에 대한 시험을 통과한 후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대속 제물을 삼은 것을 기억할 것이다(창 22:7, 13). 동물 희생제사의 개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출 10:25, 26)을 위해 그들의 소떼와 양떼를 데리고 애굽을 떠나겠다고 바로 앞에서 편 모세의 주장에도 명백히 나타난다. (22.2)
 이 모든 사실이 옳다면, 전반적인 제사 제도의 근간(根幹)으로 여길 만한 것이 있다. 희생 동물을 단순히 죽이는 것, 피 흘림, 그 사체를 번제로 드림. 후대에 생긴 세부 사항들에 마음을 지나치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23.1)
 새로운 진전(進展)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여행하던 중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공식적인 제사장 직분과,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로 성막과 그것의 봉사 체계에 초점을 맞춰 세부적인 희생 제도에 관한 새로운 지시를 주셨다. 이 체계에 관련된 의식(儀式)과 상징에 대한 해석 및 그것들의 현대적 적용을 놓고 재림교회 내에서 상당한 신학적 논의(논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가 일어났다. 또한 비(非)재림교회 학자들의 생각에도 그것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나는 여기서 그 관건(關鍵)들 중 몇 가지만을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3.2)
 그러면 우리는 먼저 전반적인 문제를 적절하게 조망(姚望)하기 위해, 시내산에서 한층 더 구조화된 희생제사 제도를 세운 이유들을 간단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를 제시한다. (23.3)
  1.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유형(有形)의 증거를 제공하기 위해. (23.4)
 시내산에서 모세와 교제하시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사실상, 성소를 건립하고 그 봉사를 개시(開始)해야 하는 명백한 유일의 이유가 이 구절에 나와있다. 에덴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첫 부모와 아무런 막힘 없이 대면하여 교제를 누리셨다. 죄가 들어옴으로써 이 열린 교제의 경험은 끝장나고, 인간 편에서 느끼는 거리감이 생겼다. (23.5)
 애굽에서 살던 시기(사실은 그 경험 때문에)에 이 거리감은 더욱 심해졌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났을 때 보인 반응에서 이것을 감지할 수 있다.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권고(勸顧)하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출 4:29~31). (24.1)
 분명히 그들은 자신들에게서 한참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생각하던 그분, 그들의 생각에 자신들을 비열한 노예로서 무의미한 인생살이를 하도록 내버려두신 그분이 진정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다는 계시로 인해 마음이 동했을 것이다. 위 성경절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분이 그들을 “돌아보셨다.” (24.2)
 그런 후에 하나님은 성막을 건립하심으로써, 그분이 백성들 중에 임한 것을 그들의 곤경 때문에 한 일시적인 “돌아봄”[방문]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이 알기 원하셨다. 그분은 아예 그들 중에 거하기 위해서 오셨다. 출애굽기 25:8에 사용된 히브리어 샤칸(šakan, “거하다”)은 어떤 공동체 내에 영구적으로 거주한다는 뜻을 함축한다. 사실, 공동체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와 임재 그리고 그것과의 연대성은 파손되지 않고 남아 있게 된다. “내가 그들 중에 [영구적으로]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 켜 나를 위하여 짓되.” (24.3)
 그러므로 성막이 세워졌을 때 신비스런 구름이 그곳을 덮어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 그리고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다(출 40:34, 38). (25.1)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생활하던 수백 년 동안 정규적인 종교 교육을 받을 기회를 빼앗겼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은 조상들의 거룩한 전통과 접할 수 없었다. 거룩한 실재들을 개념화하는 그들의 능력은 늘 저급하였다. 예컨대, 모세가 시내산에 지체하는 동안 그들이 눈에 보이는 신을 요구한 것을 보라(출 32:1).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유형(有形)의 증거가 필요했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성소 봉사를 마련하심으로 그들이 거하는 곳에서 그들을 만나셨다. 광야의 진영을 고지대에서 바라보면, 중앙에 성막이 있고 사방이 이스라엘의 장막들로 둘러싸여 있다(다음 페이지의 그림을 참조하라). (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