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쿤자는 고난에 찬 일생의 어느 시점에서 성경 예언의 불빛을 발견하고 삶의 용기를 얻었다. 그는 스페인 어(語)로 방대한 양의 원고를 집필했다. 그러나 저자의 이름이 밝혀지면 종교 재판소가 그의 저서를 불태울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대식 이름인 후안 요사팟 벤—에즈라(Juan Josafat Ben-Ezra)라는 가명으로 책을 내었다. 그는 또 유태계 그리스도인 저술가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리스도”란 명칭 대신에 “메시아”란 명칭을 사용하여 그의 책명을 「영광과 위엄 속에 이루어질 메시아의 오심」(The Coming of Messiah in Glory and Majesty)이라 했다. (347.11)
 순식간에 스페인 어로 된 필사본과 이탈리아 어와 라틴 어로 된 번역본들이 비밀리에 남부 유럽과 남아메리카 일대에 보급되어 재림에 대한 관심을 크게 고조시켰다. (347.12)
 라쿤자가 사망한지 여러 해가 지난 후 가톨릭의 종교 재판소는 라쿤자의 저서를 정죄했으며 1824 년에는 교황 레오 12세가 “어떠한 언어로든지” 그 책의 출판을 금지하라고 직접 엄명하였다. (348.1)
 런던의 상류 사회를 상대로 설교했으며 한때 스코틀랜드에서 12,000명의 군중에게 설교한 적이 있는 유명한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 1792~1834)목사는 가톨릭에서 금서 처분된 이 책을 영어로 번역했다. 한 영국의 대사(大使)가 영어 번역판 200권을 칠레로 가져 갔다. 칠레는 일찌기 라쿤자가 봉사했던 나라였다. 아직도 칠레에는 라쿤자를 기념하는 라쿤자 클럽이 있다. (348.2)
 라쿤자는 예수회 수도사였기 때문에 성경 예언을 연구함에 있어서 역시 예수회 수도사였던 프란시스코 리베라(Francisco Ribera, 1537~1591)의 연구 방법을 좇았다. 프란시스코 리베라는 예언 연구에 있어서 개신교 학자들의 역사주의 방법론과는 정반대되는 미래주의적 방법론을 재정립한 사람이었다.23 (348.3)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쿤자는 심판과 재림과 전천년주의(premillennialism)에 대한 관심을 크게 고조시킨 공로자이다.24 (348.4)
 첫째 천사의 기별을 성취시키는데 기여한 또 한 사람은 조셉 울프(Joseph wolff, 1795~1862)이다. 이 사람은 유태계 유럽 인으로서 잠시 가톨릭 신앙을 신봉했던 사람이다. 그는 소년 시절에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구약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 가톨릭 교도로 개종했으며 가톨릭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로마에서 교육을 받던 중 그리스도의 재림 예언에 끌리어 개신교로 개종했다. (348.5)
 울프는 2,300일 예언이 1847년에 끝난다고 계산했다. 6개의 언어에 정통했으며 8개의 언어로 의사 소통이 자유로왔던 이 놀라운 유태계 그리스도인 선교사는 수많은 위험을 무릎쓰며 인도 등 여러 나라에 심판의 시간에 관한 기별을 전파했다. 1837년에는 미국의 초청을 받고 미국 상하 양원의 합동 예배시에 설교를 하였다.25 (348.6)
 헨리 드러먼드(Henry Drumond, 1786~1860)도 재림 운동에 수많은 시간과 재산을 바친 사람이다. 그는 영국의 은행가이자 국회 의원이었으며 영국 왕립회(Royal Society)의 회원이었는데, 앨버리 파크(Albury Park)에 위치한 그의 웅장한 저택에서 전후 다섯 차례에 걸쳐(1826~1830)서 예언 연구 대회를 주재했다.26 (348.7)
 드러먼드의 예언 연구 대회에 참여했던 스코틀랜드의 평신도 윌리엄 커닝엄(William Cuninghame, 1776~1849)은 예언에 관해 21권의 책을 저술했다.27 앨버리 파크 예언 연구 대회에 참여한 그 밖의 인사로서는 이미 앞에서 소개한 조셉 울프와 에드워드 어빙이 있다. 어빙은 라쿤자의 저서에 의해 재림 예언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제1차 예언 연구 대회가 소집되었던 1826년에는 라쿤자의 책을 번역했다. (348.8)
 어빙은 두 명의 다른 재림 설교자, 제임스 프레르(James Frere)와 루이스 웨이(Lewis Way)와 더불어 예언 연구 협회(Society for the Investigation of Prophecy)를 창립했다. 이 협회의 목적은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느 스코틀랜드 전도 여행 중에 보나르(Bonar) 집안의 세 형제를 재림 신앙으로 개심시켰다. 호라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는 계간으로 발행되는 예언 학술지인 「쿼터리 저널 오브 프로퍼시」(Quarterly Jourmal of Prophecy)의 편집인으로 25년간 봉사했다. 그의 아름다운 찬미들 중에 “내게 와서 쉬라는 예수님의 음성 들었네”(I heard the voice of Jesus say ‘come unto Me and Rest’)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것은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348.9)
 그러나 어빙의 일생에 비극이 닥쳐왔다. 1831년 어느 일요일 그의 설교는 어떤 사람의 방언에 의해 중단되었다. (348.10)
 후에는 신앙으로 병고치는 이상한 일들이 발생했다. 어빙의 교회에 출석한 많은 사람들이 언짢게 생각했다. 어빙은 착한 목자였기 때문에 이 소란스러운 사태를 늦은비 성령의 내림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교인들의 투표에 의해 설교단을 빼앗기고 심지어는 이단 심문까지 받게 되었다. 그는 40대의 한창 나이에 실의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하여 그 유명한 글래스고 사원(Glasgow Cathedral)에 그를 안장했다.28 (349.1)
 우리에게는 차후에 다시 한 번 어빙의 신도들에 대해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349.2)
 독일에서는 요한 리히터(Johann Richter)가 그의 6권으로 된 「가정용 성경 주석」(Family Bible Commentary)에서 재림을 강조했다. 레오나르트 켈버(Leonard Kelber)는 바바리아(Bavaria)에서 그의 학동들에게 리히터의 주장을 가르쳤다. 가톨릭 교회의 사제인 요한 루츠(Johann Lutz)는 재림을 설교함으로써 가난과 죄로 찌들은 마을 사람들을 변화시켰다.29 (349.3)
 스위스의 제네바에서는 프랑스와 S.R.L. 가우센(Francois S.R.L. Gaussen, 1790~1863) 이 여러 가족들에게 재림을 가르침으로써 유명해졌다. 그는 유명한 교회사 학자인 메를 도비녜(Merle daubigne)의 가까운 친구였는데 그의 재림 설교 때문에 국교 교회의 강단에서 축출되어 “복음 협회 신학교”(Evangelical Society's School of Theology)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주일 학교 어린이들에게 다니엘를 가르쳤다. 가우센의 가르침을 들은 어린이들이 집에 가서 전함으로써 부모들도 이 기별을 알게 되었다.30 (349.4)
 스웨덴에서는 어린이들이 전도함
 스웨덴에서는 오직 국교의 성직자만이 설교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어린이들이 첫째 천사의 기별을 전파하는 일에 더 활동적으로 역할을 수행하였다. (349.5)
 

1842년과 1843년에 스웨덴의 기존 성직자들이 첫째 천사의 기별을 배척했을 때, 십대 후반의 소년들과 어린이들, 심지어는 여섯살짜리 어린이들이 그 기별을 전파하였다.
(349.6)
 이것은 첫째 천사의 기별을 성취시킨 역사 중에서도 가장 괄목할 현상의 하나였다. 1842~1843년 사이에 청년들과 어린 소년 소녀들이 심판의 시간을 전파했다. (3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