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 장 성서적 소망의 본질
 주장된 바와같이 원시인으로부터 지적인 인간으로 발전된 과거의 생물학적 진화는 그와 유사하게 인류가 계속적으로 더 높이 발전할 수 있다는 소망으로 해석되었다. 우리가 동물 세계보다 훨씬 더 높이 진화했다면 우리들이 지금의 상태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으로 진화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되는 것이었다. (20.5)
 이러한 낙관적인 소망은 과학 지식의 발달, 의무 교육의 확대, 기술 혁명, 그리고 많은 국가에서의 정치적 자유의 증대와 같은 여타의 발전에 의해 고무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적·과학적 발전을 인간이 더 나은 내일을 향해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분명한 전조로 보았다. (20.6)
 4. 인간의 진보에 대한 소망의 붕괴
 원인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소망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렇게 된 이유들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양차 세계대전으로 야기된 무수한 인명 피해와 재산의 참담한 파괴, 개인의 생명의 가치를 경멸하는 전체주의 제도(Totalitarian regimes)의 등장, 대학살, 범죄와 오염의 증가, 수많은 민족적 분쟁 등과 같은 것들이 인간의 진보에 대한 소망을 산산히 부수어 놓았다. (21.1)
 이러한 희망을 지탱해 주었던 기둥들인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인간의 선(善), 과학 기술, 대량 생산 그리고 공공 교육 등은 계속해서 증가하는 전체주의 제도들, 가난, 굶주림, 압제, 범죄 그리고 사회적인 긴장 등의 압력을 건뎌내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오랫동안 소망해 왔던 유토피아 즉 인간의 진보를 통한 모든 인류의 사회적 평등, 자유, 그리고 번영은 점점 사라져 가는 꿈이 되어 가고 있다. (21.2)
 절망의 분위기는 지각 있는 사람들이 핵, 인구 폭발, 기아, 에너지 자원의 고갈, 대기와 식량과 물의 오염 등에 의해 야기된 세계 파멸의 위협에 대해 염려하는 바와같이, 더욱더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미래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온갖 연령의 사람들이 점점 더 그것이 불법적인 마취제나 처방된 진정제이든지 간에 약에 의존하고 있다. (21.3)
 잘못된 가정. 만약 인간의 진보에 대한 순전한 소망에서 절망으로 분위기가 바뀐 이유들을 알고자 한다면, 그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그러한 소망의 기초가 되는 잘못된 가정—즉 사람은 그 자신의 운명의 주관자—에 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도 자신의 미래를 성공적으로 건설할 수 있는 선천적인 이성, 선(善) 그리고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계몽주의의 신조는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사악성 그리고 현재의 도덕적인 개선(改善)과 미래의 회복을 위한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성에 대한 근본적인 성서적 견해를 부정한다(렘 17:9). (21.4)
 인간이 이룩해 낸 진보에 대한 신념은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목표를 빼앗아 가 버렸다. 역사의 진보 그 자체가 목표가 되었다. 그러한 진보에 대한 보증은 인간의 본성과 우주를 정복하는 인간의 능력 가운데서 발견되리라고 생각했다. (21.5)
 우리 시대에 이룩된 무서운 발전은 하나님께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에 기초를 둔 그와같은 진보에 대한 소망을 산산히 깨드려 버렸다. 인간은 인류의 삶을 개선하는 데 위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과학 기술의 도구들을 합법적이고 고상한 목표에 예속시키는 데 있어 무능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현대 과학과 기술을 평화적, 건설적으로 사용하므로 생겨났었던 소망은 그것들의 잠재적인 파괴력과 파괴적인 사용으로 상쇄되었다. 현대 과학 기술로 무장한 소위 계몽된 백성들에 의해 우리 시대에 저질러진 극악 무도한 악(惡)들은 인류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21.6)
 에밀 브룬너(Emil Brunner)는 이러한 발달을 예민하게 묘사한다. 즉,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 현대인들은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파괴자, 생명의 파괴자,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을 파괴하는 자가 되었다. 이것은 인류가 최근 수십년 동안에, 낙천적인 진보에 대한 소망이 허무에 불과하다는 무서운 생각 속에서 배워야만 했던 교훈이다. 자연을 정복하는 과학적 도구의 무서운 증가는 전세계적인 자살의 위험스런 가능성을 드러내 왔다.”3 (21.7)
 인류의 향상에 대한 맹목적인 소망의 붕괴는 인간의 계획과 과학을 통해 현시대의 새로운 사회 질서(인간의 왕국)의 설립에 대한 믿음이, 주님께서 오실 때 세워질 하나님의 미래 왕국에 대한 믿음을 대체함으로 생긴 당연한 결과를 대표한다. (22.1)
 5. 소망 신학
 아마도 현대의 절망적인 분위기에 대한 반응으로서, 어떤 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은 소망의 신학, 흑인 신학, 그리고 해방 신학 등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신학들의 공통 분모는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교회가 참여하여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는 소망의 약속이다. 이러한 신학은 특히 개발도상국에 영향을 미쳤다. (22.2)
 세상에 중심을 둠. 이러한 새로운 현대 신학 사조의 대부분의 원동력은 쥬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책, 소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에서 왔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종말론적인 특성을 회복하여 그것을 현대인들에게 적절하게 만들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임재—아직 이 세상에 임하지 않았다—는 신자들이 그리로 향하여 가고 있는 위대한 미래이다. 그러나 몰트만에게 있어서 미래는 거의 어떤 실체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주로 이 세상에 중심을 두고 있으며 정의와 공평을 확립하기 위한 교회의 투쟁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이른바 흑인 신학과 해방 신학은 소망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이 둘은 모두 부당한 사회적·정치적 제도를 바로잡기 위한 투쟁적인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옹호한다. 이러한 현대 신학 사조의 공통적인 약점 중 하나는 하나님의 왕국을 이 세상의 현질서와 유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22.3)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러한 신학 운동들은 기존의 사회적·정치적 구조를 개선하므로 하나님의 왕국을 설립하기를 소망한다. 사까이 구보(Sakae Kubo)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모든 ‘현세적인’ 기대는 사람의 본성이 여전히 변화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착각이며 헛되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당한 압제를 방관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자유주의적인 강령에 흔히 결핍되어 있는 현실주의는 인식하고 있어야만 한다”4고 잘 지적하였다. (22.4)
 초월적 소망이 필요함. 오늘날 인류는 이 세상과 인간의 존재의 한계를 초월하는 소망을 필요로 한다. 결코 살아서 보지 못할 미래를 위해 소망하고 수고하는 것은 거액이 적혀 있지만 은행에 잔고가 없는 계정에서 발행했기 때문에 결코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한 장의 수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22.5)
 생물학적 삶과 인간 능력의 일시적 특성에만 의존하는 소망을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절망적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사람이 자신에게 말할 마지막 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망은 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속량이 불가능한 인간의 약속에 기초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리를 죄의 정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분이 죄의 영향으로부터 우리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보증 위에 기초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더 자세히 고찰해 볼 성서적 소망인 것이다. (22.6)
 제 2 부 성서적인 소망에 대한 일별(一瞥)
 성서적 소망의 독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통상적인 인간적 소망과 성서적 소망을 구별하는 네 가지의 특성을 유의함으로써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23.1)
 1. 하나님 중심의 소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