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새 연구 제 5 장 느부갓네살의 참회록(단 4장)
 다니엘은 이 엄숙한 심판의 기별을 대왕에게 전함에 있어 처음에는 친구로서의 염려와 이해를, 다음에는 선지자로서의 곧고 분명한 기별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복음전도자로서의 열렬한 호소를 발함으로써 하나님의 완전한 사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이 곧 오늘날의 모든 하나님의 종들의 귀감이 아닌가(딤후 4:2). (82.30)
 다. 집행된 집행유예
 가) 1년의 집행유예
 하나님께서는 결코 경고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으시며, 경고한 즉시 집행하지 않으신다. 언제나 집행유예 기간을 설정하시고 이 은혜의 기간 동안 회개함으로써 예고된 심판을 면제받게 하려고 하신다. 홍수 전의 세상을 위해 120년 간의 집행유예 기간을 설정됐으나 회개치 않음으로써 심판이 집행되었다.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도 넉넉한 집행유예 기간을 선고받았으나 결국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멸망당하였다. 반면에 40일간의 유예기간을 배정받은 니느웨는 회개함으로써 이를 모면하였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다. 지금 느브갓네살은 개인적으로 그의 죄악에 대해 집행을 유예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1년만에 그의 유예기간은 끝나고 말았다. 그는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았어야 했다(고후 6:12). (82.31)
 「한 동안 선지자의 경고와 권면이 느브갓네살에게 강하게 인상되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지 아니한 그의 마음은 곧 성령의 감화를 상실했다. 방종과 야심이 왕의 마음에서 근절되지 않은 채 후에 이 특성들이 다시 나타났다 · · · 이전에는 매우 공의롭고 자비로웠던 그의 통치는 압정으로 변하였다. 마음을 완고하게 한 느브갓네살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의 재능을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썼으며, 그에게 생명과 능력을 주신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욱 높혔다. 여러달 동안 하나님의 심판은 지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으로 회개하는 대신 왕은 교만에 빠져서 마침내 그 꿈의 해석을 불신하고 전에 그가 두려워한 것을 우습게 여겼다」 (선지자와 왕, 495, 496). (82.32)
 마침내 그의 집행 유예가 폐기되는 날이 왔다. “열 두 달이 지난 후” 아마도 그 유명한 가공원(hanging gardens) 옥상이 아니면, 바벨론 외성곽 북단에 있는 새로 지은 하기 별궁(Summer palace)으로 여겨지는 다니엘서 주석, 113.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다가 그는 자신이 건설한 바벨론성을 바라보며 그 화려함과 장엄함에 우쭐하여져서 다시 교만하게 뇌까렸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4:30). (82.33)
 느브갓네살은 아직도 그가 반드시 배워야 할 사실 즉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시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4:25) 알아야 하는 표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내가 · · · ,” “나의 · · ·,” “내 · · ·”가 강조된 그의 자만심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한 사단의 정신이요 태도였다(사 14:13). 이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하늘에서는 1년 전 다니엘을 통해 전달된 하늘 법정의 집행 유예 선고가 그대로 집행된다는 통고가 있었다(4:31). (82.34)
 나) 「내가 건설한 이 큰 바벨론」
 느브갓네살로 하여금 이토록 파멸적인 교만에 빠지게 한 바벨론은 실제로 얼마나 장엄했고 화려했는가. 이에 대한 확인은 고대의 문헌과 현대 고고학의 발굴을 통하여 가능하다. (82.35)
 바벨론은 느브갓네살 이전 천여년 전인 아모리왕 하무라비가 세계적인 도시로 만든 이래 어머니 도시(the mother city)로 높임을 받았었다. 앗시리아에 의해 지배받던 굴욕의 시대에도 바벨론은 학문과 법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아버지 나보포랏살이 재건을 시작한 이래 느브갓네살에 이르러서는 대대적인 재건 및 확장 및 미화(美化)사업이 계속되어 이전의 도시는 거의 잊혀졌다. (82.36)
 「느브갓네살은 한 세대 안으로 고대의 찬란함을 훨씬 능가하는 참으로 필설로 묘사하기가 어렵도록 장엄하게 일으켜 놓았다. 그래서 그 놀라운 매력을 지녀온 로마가 웅장하고 화려하고 집중적인 모든 것의 상징으로 전형적인 세계 도시라고 하지만, 인류의 정신과 상상력에서 바벨론을 당해낼 수가 없다. 고대 역사가들은 유프라테스 강변의 이 위대한 도시의 궁전들과 신전들, 가공원들의 웅장함을 묘사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다.」 James Baike, “The Cradle of Civilization,”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Feb., 1916, 158. (82.37)
 발굴된 당대의 한 비문에는 자신의 업적이 이렇게 쓰여 있다. (82.38)
 「나의 이전의 어떠한 왕도 이룩하지 못한 것을 나는 했는데 바벨론 바깥 쪽 바벨론 동편으로 그 도시를 둘러 큰 성을 쌓았다. · · · 나는 그 머리를 산처럼 높혔다. · · · 에사길라와 바벨론의 방벽을 나는 견고하게 하였고, 나의 통치에대한 영원한 이름으로 만들었다. 오 ! 마르둑, 신들 중의 주요, 나의 거룩한 창조자요, 당신 앞에서 나의 행위가 경건해지고 그것들이 영원하게 하소서 · · ·오 ! 마르둑이여, 당신은 참으로 나의 구원자요, 나의 도움이십니다.」 Ibid., 368, 369. (82.39)
 1899년부터 1917년에 걸쳐 로버트 콜데베이(Robert Koldewey)의 지휘 아래 진행된 발굴을 통하여 고대 바벨론 성의 상당한 부분이 밝혀졌다(사진 참조). 발굴 결과 느브갓네살 이전의 바벨론은 유프라테스강 동편의 내성가(Inner City) 부분 밖에 없었는데 그 크기는 사면이 각각 1마일쯤 되는 거의 정방형이었다(지도 참조). 궁전들과 행정부 건물들은 내성가의 서부 지구에 있었고 그 아래 남쪽으로 마르둑신을 위한 복합 대 신전인 에사길라(Esagila)가 있었으며 그 중심이 되는 신전고탑(Ziggurat) 에테메난키(Etemenanki)가 300피트 이상의 높이를 자랑하며 서 있었다. (82.40)
 고대 세계에서 이것보다 높은 건축물은 이집트의 기자(Giza)지방에 있던 두 피라밋 뿐이므로 이 탑은 니므롯이 쌓은 바벨탑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일 것이다. 이 벽돌로 된 고탑은 7층으로 되었는데 맨 윗층은 마르둑을 섬기는 신전이었다. 느브갓네살이 왕이 된 후 바벨론이 대 제국으로 뻗어감에 따라 수도 확장공사에 착수하여 유프라테스강 서편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를 신시가(新市街; New City) 혹은 강서구(Western Quarter)라고 부른다. Horn, 42. (82.41)
 이들 신·구 시가지는 중앙 부분에서 여덟 개의 교각을 가진 한 개의 다리로 연결되었음이 발굴에서 드러났다. 이들 두 시가는 이중 성벽으로 두른 외에 성 밖으로는 유프라테스 강물을 끌어들인 방어용 해자(垓字.Moat)를 파서 바벨론을 명실공히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게 했다. 느브갓네살이, 이 바벨론성은 “내가 · · · 건설”하였다고 한 가장 뚜렷한 인상은 폐허에서 발견되는 벽돌에 그의 이름과 직위가 그의 건축에 관한 기록과 함께 문각된 벽돌을 보면서 더욱 확실해진다(사진 참조). 다니엘서 주석, 124. 이렇게 해서 아름답고 장엄하게 건축된 바벨론을 바라보며 자긍했던 느브갓네살의 뇌까림(4:30)이 입수된 고대의 바벨론 찬양시에도 나타나 있다. (82.42)
 느브갓네살은 또 다시 유프라테스강 동편 옛 시가지 북편 멀찌기에 그의 여름 궁전(Summer Palace)를 새로 짓고 이 별궁(別宮)의 방어를 위해 이중으로 된 외성을 구축하여 이들 내성과 외성의 총 길이는 13 마일이나 되었다. 실제의 도시 둘레는 10마일로서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7 마일 반이었던 것에 비해서도 컸을 뿐더러 6마일 밖에 안된 제정시대의 로마시보다도, 기원전 5세기쯤 전성기를 맞은 그리이스의 아테네가 4 마일 밖에 안 되었음에 비추어 바벨론이 얼마나 큰 성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82.43)
 무엇보다도 느브갓네살이 건축한 세개의 큰 궁전은 그의 영광을 말해 주고 있는데 하나는 내성가 서북쪽 모서리에 있는 남궁(南宮; Southern Palace)으로 왕의 공적인 거처였고 집무를 위한 공식 건물이었다. 이 남궁에서 모든 국가 행사가 거행되었는데 그 궁전 중앙에는 보좌가 놓인 큰 홀이 있었으며 그 길이가 173 피트, 폭이 57 피트, 높이가 66피트나 된다. 바벨론 함락 전야에 벨사살이 귀인 1000명을 위해 주연을 벌인 곳으로 생각된다(단 5:1). 이 남궁에 연접해서 고대 세계 칠대 경이 가운데 하나로 느브갓네살이 메대의 공주인 그의 왕후 아미티스(Amytis)를 위해 만들었다는 공중정원(혹은 架公園)이 있었다.

  (82.44)
 그리고 이 공원의 바깥 길 즉 행렬가(Procession Street) 건너 입구에는 바벨론 성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주문(主門)인 이쉬타 문(Ishtar Gate)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성문은 이중 성벽에 맞춘 이중 문으로 길이가 170 피트나 되었고 높이와 두께가 다른 네개의 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사진 참조). 이 문은 파괴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폐허 위에 40피트 가량이나 높이 솟아 있다. 이 문의 윤택나는 벽돌에는 누른 빛의 황소들을 비롯하여 뱀의 머리, 사자의 몸, 독수리 뒷 발톱을 가진 복합 짐승들이 양각(陽刻)되어 있어 다니엘 7장계시록 13장에 나타나는 표상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사진 참조). Wiseman, 71. 느브갓네살이 건축한 또 다른 궁전은 남궁의 머리 맡 내성가 북부 성벽 바로 밖에 있던 중앙궁(Central Palace)이다. 이 궁전은 바벨론의 찬란한 역사를 입증해 주는 사료(史料)들이 진열된 박물관도 있었다. (82.45)
 다른 또 하나의 궁전은 외성가(Outer City) 혹은 신강동구(新江東區; Eatern N- ew Quarter) 북단에 세워진 여름 궁전(夏宮; Summer Palace)인데, 지금까지도 바벨론의 폐허 가운데 가장 높은 구릉(mound)으로 남아 있으며 그 이름도 텔바빌(Tell Babil)로 전해지고 있다. Horn, 38, 39. (8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