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 장 성서적 소망의 본질
 소망이 없는 생애는 음식이 없는 몸과 같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신체 기관은 서서히 아사(餓死)하게 된다. 인간의 가슴에서 소망을 빼앗아 가면 인간은 서서히 무의미와 절망에 사로 잡히게 된다. 소망이 없다면 인간은 어떤 의미 있는 사업을 구상하거나 그것을 성공적으로 성취할 수도 없다. 에밀 브룬너(Emil Brunner)가 웅변적으로 표현했듯이 “무엇인가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믿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도 가래, 바늘, 끌, 톱 등을 들지 않을 것이다.”1 보다 나은 무엇을 성취하려는 소망은 이러한 인간의 노력에 불을 붙이며 계속 그 불이 타오르게 한다. 반면에 소망이 없으면 살아서 활동하고자 하는 동기가 약화된다(잠 29:18). (18.1)
 본 장의 목적. 본 장은 두 가지의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인간의 진보에 대한 소망의 기원과 붕괴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면서 일반적인 인간의 소망을 관찰하고, 둘째는 성서적 소망의 주요 특성들 중 몇 가지를 제시하면서 성서적 소망의 특성을 검토하는 것이다. (18.2)
 제 1 부 인간의 소망에 대한 고찰
 1. 작은 소망과 큰 소망
 소망이 인간의 생명과 생애에 바탕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소망이 다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소망에 대한 연구는 적어도 두 종류의 소망이 있음을 알려 준다. 첫째는 작은 소망(small hope), 둘째는 큰 소망(great hope)이라 할 수 있다. (18.3)
 작은 소망. 작은 소망은 훨씬 많다. 그것의 주요 특징은 그 목표가 단기적이라는 것이다. 작은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자들은 주로 단기적으로 개인의 포부를 실현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살아가며 일한다. 그들은 자신의 시간을 그들 자신과 범세계적인 인간 가족의 운명에 대해 어떤 궁극적인 소망을 두지 않고, 자신과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가까운 장래를 바라보며 소모한다. (18.4)
 큰 소망. 큰 소망은 별반 많지 않다. 그 주요 특징은 목표가 장기적이라는 것이다. 큰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자들은 사랑과 공의가 지배하는 새로운 사회 질서가 궁극적으로 세워지기를 고대하면서 그들의 개인적인 개선(改善)의 즉각적인 성취 너머에 있는 것을 갈망한다. 즉 개인적인 소망과 보편적인 소망이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성취되는 그런 사회 질서를 열망한다. (18.5)
 위대한 소망만이 삶에 의미와 만족을 줄 수 있다. 전체적이고 최종적인 목표보다는 부분적이고 즉각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작은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은 궁극적이고 전체적인 해결을 바라는 선천적인 인간의 욕구를 부정하는 것을 뜻한다. 즉각적이고도 불완전한 목표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매우 근본적인 본성에 속한다. 긴 안목으로 보면 제한된 목표들 자체는 부분적인 답변밖에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만족도 주지 못한다. 개인의 작은 소망들이 역동적인 힘이 되는 것은 가장 중요한 큰 소망의 맥락에서만 가능하다. 의사, 교사, 공학도가 되고자 하는 궁극적 소망은 시험에 합격하고자 하는 즉각적인 소망에 가치와 의미, 그리고 중요성을 부여한다. (18.6)
 2. 큰 소망의 결핍
 참으로 큰 소망의 결핍, 혹은 부재(不在)는 고대 이교 문화와 현대 유물론주의적인 이데올로기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현저한 특성이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 내일 우리가 죽으리라”는 쾌락 주의자들의 보편화된 말은 고대 세계에 궁극적인 미래의 소망이 얼마나 결핍되어 있었는지를 잘 예시하고 있다. 바울은 이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2라고 상기시킬 때 이러한 비참한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19.1)
 소망(hope) 대(對) 갈망(desire). 바울의 진술이 과장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대부분의 이방인들이 내세에 대한 어떤 종류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바울은 그리스-로마 문화권(Greco-Roman culture)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 편만했던 소망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가 이방인들을 “소망이 없”는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바울에게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이방인들이 품은 모든 소망에는 성취에 대한 확신이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소망은 성취에 대한 구체적인 기대가 수반되지 않았던 소원들이 고작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소망은 그들의 생애에 제한적인 영향밖에 끼치지 못 했다. (19.2)
 진정한 소망은 그것이 성취되리라는 확신을 줄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를 제공해 주는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에게 그 근거를 두어야 하며, 사람의 생존의 전체 국면과 분리될 수 없다. 참된 소망은 아직도 미래의 것에 대한 기대감을 사람이 현재에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이방인들이 품었던 소망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작은 소망에 불과했다. 그러한 것들은 성취되리라는 보증이 결핍된 소망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 전체를 떠 맡길 수 없었다. 이런 뜻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소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19.3)
 오늘의 상황은 그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많은 사람들—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교육을 받았다—이 그들 자신과 이 세상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한 큰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면서 지나가는 순간을 즐기고자 애를 쓰며 그날 그날을 살아간다. 그러나 의미 있는 미래에 연결된 소망이 없이 사는 것은 인간의 심령의 가장 깊은 갈망을 부정하는 것이며, 생애에서 온갖 참된 의미를 빼앗는 것이다. (19.4)
 파멸에 관한 붐. 큰 소망의 결핍은 쉽게 절망으로 인도할 수 있다. 최근에 쏟아져 나온 파멸을 주제로 한 서적들과 영화들 그리고 여타의 자료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점점 짙어져가는 절망의 분위기를 맛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파멸의 붐이 일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19.5)
 여러 다른 멸망의 형태들이 여러 작가들에 의해서 예언되었다. 예를 들자면 아더 헤르조그(Arther Herzog)는 자신의 책 (Heat)에서 대기 중에 있는 이산화탄소의 지나친 축적으로 몹시 뜨거워진 열이 지구의 멸망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green house effect—온실 효과). 조지 스톤(George Stone)은 “폭풍설”(暴風雪, Blizzard)에서 끝없는 폭풍으로 인한 파멸을 내다보고 있다. 일단의 영국 장교들은 제3차 대전:1985년 8월(The Third World War: August 1985)에서 전세계의 정치적 와해를 통한 재난을 예고했다. 프레드 와르쇼프스키(Fred Warshofsky)는 세상의 마지막 날(Dooms day)에서 자장(磁場)의 전도가 지구를 멸망시킬지도 모른다고 예언했다. (19.6)
 헐리우드 역시 지진, 높이 솟은 지옥(Towering Infermo), 마지막 파도, 유성, 세계 종말의 날, 그리고 그날 이후 등과 같은 유명한 영화에서 지구가 지진, 화재, 화산의 폭발, 그리고 해일로 파멸당하는 것을 극화시켰다. 어떤 회사들은 구명(救命)대 판매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현재의 이와같은 절망적인 분위기를 자아낸 요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들 중 하나는 특별히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바, 20세기에 인간의 진화론적인 향상에 대한 신앙의 미몽으로부터 깨어난 것이 그것이다. (20.1)
 3. 인간의 진보에 대한 소망
 르네상스. 인간의 진보에 대한 서구인들의 신앙의 뿌리는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 즉 문화적·사회적 부흥을 가져올 의도로 15세기에 발생한 인본주의적 운동 당시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점진적으로 르네상스는 하나님께 대한 역사적 신앙을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20.2)
 그 이후의 세기들 동안 하나님의 현재와 미래의 구원에 대한 많은 사람의 소망은 미래를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증가하는 데 비례하여 감소되었다. 인간의 능력에 바탕을 둔 진보에 대한 이 같은 소망은 19세기에 그 절정에 달했다. 그 당시 여러 분야에서 이룩된 진보는 미래의 황금 시대를 향한 인간의 필연적 진보에 대한 낙천적인 소망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20.3)
 계몽 운동. 철학과 종교 분야에서 독일의 관념주의(German idealism)는 인간의 역사를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정신이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간의 진보에 대한 이러한 관념 철학은 라마르크(Lamarck)와 다윈(Darwin)에 의해 19세기 후반에 경험 과학에 적용되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진화론의 효시가 되었다. (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