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어느 토요일 아침 그는 누군가가 그를 초청하여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전하지 않은 이 기별을 전해달라고 요청한다면 나가서 전하겠다고 하나님께 약조하였다. (352.12)
그런데 두렵게도 그가 하나님께 그같이 약속한지 30 분이 채 되지 않았는데 16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사는 조카가 말을 타고 달려와 그가 다니는 침례교회에 와서 설교를 해 달라고 초청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같은 약속을 해버린 자기 자신과 이런 식으로 조건을 충족시키신 하나님께 너무 화가 치밀어 문을 박차고 집 밖으로 나갔다. 그는 집 근처의 단풍나무 숲으로 들어가 기도했다. 거기서 한 시간 가량 앉아 고민하던 끝에 그는 결국 승낙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353.1)
윌리엄 밀러는 진실로 2,300일에 관해 설교하고 싶지 않았다! (353.2)
그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짧은 일정의 첫 회집은 성공적이었다. 두 사람을 제외한 13가족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였다.42 그 당시의 가족의 크기를 고려할 때 적어도 50명 이상이 새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353.3)
즉각 여러 곳에서 초청이 쇄도하여 미처 다 받아 줄 수 없을 정도였다. 침례교회, 감리교회, 조합교회, 장로교회, 크리스찬 커넥션(Christian Connection),* 등 여러 교회의 목사들이 초청했다.
1800년 대 전반기에는 활발하게 교세가 확장되던 큰 교단이었는데 나중에는 다른 교단들에 흡수되고 말았다.
(353.4)
매사추세츠 로웰의 크리스찬 커넥션 교회의 목사인 티모디 코울(Timothy Cole)은 다른 목사들의 추천만 듣고 얼굴도 모르면서 밀러를 초청했다. 열차 역에서 밀러를 기다리던 코울 목사는 한 늙은 농부가 기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그 날 저녁 그는 너무나 난처한 나머지 그의 회중에게 밀러를 소개하지도 못하고 대신 교인들 틈에 끼여 앉아 버렸다. (353.5)
그러나 설교가 진행되면서 밀러가 재림에 관해 질문을 제기하고 성경에서 그 대답을 찾아내기 시작하자 목사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밀러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딤후 2:15) 같이 경우에 합당한 방법으로 성경을 찾아내 읽는 것”을 본 코울 목사는 15분 후에 자랑스럽게 단상 위로 걸어 나가 밀러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매일 밤마다 회중의 수효가 불어났다. 강연 일정이 끝났을 때 40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도합 60명이 교회에 새로 들어왔다.43(353.6)
목사들이 밀러의 기별에 참여하다
밀러의 지방 교회는 그에게 공식 설교자의 자격증을 수여했으며 여러 교단의 70~80명의 목사들이44 예언에 관해 설교하도록 비공식적인 신임장을 그에게 수여했다. (353.7)
이같은 보증은 확실히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밀러는 그 후 8년 동안 순회 강연자와 부흥사로서 단독으로 활동했다. 1839년 겨울에 반가운 변화가 일어났다. 크리스찬 커넥션 교회의 목사인 조수아 V. 하임즈(Joshua Y. Himes:1805~1895)가 밀러의 사업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하임즈는 당시 보스턴의 찰든 스트리트 교회(Chardon Street Chapel)의 젊은 목사였는데 이미 보스턴 시에서는 노예 제도, 음주,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었다. 그는 밀러의 전도 사업을 위하여 사인즈 오브 더 타임즈(Signs of the Times)라는 정기 간행물을 내기 시작하였다. 이 잡지를 필두로 하여 여러 개의 잡지가 재림 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간행되었다. 그는 또 5년간에 재림에 관한 40권 이상의 책들을 출판하였다. (353.8)
하임즈가 자원하여 밀러를 지원해 주기 이전에도 밀러는, 이미 널리 존경을 받고 있던 감리교 저술가인 조시아 리취(Josiah Litch, 1809~1886)로부터 큰 지원을 받고 있었다. 리취는 밀러의 강연집을 읽은 지 수 주일 안에 재림 예언에 관한 200쪽짜리 책을 저술했다. (354.1)
차알즈 피취(Charles Fitch, 1805~1844)는 두루 사랑을 받는 조합교회 목사로서, 한때는 유명한 전도자인 차알즈 피니(Charles G. Finney)의 행정 담당 보좌관을 역임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목사가 재림 기별을 전파하러 다니기 위해 평판 좋던 보스턴 교회의 목회직을 사임했다. (354.2)
위와같이 두드러진 지도자들 외에도 수많은 목사들이 또 있었다. 전직 선장이었던 절제 운동가 조셉 베이츠(Joseph Bates), 역시 하임즈와 마찬가지로 크리스찬 커넥션의 목사였으며 한 겨울 6주 동안에 1천 명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제임스 화잇(James White)같은 사람도 빼놓을 수 없다. (354.3)
그러나 얼마나 많은 지원자들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당시의 추산으로서는 700명에서 2,000명에 이르는 지원자들이 거론되었다. 밀러의 기별을 전파한 목사로 뚜렷이 알려진 174 명의 목사들 중 약 절반이 감리교 목사였으며 4분의 1이 침례교 목사였고 그 나머지는 조합교회, 크리스찬 교회, 장로교회, 성공회, 루터 교회, 화란 개혁교회, 퀘이커교, 등 여러 교파 출신의 목사들로 구성되었다.45(354.4)
여러 중요한 개신교 교단의 유능하고 사려 깊은 목사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교육 수준이 낮았던 밀러를 지원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인상적인 일이다.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재림 운동은 그리스도 중심의 개혁 운동이었다. 그 당시 존경받는 교회의 지도자와 평신도, 그리고 무신론자와 자연신론자 및 교회 밖의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는 무관심한 영혼들이 모두 밀러의 기별을 따뜻이 받아들였다. (354.5)
재림 기별에 대한 관심은 날로 고조되었다. 밀러와 하임즈, 그리고 그 밖의 지도자들은 쉴사이없이 뉴욕과 뉴잉글랜드 일대를, 서쪽으로는 일리노이 주까지, 북쪽으로는 카나다 동부까지, 남쪽으로는 메릴랜드까지 순회하였다. 그들은 노예 제도를 반대했기 때문에 미국의 서남부 지방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했으며 극서부지방은 아직 미국 영토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다. (354.6)
로버트 윈터(Robert Winter)는 이 재림 기별을 영국으로 전했다. 우편물을 통하여 이 기별은 미국 내의 모든 지역과 세계 도처에 있는 영어 사용국의 선교 본부에 전달되었다.46(354.7)
수많은 무리가 장막 집회에 몰려옴
재림 기별을 들으려는 무리들의 수효는 갈수록 증가하여 교회나 강당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1842년 여름에 밀러를 지원하는 지도자들의 “대총회”는 그 여름에 세 차례의 장막 집회를 개최하기로 표결하였다. 그러나 대중의 관심이 너무 고조되어 30회 이상의 장막 집회를 치러야 했다. 다음 해에는 50회 이상의 장막 집회가 개최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최소한 130 회의 장막 집회가 개최 되었는데 거기에 몰려온 청중은 모두 50만 명이 넘었다. (354.8)
최초로 개최되었던 장막 집회에 잠시 참석한 일이 있었던 시인(詩人) 존 그린리프 휘티어(John Greenleaf Whittier)는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그 때의 광경들, 즉 성경의 상징적인 언어들을 설명하던 강연자들의 그 웅변, 캔버스에 그려진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 요한계시록의 짐승들, 그리고 그늘진 삼림 지대의 아치들, 크게 원을 이루고 있는 흰빛의 천막들, 분향처럼 장막의 모닥불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하늘로 쳐든 진지한 얼굴들로 이루어진 바다를 생생히 기억했다.47(3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