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 장 성서적 소망의 본질
 근원과 대상. 성서적 소망은 한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 자신을 그 소망의 근원과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독특하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열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좋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편 62:5, 6, 37:7, 71:5). 시편 기자가 자신의 소망이 반석이요 구원되시는 하나님으로 부터(from) 올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in)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신약 성경 기자들 역시 하나님을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토대와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 예컨대 베드로는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 4:19)고 기록하고 있다. (23.2)
 이와 유사하게 바울도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여기서 “소망의 하나님”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소망의 열매 곧 “기쁨과 평강” 으로 신자를 채워 주시기 때문이다. (23.3)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골 1:27)고 기록하면서 주저없이 그리스도를 소망과 명백하게 동등시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리스도께서 준비하신 구원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신자는 거듭나서 영생과 하나님과의 교제로 “산 소망이 있게”(벧전 1:3) 되는 것이다. (23.4)
 큰 소망. 제한된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과 구주에게 뿌리를 박은 성서적 소망은 여러 이유로 큰 소망이 된다. 그 이유들은 첫째,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무한하신 사랑으로 보증되었기 때문이며(딛 1:2; 살후 2:16, 17) 둘째, 신자 개인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딤전 4:10). 셋째, 그것은 비인격적이며 우발적이며 가변적인 요인들이 아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 13:8) 인격적이시며 불변하시는 창조주요 구세주께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러한 소망을 불어넣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골 1:27; 벧전 1:3). (23.5)
 인간적 소망은 예측할 수 없는 요인들을 조건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작은 소망이다.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으려는 학생의 소망은 과목의 통달, 질문의 형태 그리고 몸의 컨디션 등과 같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좌우된다. 성서적 소망은 인간의 능력, 정책 그리고 계획과 같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의 날”(빌 1:6)에 완성될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목적에 대한 요동할 수 없는 확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큰 소망이다. 폴 에스 미네아(Paul. S. Minear)가 예리하게 지적하는 바와같이 “소망이란 사람이 자신 속에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이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홀로 하시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하신 사역(事役)을 통해 사람 속에 불어넣으시는 어떤 것 그리고 자신의 끈기 있는 신뢰로 말미암아 사람이 하나님의 덕분으로 돌리는 어떤 것이다.”5 (23.6)
 2. 재림 중심의 소망
 성서적 소망의 두번째 특징은 주님의 오심에 특별히 그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두 장에서 우리는 재림의 소망이 어떻게 구약과 신약의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구약에서는 마지막 구원과 징벌이 빈번히 하나님의 오심으로 제시되어 있다(사 35:4, 26:21; 슥 14:3~5; 미 1:3, 4). 신약에서는 구약이 의미하는 재림의 기대를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것의 성취는 두 국면 즉 초림과 재림시에 일어난다. (24.1)
 유일 무이한 성서적 가르침. 주님의 강림에 대한 이러한 소망은 성서만이 가르치는 독특한 가르침이다. 다른 종교들 가운데도 매우 조잡한 형태의 죽음, 부활, 심판, 하늘과 지옥에 관한 개념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이 세상에 초림하시고 그 백성을 회복하기 위해 두번째 오시는 창조주에 대한 신앙은 없다(히 9:28). 이교의 종교에서 구원은 주로 인간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지, 하나님이 인류를 향해 내려오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면서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올라감(going up)으로 성취되는 것이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려오심(coming down)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24.2)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초림하시는 하나님과 본래의 완전한 상태로 백성과 사물을 회복하시기 위해 영광의 왕으로 재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이러한 신앙은 성서적 소망을 독특하게 만든다. 주로 미래의 가능성에 의존하는 세상의 소망과는 반대로 성서적 소망은 과거 초림시 이미 그리스도께서 쟁취하신 승리 즉, 재림시에 경축될 마지막 승리의 서막과 보증이 되는 승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골 2:15). (24.3)
 성서적 소망의 중심. 그리스도의 초림은 성서의 역사와 구원의 소망이 중심이 된다. 이 중심으로부터 구속선(教蹟線)은, 뒤로는 언약의 백성을 통해 창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앞으로는 교회의 사명을 통해 재림과 마지막 회복에까지 이른다. 구속사의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의 초림은 또한 성서적 소망의 중심이 되는바, 그 이유는 그것이 한편으로는 구약의 소망인 메시야에 의한 구속을 성취시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약의 소망 즉 재림 때에 성취될 궁극적인 회복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24.4)
 성서적 소망은 대체로 강림의 소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림의 소망은 초림과 재림 모두를 망라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강림의 소망을 단지 그리스도의 재림에만 한정하는 것은 초림에 바탕을 둔 하나님의 구원의 범위와 확실성과 경험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3~5절에 표현된 것처럼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인 미래의 소망은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신”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24.5)
 3. 계속적인 소망
 미래에 대한 현재의 고대. 성서적 소망의 세번째 의미 심장한 특징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현재의 경험 사이에 있는 계속성과 밀접성이다. 통상적으로, 인간적 소망은 불확실성과 필요성에서 생긴다. 그것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으나 미래 어느 때인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리라고 기대되는 어떤 것을 바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업이 없는 사람은 언젠가 직장을 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성서적 소망은 불확실성과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확실성과 현재에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25.1)
 실존적인 계속성. 성서적 소망은 연속적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망의 대상이 되는 미래는 급작스럽게 현재의 경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얻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다. (25.2)
 신자는 재림 때에 경험되어야 할 더 큰 축복들의 “첫 열매”(롬 8:23)와 “보증”(고후 1:22, 5:5)을 현재에 이미 누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왜 소망이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믿음과 사랑과 관련을 맺고 있는지의 이유이다(고전 13:13; 롬 5:1~5).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히 6:5) 보고 있는 것이다. 그와같이 바울은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라고 기록할 수 있었다. (25.3)
 용어에 있어서의 계속성. 현재와 미래 사이의 계속성의 관념은 신약 기자들이 사용한 어떤 용어들의 이중적 의미 가운데 반영되어 있다. 헨드리쿠스 벌콥(Hendrikus Berkhof)은 “모든 성경 독자는 성구 사전의 도움을 받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영생은 주로 미래를 가리키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미 현재 주어진 생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 그이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이기도 하지만 성령의 공로로 말미암아 현재적 구원의 날이며 특별히 다가오는 심판의 큰 날이기도 하다. 그 혹은 (헬라어:Kairos, 카이로스)는 우선 이미 성취된 인자의 때이지만 또한 ”그분의 기쁨의 때“인 성령께서 우리를 각성시키시는 시간 그리고 우리가 고대하는 ”때가 찬 때“이기도 하다. ” 심판“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던 것이며 성령께서 교회와 세상에서 계속 행하시고 계시는 일이며, 언젠가 완전히 집행될 어떤 것”6이라고 주석하고 있다. (25.4)
 미래에 의미를 부여함. 현재와 미래 사이에 있는 이같은 연속성의 개념은 미래에 확실성과 의미를 부여한다. 미래의 새 생명, 새 세상,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것의 첫 열매(롬 8:23)를 이미 현재에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에밀 브룬너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생의 슬픔 많은 생애 가운데서 그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 못지 않게 현재 의미 있는 삶을 성취하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생애하고 있다”7고 하였다. (25.5)
 폴 에스 미네아(Paul S. Minear)은 이러한 성서적 소망의 연속적인 특성을 하나님께서 그 안에 인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두시는 지평선에 비유한다. “소망이란 매 내일이 오늘이 되듯이 변할 수 밖에 없는 내일에 대한 꿈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 속에서 미래를, 미래 속에서 과거를 보여 주는 하나의 실체(reality)이다”8라고 말한다. (25.6)
 4. 포괄적인 소망
 성서적 소망의 특성은 포괄적이다. 그것은 개인과 인류 모두의 총괄적인 포부를 포함하고 있다. 대개 인간의 소망은 부분적이고 변할 수도 있으며 또 쉽게 생의 전체적인 틀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어린아이는 처음에는 장난감과 자동차를 갖고 싶어 하지만 점차 그의 소망은 삼륜 자건거, 이륜 자전거, 오토바이, 차 등으로 옮겨지게 된다. 새로운 소망들은 매 내일이 오늘이 될 때 점차 옛 것들을 대치하게 된다. (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