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하나님은 밀러(Miller)에게 그의 실수를 보여 주시지 않았는가?
 일부의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밀러에게 미리 그가 과실을 범하고 있음을 알려 주셔서 1844년 10월의 대실망을 사전에 예방하시지 않았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에 대해 최소한 두 가지의 답변이 있다. (394.1)
 (1) 하나님께서 밀러에게 어떤 점을 잘못 생각했는지를 보여 주셨다! 2,300 일의 끝에 진실로 무엇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드디어 발견되었을 때, 밀러의 과오도 바로 성경에서 발견되었다. 밀러와 그의 동료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하나님 편의 잘못이 아니다. (394.2)
 (2) 위의 질문에 대한 반대 질문을 제기해 보는 것이 좋겠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당할 실망을 사전에 막지 않았는가? 종려나무로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일요일 즉 십자가에 달리시기 5일 전에는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군중들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눅 19:38),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 왕이시여”(요 12:13) 하고 환호하는 소리를 들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환호하는 군중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왕이 되어 로마 인들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세계의 수도로 삼으실 것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394.3)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그들의 실망은 얼마나 컸겠는가?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1 주일 후에 글로바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고 말하면서 흐느끼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394.4)
 예수님은 군중들이 실망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렇다면 왜 그는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가? 왜 그는 그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는 군중들을 막지 않으셨는가? 왜 그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고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셨는가? (394.5)
 예수님은 그렇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의 예루살렘 입성 행사와 그에 대한 환영 행사 전체를 실질적으로 후원하셨다. 그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고 한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친히 제자들에게 나귀를 끌어 오라고 부탁하셨다(마 21:1~11). 그리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군중을 조용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을 때도 그 요청을 거절하셨다(눅 19:39, 40). (394.6)
 이와 같이 예수님은, 백성들로 하여금 전혀 그의 의중에도 없는 일을 크게 기대하게 하고, 마침내 대실망을 맛보게 한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묵인한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었다. (394.7)
 그러나 이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셨는가? 실로 그렇다! 그는 온 우주의 왕이시다. 그는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분이셨는가? 그렇다. 그는 온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 백성들은 올바른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그 단어에 틀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잘못은 그들에게 있었고 예수님에게 있지 않았다. (394.8)
 예수님은 그들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그렇다면 왜 그 오해를 시정하시지 않았는가? (394.9)
 그분은 시정하려고 노력하셨다. 예수는 앞서 세 번씩이나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 말을 믿지 않았다(막8:31-33; 9:30~32; 10:32-34). (395.1)
 뿐만 아니라 메시아가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이 구약 성경에도 예언되어 있으며 수백년간이나 그 기록이 간수되어 왔다. (395.2)
 글로바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바랐”었다라고 한숨을 내쉬자, 예수님은 구약 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글로보와 그 동료에게 들려주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395.3)
 의심할 나위 없이 예수님은 그 “후손”이 상해를 받으리라고 예언한 창세기 3장 15절을 인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메시아가 “끊어짐을 당할” 것이라고 한 다니엘 9장 24~27절과, 어린 양이 도살장에 끌려갈 것에 대해 예언한 이사야 53장을 인용했을 것이다. 글로바와 그의 동료는 위의 성경절들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아마 암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미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가 자기 영광에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고난을 받을”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을 때, 그들의 마음은 기쁨과 안도로 뜨거워졌던 것이다(눅 24:26, 32). (395.4)
 만일, 예수께서 그의 백성들이 오해를 하여 실망을 당할 것을 알고 계셨다면 왜 예루살렘 입성 자체를 회피하지 않으셨는가? 그는, 구원의 계획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중요한 일(70주 예언의 성취)을 예루살렘에서 행하여야 할 것과, 백성들이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 일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395.5)
 이와 비슷하게 2,300 일의 끝에 이르자 예수님은, 구속의 계획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또 하나의 일을 시작하려 하셨다. 그리하여 성령은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대 재림 운동을 일으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그들을 믿게 하고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395.6)
 밀러의 운동이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끝내 배척을 당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그랬던 것처럼 결코 예사일이 아니다. 그리고 밀러의 무리가 당한 실망의 해답은 신학교 교수들이나 위대한 신학자들을 통해 나타나지 않았다. 그 해답은 성경을 연구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글로바와 그 동료에게 십자가 실망의 해답이 왔던 것처럼, 그리고 그들이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이루어졌던 것처럼, 하이람 에드슨과 그 동료에게 그것도 시골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실망의 해답이 주어졌다! (395.7)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두 경우에 있어서 똑같이 그 해답이 성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 해답은 늘 성경의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사람들이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아서 깨닫지 못한 것 뿐이다. (395.8)
 2. 윌리엄 밀러의 무리들은 승천(昇天)의 의복을 입고 미친 사람의 행위를 했는가?
 윌리엄 밀러의 기별 때문에 사람들이 놀라서 미쳤다든가, 밀러를 따르는 상당 수의 무리들이 옥양목으로 만든 “승천 복”이란 가운을 만들어 입고 하늘로 올라갈 날을 기다렸다는 등의 괴이한 이야기들이 지금도 여전히 출판물에 나타나고 있다. 10월 22일 그 결정의 날에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으려고 나무 꼭대기로, 혹은 지붕 꼭대기나 교회 뾰족탑으로 사람들이 기어오르다가 승천 의복에 걸려 땅에 떨어져 목을 부러뜨렸다는 이야기도 나돌고 있다. (3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