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일원론과 이원론
 이원론은 헬라 사상에 의해서 그리스도교로 들어왔다. 이에 관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자인 엔리케 두셀(Enrique Dussel)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견해는 히브리 사상의 범위 안에서 형성되었으며, 그 동일한 사상이 초기의 그리스도교 신앙 속에서 발전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계(Christendom, 하나의 문화인 이것을 성경적 그리스도교 신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초기의 경험들이 헬라화하는 과정 속에서 탄생하였다. 새로운 언어가 사용되고 해석과 표현에 논리적인 방법들이 적용됨으로, 결국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견해는 약간 완화된 이원론으로 빠져들어 갔다.”(17쪽). (274.1)
 헬라의 정통 학파들이 생겨나기 이전에도 이미 헬라에는 열등한(물질적인) 육체와는 대조를 이루는 신적인 요소로서의 내면의 능력을 강조하는 이원론적인 전통(오르페우스교[orphism], 피타고라스주의[Pythagoreanism])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력은 수련을 통해서 강화될 수 있었던 반면에, 육체는 금욕을 통해서 그 지성에 복종하여야만 하였다. (275.1)
 플라톤(BC 4세기)은 궁극적인 실재는 정신적인 것이며 몸은 영혼의 무덤(소마[“몸”]와 세마[“무덤”]라는 동음이의어들을 이용한 언어유희, Gorgias 493)에 불과하다는 관념론을 가르쳤다. 영혼은 이 땅으로 오기 전에 이미 선재해 있던 창조되지 않은 불멸의 존재였으며, 사람이 죽은 후에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가기도 하였다(Phaedo 75).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대신하는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몸과 영혼은 근본적인 면에서 같은 한 실체의 두 측면, 곧 사람을 구성하는 물질과 형태이다. 하지만 플라톤학파의 전통이 다시 등장하였다. 영지주의(Gnosticism)와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는 부활에 관한 성경의 교리를 부정하면서 오직 몸과 영혼의 대립만을 강조하였다. (275.2)
 초기 그리스도교는, 도덕적으로는 해이했지만 플라톤학파에 대해서는 열광적이었던 쇠퇴기에 접어든 헬라.로마 사회와 싸워야 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몇몇 저술가들은 영지주의와 영지주의가 옹호하는 이원론이 물질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며 그것들을 비판하였다. 영혼은 불멸하지 않고 “존재하기를 멈추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회심했던 유스티노스 마르튀로스(Justin Martyr, 100년경-165년경)는 부활을 기다리지 않고 “죽을 때에 자신들의 영혼들이 하늘로 데려감 받는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이단자로 비난하였다(Dialogue With Trypho 5, 6, 80). 현존하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문서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 문서들만으로도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을 때에 간직했던 소망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지 그 이전 어느 때에 하나님을 만날 소망이 아니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는 또한 그 문서들에서 일원론에 대한 확신을 담고 있는 표현들도 찾아볼 수 있다(Clement 1 Corinthians 24-26; Polycarp Martyrdom 14). (275.3)
 그러나 그 후에 신플라톤주의가 그리스도교로 침입해 들어왔다. 육체는 성적인 욕망을 비롯한 기타 여러 욕망들의 거처라는 생각이 헬라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의 연구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를 시작으로 교부들 사이에서 발전해 나아갔으며, 금욕주의는 경건한 삶의 본보기로 받아들여졌다. (275.4)
 교회의 학자들은 여전히 창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육체의 부활을 옹호하였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도 점차적으로 영혼이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죽을 때에 분리된 영혼이 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또는 무의식의 상태에서 부활을 기다린다고 생각하였다 이 영혼은(플라톤주의나 오리게네스의 극단적인 견해에서처럼) 이전에 이미 선재하고 있던 영혼은 아니었지만, 개별적으로 창조된 이후에는 영원토록 존재하는 영혼이었다. (275.5)
 중세에는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가 의식이 있는 상태로 받아들여졌다. 육체를 떠난 영혼은 그가 장차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즐거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따라서 부활의 때에 있을 최종적 심판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게 해 주는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즐거움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있을 정결의 시간으로 인해 늦추어질 수도 있다. 그는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을 통해서 이생에서 지은 그의 죄를 완전히 용서받음으로 이 유예의 시간을 피할 수도 있다. 연옥에 관한 이 교리는 그 후에 서방교회에서 육체적 고행을 대신하는 면죄부 제도와 더불어 더욱 발전하였다. (275.6)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이원론적 색체가 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토마스 아퀴나스를 포함한 스콜라 철학자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스도교 문화속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이 사상이 유럽에 다시 소개된 것은 스페인의 유대.아랍문화를 통해서였다. 아퀴나스는 영혼은 사람의 형태이며 몸은 그가 지니고 있는 물질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이 같은 견해는 논리적으로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그의 사상을 교회의 전통과 절충시키기 위하여 완전 무형의 멘스(“마음”) 라는 개념을 제시한 후에 사람이 죽을 때에 영혼이 “불가사의하게” 그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나간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의 견해는 결국 사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는 이르지 못하는 견해가 되고 말았다. (276.1)
 1513년에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더욱 극단화된 견해(아베로에스주의, Averroism)가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정죄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4년 후에 면죄부에 대한 지나친 선전이 종교개혁을 발화시켰다. 루터(1483-1546년)의 메시지의 핵심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긴 하지만, 그는 또한 레오 10세의 교서에 답하여 바로 얼마 전에 재확인된 영혼불멸에 관한 교리를 “로마교회의 교서의 쓰레기더미 속에 쌓여있는, 무수히 많은 터무니없는 가공적인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라고 공격하기도 하였다(Weimar Ausgabe 7:131,132). 당시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영혼이 부활 때까지 잠잔다는 것이었다. (276.2)
 이 문제는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더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루터 자신은 이 논쟁에서 망설이는 자세를 취하였다.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는 연옥에 관한 교리를 확실히 배척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다른 교회들은 그것을 배척하였다. 틴덜(Tyndale)과 밀턴(Milton)과 초기 침례교도들은 영혼이 잠을 잔다는 개념을 옹호하였지만, 당시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칼뱅(1509-1564년)은 이 견해를 배척하였다. 하지만 많은 학자와 목사 및 그리스도교 단체들은 항상 성경적인 일원론을 인지하고 받아들여 왔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에밀 브룬너(Emil Brunner), R. 니부르(R. Niebuhr), 오스카르 쿨만(Oscar Cullmann) 같은 저명한 신학자들이 일원론을 지지하였다. 최근에는 J. W. 웨넘(J. W. Wenham), J. R. 스토트(J. R. Stott), 클라크 H. 피노크(Clark H. Pinnock) 같은 저명한 복음주의자들도 지옥을 끊임없는 고통과 번민으로 여기는 전통적인 견해에 대하여 혼란을 느낀 끝에 영혼이 잠잔다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은 아직도 전통적인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스카르 쿨만이 그 걸출한 작품〈영혼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을 내놓은 후) 20년이 지난 지금도∙∙∙평신도들은 여전히 불멸의 영혼에 그들의 소망을 두고있다. 이것이 이교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성경학자들과 신학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거세지고는 있지만아직까진 그 소리가 자기들 사이에서만 내는 소리에 불과하다.”(Myers 78). (276.3)
 B. 재림교회는 타고난 불멸을 배척함
 초기 밀러주의 재림신자들은 성경에서 이 진리를 점진적으로 배워나갔다. 이 문제가 18세기와 19세기에 큰 논쟁거리였다는 점으로 보아 재림운동에 가담한 신자들 각자가 이 진리를 간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배경을 가진 아르헨티나 사람으로 안식일 준수자이며 초기 “재림신자”였던 프란시스코 라모스 메히아(Francisco Ramos Mexia)는 1816년경에 자기가 소장하고 있던 마누엘 라쿤사(Manuel Lacunza)의 〈영광과 위엄 중에 오시는 메시아(Venida del en gloriay magestad)〉, 3권, 293쪽의 여백에 사도행전 2:34“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라는 말씀에 대한 예리한 해설을 기록하였다. 그는 이 성경구절로부터 다음과 같은 추론을 제시했다 “사람은 그의 영혼(또는 여러분이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그것)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너는∙∙∙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후에 거기에서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276.4)
 밀러주의 재림신도들 가운데서는 감리교 목사였던 조지 스토스(George Storrs)가 가장 먼저 이 진리를 공적으로 옹호하는 활동을 폈다. 그는 1841년에 헨리 그루(Henry Grew)라는 사람이 6년 전에 발행한 한 소책자를 읽고, 사람은 일부분이 아닌 전체가 죽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또한 이듬해 찰스 피치(Charles Fitch)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관한 재림신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1842년에 〈시대의 징조(The Signs of the Times)〉 이 성경적 진리를 전파하는 다른 재림신도 목사를 비판하자, 그는 〈여섯 개의 설교(Six Sermons)〉를 통해서 이 진리를 옹호하였으며, 또한 이 문제만을 다루는 〈성경연구자(Bible Examiner)〉라는 정기 간 행물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277.1)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 및 그의 운동에 가담한 다른 지도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찰스 피치가 1844년에 스토스의 이 같은 노력에 동참하였다. 이 교리가 1845년에 올버니(Albany) 총회에서 채택된 밀러주의자들의 열 가지 기본교리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지도자들은 이 교리가 신속하게 밀러주의 재림신도들 사이에 뿌리박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기본교리들 중 하나는 구원받은 자들이 받을 유산은 죽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재림의 때에 주어지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277.2)
 밀러주의자들이 후에 여러 분파로 나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 모두는 사람의 일부분이 아닌 전인이 죽는다는 교리를 계속 유지하였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 중에서는 R. F. 코트럴(R. F. Cottrell)과 제임스 화잇(James White)이 1853년부터 〈리뷰 앤드 헤럴(REVIEW and Herald)〉실은 기사들을 통해 이 견해를 옹호하였다. 악인들의 최종적 소멸이 1874년에 〈시대의 징조(Signs of the Times)〉공표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기본 원칙들의 선언”에 포함되었다. (277.3)
 C. 죄의 보편성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의 죄의 보편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잘못된 견해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 자제심을 고취시키려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그러나 잘못된 이해에 기초하여 펠라기우스(5세기)는, 아담의 죄는 단지 나쁜 선례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이 우리의 선택 능력에는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갓 태어난 아이들은 아담이 죄를 범하기 이전의 상태와 동일한 상태에 놓여있다. 이 때문에 시대마다 어떤 사람들은 유혹을 물리치고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상태에 놓여있다(참조 Augustine, On the Proceedings of Pelagius 23 [NPNF-1 5:193]). (277.4)
 펠라기우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3543-430년)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의 비성경적인 특성을 쉽게 증명하였다.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은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진리 중 하나이다(왕상 8:46; 시 143:2; 잠 20:9; 전 7:20; 롬 3:10-23; 요일 1:8-10). 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는 거듭난 사람만이 정복할 수 있는 세력으로, 사람이 자신의 타고난 의지력만으로는 결코 그것을 극복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와 동시에 우리 모두는 타락 전 아담의 상태와는 전혀 다르게 그의 죄책(원죄)을 가진 상태에서 타락한 의지를 지닌 채 태어난다고 가르쳤다. 이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이 없이는 구원의 길 조차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하였다는 그의 생각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은혜는 거부할 수가 없는 은혜이며, 따라서 어떤 사람들(버림받은 사람들)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끌어내었다. 이 견해는 이중예정설(double predestination)이라 불리는데, 이는 구원을 위해 선택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영벌을 받는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77.5)
 그의 시대의 교회는 펠라기우스에 대한 그의 비판은 받아들였지만 이중 예정설은 배척하였다. 오랑쥐공의회(Synod of of Orange, AD 529년)는 원죄, 은혜의 필요성 그리고 믿음과 구원의 선택을 위해 우리 안에서 성령이 하시는 사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오랑쥐 공의회의 결정은 그리스도인들로 은혜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도록 하였는데, 이는 진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곧 성령을 거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공의회에 의하면, 멸망당하기로 예정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견해는 여러 세기 동안 교회의 일치된 견해로 받아들여졌다. (27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