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Lord-κύριος”와
“Lord’s-κύριακός”, 두 용어의 용법에 관해서는 W. Foerster의
TDNT III(1086-1096)을 보라. 가장 처음으로 이 용어들이 명백하게 등장한 경우는 출처 불명의
Gospel of Peter라는 책으로, 현재 마가복음 16장 2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주의 첫 날(the first day of the week)”에 대한 번역으로
“ή κυριακή—the Lord’s day”(35; 50)가 사용되고 있다. 기원전 200년 경 안디옥의 세라피온이 그리스도 가현설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에 반박한 것으로 보아 이 복음서는 2세기 후반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참고, Edgar Hennecke,
New Testament Apocrypha, I. 180), Eusebius에 따르면, 사르디스의 멜리토(약 A.D. 190년)가
“On the Lord’s day-περί κυριακης λόγος”라는 논문을 썼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그 제목만 남아있다(
HE 4, 26, 2). 다른 참고 자료들로는 Dionysius of Corinth(Eusebius로부터 인용)
HE 4, 24, 11.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eis 7, 12, 76, 4.
Fragment 7 of Irenaeus, ANF 1, 569. Origen,
In Exodum homiliae 7, 5.
Contra Celsum 8, 22. Eusebius,
Commentaria in Psalmos 91.
HE 3, 25, 5.
De Solemnitate paschali 7 등이 있다. Tertullian(테르툴리아누스)는
De oratione 23과
De corona 3에서 라틴어에서 그와 동등한
“dominicus dies”를 사용하였다. 이는 후에 라틴어에서 일요일에 해당하는 공식적 명칭이 되었다(참고.
domenica, diimanche).
2)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174.
3) Wilfrid Stott,
“A Note on the Word KYPIAKH in Rev. 1. 10,” NTS 12(1965):75. P. K. Jewett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은 안식일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지, 반드시 한 주의 첫 날 예배를 해야 하는 의무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며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준수를 존중하는 주님 본인에게로부터 물려받은 그 자유를 떠나서 다른 날에 예배를 드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The Lord’s Day, A theological Guide to Christian Day of Worship, 1972, 43. 이후
Lord’s Day로 인용).
4) Rudolf Bultmann은 복음서에서 전해지는 안식일로 인한 갈등은 하나의 구술적 전통을 기반으로 한 원시적 공동체에 의하여 재현되는 모든 이상적인 상황들로 이해한다. 이와 관련하여
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ET(1963)에서 그의 고전적 논의를 찾아볼 수 있다. Bultmann 이전에는 다음의 글들에서 관련 내용들을 살펴볼 수 있다. K. L. Schmidt,
Der Rahmen der Geschichte Jesu, 1919. M. Dibelius,
From Tradition to Gospel, ET 1934.
5) E. Lohse는 복음서의 안식일 내용을 근래 들어 재검토하면서 Bultmann과는 상반되게
“logia”의 상당 부분이 그리스도의 실제 말들이라고 주장한다(
“σάββατου,” TDNT VII, 21-30. O
“Jesu Worte über den Sabbat,” Judentum-Urchristentum-Kirche,
Festschrift fuir J. Jeremias [BZNW 26], 1960, 79-89. W. Rordorf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관련한 실제 역사적 사건들을 위한 변론을 제시하며 Lohse의 연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그는 곡물의 이삭을 뽑는 제자들의 이야기[마가복음 2장 23절]와 마가복음 2장 27, 28절에 담긴 그리스도의 말씀의 역사성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일례로 요한복음 15장 17절을 예수의 실제 말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Sunday, 54-74. 참고,
“Dimanche,” 103).
6) 만일 복음서의 저자들이 유대인들의 안식보다 일요일을 일찍이 준수하고 있었다면 왜 그들은 그렇게도 많이 안식일 치유와 그와 관련한 예수님의 선포들을 전하려 했겠는가? 예수님의 안식일 사역과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염려는 그들의 일요일 준수를 의미하는 바는 아닐 것이다. L. Goppelt는
“원시적 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 안식일 관례의 정당성을 두었다”는 R. Bultmann의 견해에 대하여
“하지만 어떻게 그 환경이 율법에 대한 열의로 가득한 팔레스타인 사회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며 그의 주장을 비판했다”(
TDNT VI, 19).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습에 대한 팔레스타인 교회의 충성은 4장에서 논의될 것이다.
7) 7가지의 안식일 기적은(1) 베데스다의 병자(요 5:1-18), (2) 회당의 귀신 들린 자(막 1:21-28), (3)베드로의 장모(막 1:29-34), (4) 손 마른 자(막3:1-6), (5) 날 때부터 눈이 먼 자(요 9:1-41), (6) 몸이 불구인 여인(눅 13:10-17), (7) 수종병(水腫病)든 사람(눅 14:1-4)이다.
8) 예로 다음 저자들의 누가복음 해설을 참고하라. H. Hobbs, Henry Burton, W. Robertson Nicoll, Wilfrid J. Harrington, R. C. H. Lenski, F. Godet, Alfred Loisy, M. J. Lagrange.
9) 땅과 관련한 안식일 개념은 출 23:11; 레 25:6f; 신 24:19-22; 레19:9-10. 예로 Niels-Erik A. Andreasen은 안식년에 대한 두 가지 이유로 땅의 재생과 인간을 위한 해방을 제시했다(
The Old Testament Sabbath, SBL Dissertation Series 7, 1972, 214).
10) 빛의 탕감과 관련해서는 레위기 15장 1-6절, 노예들의 해방은 출애굽기 21장 2-6절, 신명기 15장 12-18절을 보라.
11) 희년은 명백히 안식년의 의미를 강화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모든 소유, 특히 부동산의 실제 주인에 대한 반환에 중점을 두고 있다(레 25:8-17, 23-55; 27:16-25; 민 36:4). 복잡한 주민들의 삶의 특징은 희년을 실행시키는데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안식년이 준수되었다는 암시들은 찾아볼 수 있다(렘 34:8-21; 고후 36-21; 레 26:43). 망명 이후의 기간에 대해서는 E. Schürer의
A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Time of Jesus Christ, 1885, I. 40-45를 보라. 안식일과 안식적 희년의 관계는 다음을 참고하라. Niels-Erik A. Andreasen, 217-218.
12) P. K. Jewett,
The Lord’s Day, 27. W. Rordorf도 다음과 같이 비슷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선지자로부터의 이러한 인용을 볼 때, 누가의 복음은 결과적으로 안식년의 개시로써 예수님의 오심의 관한 인상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Sunday, 110). Wilfrid J. Harrington 역시
“히브리인들의 삶에서 가장 반가운 축제인 이를 취하여 예수님은 스스로를 은 나발을 들고 ‘주의 받아주시는 해(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을 선포하는 사제들 중 하나로 비유했다. 그는 그 기념일이 자유와 기쁨의 시대에 선택받은 민족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빚진 자들과 억눌린 자들의 무수한 빚을 탕감해주고 해방을 가져다 줄 그의 메시아적 해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라고 평한다(
A Commentary, 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 1967, 134).
13) K. Barth는 하나님의 창조시 안식일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원형과 개시로 해석한다(
Church Dogmatics, ET 1956, III, 277). 그러나 그의 해석은 완벽한 창조, 안식일 안식, 은혜의 나팔에 그 의미 투영시킴으로써, 본래의 순전한 상태(
status integritatis)를 부인함으로써 가능했다(
Church Dogmatics, IV, 508). H. K. La Rondelle는 하나님의 안식일 안식에 관한 Barth의 개념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더불어 그가
“그 구원론에 관한 성서적 예표론 혹은 기원론의 현실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Perfection and Perfectionism, 1975
2, 81-83. G. C. Berkouwer은 안식일의 안식이
“창조와 구속 가운데 존재하는 밀접한 관련성을 분명하게 비추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The Providence of God, ET 1952, 62). 그는
“오실 주의 구원에 표징이 타락 이후 안식일의 지속성”에 담겨있다고 보았다(참고, 겔 20:12)(Ibid., 64). 그러나 그의 해석은 창조시 인간의 완벽함의 존재론적 실재의 파괴로부터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신
“개인의 믿음의 역동적 기능에 의해, 그리고 죄의 공격성과 구원-역사적 현실의 관점에서의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특성”을 인식함으로써 밝혀낸 것이었다(La Rondelle, 82-83. 1. G. C. Berkouwer,
The Triumph of Grace in the Thelogy of Karl Barth, 1956, 381-383).
14) Henrique Renckens,
La Religion de Israel, 1970, 225.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은 꾸준히 야훼를 그들의 창조자이자 구원자로 기억할 수 있었다.” 참고, S. R. Driv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Deuteronomy, 1895, 85.
15) Hans Walter Wolff,
“The Day of Rest in the Old Testament,” Concordia Theological Monthly 43(1972):500.
16) B. S. Childs,
Memory and Tradition in Israel, SBT 37, 1962, 50-52.
17) A. M. Dubarle,
“La Signification religieuse du Sabbat dans la Bible,” Le Dimanche, Lex Orandi 39, 1965, 46.
18) P. K. Jewett,
Lord’s Day, 27.
19) A. J. Heschel,
The Sabbath, its Meaning for Modern Man, 1951, 10.
20) Theodore Friedman,
“The Sabbath: Anticipation of Redemption,” Judaism 16 (1967):445.
21) Ibid., 443, 447-449.
22) 유대교의 종말론적 문헌의 마지막 때의 안식일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에 대한 간결한 토론과 관련해 W. Rordorf,
Sunday, 48-51.
23) G. von Rad,
“There Still Remains a Rest for the People of God: An Investigation of a Biblical Conception,” The Problem of the Hexateuch and Other Essays, 1966, 194-102. Ernst Jenni는 안식일이 이스라엘의 안식의 주제가 발전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설명한다(
Die theologische Begrindung des Sabbatgebotes im Alten Testament, ThSt 41, 1956, 282).
24) P. Spicq는 히브리인들에게 안식일 안식의 주제는 가나안 입성이라는 이스라엘에 대한 한시적 이상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라는 종교적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Commentaire de l’Épître aux Hebreux, 1953, II, 102-103).
25) W. Rordorf는
“초기교회 또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사실상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안식일’ 사역이었으며, 이는 그분 안에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 도우심을 통해 하나님 스스로의 구원하시는 사역의 때, 즉 메시아적 안식일의 동을 틔운 것으로 이해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Sunday, 71, 72). 그러나 그는 안식일의 메시아적 성취를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위하여 안식일을 대체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Ibid., 116).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영구적 대체를 결코 암시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라도,
“왜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바꾸고자 하셨겠는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행동이 구원의 거룩한 계획 속의 안정성과 계속성을 의미하는가? 이 점에서 우리는 Pacifico Massi의 다음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 경제의 기반이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우주적 구원을 예비하시고 수 세기 간 그분의 백성들을 교육시키신 7일 주기의 순환이 부활이라는 사건 하나로 인해 사라져버리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La Domenica, 25). 일요일을 안식일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독점적 기독교의 창작물로 만들고자 했던 Rordorf와는 달리 Massi는 일요일은 안식일의 의미와 기능의 연속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숭배의 날이 바뀌는 것이 과연 지속성을 뜻하는 것인가?
26) W. Rordorf,
Sunday, 67.
27) J. Daniélou,
Bible and Liturgy, 226.
28) W. Rordorf,
Sunday, 70. Mosna는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Storia della Domenica, 175-178). 그는 안식일 논쟁 속에서
“비록 그리스도의 행동 속에서 아직까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당시 원시적 공동체가 안식일 규율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찾아내려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W. Manson(
The Gospel of Luke, 19552, 81)과 E. Lohse(
Jesu Worte iber den Sabbat, 79-89)도 이와 같은 입장을 밝혔다.
29) Justin Martyr, Dialogue 27, 5; 29, 3. Epiphanius,
Adversus haereses 30, 32, 10. Eusebius,
Commentaria in Psalmos 91(PG 23, 1169B). Aphrahates,
Homilia 13, 7. Ps.-Athanasius,
De semente homilia 13.
30) Justin Martyr,
Dialogue 29, 3; 23, 3.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eis 6, 16, 141. 7; 6. 16. 142. 1. Origen,
In Numeros Homiliae 23, 4. Chrysostom,
De Christi divinitate 4(PG 48, 8101). Syriac Didascalia 26에서 특히 더욱 극심한 논쟁이 이어진다.
“만일 우리나 다른 6일을 위해 하루를 할 일 없이 나태하게 지내기를 바라셨다면 그 분 자신도 그분의 모든 창조물들과 게으르게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만일 그분께서 ‘너희는 한가로이 있으라, 그리고 너희 자녀와 종들과 하녀, 나귀도 그리하라’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분은 어떻게 바람을 일으키시어 불게 하시며 또한 그분의 피조물인 우리를 기르시고 먹이시며 일을 멈추지 않으시는 것인가?”(Connolly, 236).
31) Victorinus of Pettau,
De Fabrica mmundi 6(ANF VII, 342). 참고, Tertullian,
Adversus Judaeos 4. 참고, 또한
Adversus Marcionen 4, 17 and 2, 21.
32) Tertullian, Adversus Judaeos 4. Victorinus,
De Fabrica mundi 6. Aphrahates, Homilia 13, 7. Athanasius,
De sabbatis et circumcisione 3. Gregory of Nyssa,
Testimonia adversus Judaeos 13(PG 46, 221). 그러나 마카베오 전쟁 초반에 독실한 유대인들은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안식일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마카베오 전서 2:32-38; 마카베오서 6:11; Jesephus,
Antiguities, 13, 317). 이 사건으로 안식일에도 자기 방어를 위해서라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마카베오전서 2:39-41).
33) Justin Martyr,
Dialogue 19, 6; 23, 3; 27, 5; 46, 2. Irenaeus,
Adversus haereses 4, 16, 2. Tertullian,
Adversus Judaeos 2. Eusebius, HE 1, 4, 8.
Demonstratio evangelica 1, 6(
PG 22, 57).
Commentaria in Psalmos 91. 모세 이전에 의로운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논쟁은 반안식일에 대한 강력한 옹호 혹은 변명을 위해 꾸며낸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랍비의 전통이 하나님 자신도 안식일을 준수하셨다는 안식일의 오랜 기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Gen. R. 11, 2 and 6;
Pirke de R. Eliezer 20). 아담은 그 날을 준수한 첫 번째 인간이었으며(
Gen. R. 16, 8.
Pirke de R. Eliezer 20), 아브라함과 야곱은 안식일 준수에 철저했고(
T. B. Yoma 286.
Gen. R. 11, 8; 79, 6), 사라와 레베카는 충실하게 토요일 밤마다 초로 불을 밝혔고(Gen. R. 60, 15), 이집트의 속박 아래 이스라엘인들은 안식일을 준수하기 위해 파라오로부터 허락을 얻어 내기도 했다(
Ex. R. 7, 28; 5:18).
34) J. Daniélou,
Bible and Liturgy, 230. 참고,
Epistle of Barnabas 15:6-8.
35) Justin Martyr,
Dialogue 16, 1; 19, 2-4; 21, 1;, 23, 1-2; 27, 2.
36) Syriac
Didascalia 21.
“그러므로 그는 사전에 영구적으로 그들을 애도로 결속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그들을 위해 안식일을 구별하여 정했다”(Connolly, 190).
37) Aphrahates,
Homilia 13; 그는 안식일을 유대인들의 불성실에 대한 처벌의 개념으로 본 Justin과 다르게, 오히려 타락 이후 다만 인간과 동물들의 안식을 규제하기 위한 하나의 제도로 보았다.
38)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곤경에 처하게 하기 위해 그 병자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루살렘에 첩자를 보낸 일이나
“곧 ∙∙∙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한 일에도 나타나고 있다(막 3:2, 6), 나사렛 사람들의 복음서(
Gospel of the Nazaraeans)에는 그 병자의 경우를 더욱 긴박하게 전하고 있다.
“저는 석공으로 손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자이오니 원컨대 예수께서 내 건강을 회복시키시어 먹기를 위하여 구걸하는 수치를 면케 하소서”(E. Hennecke,
New Testament Apocrypha, 1963, I, 148). 예수님의 행동을 자칭 하나의 긴급한 필요의 관점에서 정당화하려는 이와 같은 시도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안식일 준수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속임수를 유지하려는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야기를 확장시켜보면 이는 안식일에 대한 긍정적 이해가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는 예수님의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Hennecke는
“그것이 발생한 사회들, 시리아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나사렛파)은 분명히 이교는 아니었으나 나사렛 사람들의 복음서(Gospel of the Nazaraeans)가 우리의 이해를 돕듯 어느 정도 까지는 ‘대교회(the great Church)’에 속해 있었고, 내용이나 성격으로 볼 때 이는 마태보다 더욱 유대인 그리스도인에 가까웠다”(Ibid., 146).
39) L. Goppelt,
Christentum und Judentum im ersten und zweiten Jahrhundert, 1954, 46. W. Rordorf의 Sunday(71쪽)에 동일하게 인용.
40) W. Rordorf,
Sunday, 69-70.
41) Mishnah,
Yoma 8, 6. Tosefta,
Shabbat 15, 16. I. Abrahams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은 특히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측면에서 바리새인들의 견해와 기본적으로는 비슷했다고 주장한다(
Studies in Pharisaism and the Gospels, 1967, 129이하). C. G. Montefiore는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을 구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선을 행하라는 말씀을 자주 볼 수 있다. 그것은 랍비들에게는 그들이 받아들여 왔던 랍비식 원칙의 지나친 확대 혹은 적용이었을 것이다”(
Rabbinical Literature and Gospel Teachings, 1930, 243).
42) W. Rordorf,
Sunday, 70.
43) Ibid., 68. 참고, G. D. Kilpatrick,
The Origins of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1946, 116-135.
44) 참고, Moore, II, 28. 후기 포로시대의 안식일 발달과정의 간결한 논의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E. Lohse,
“odhatoo,” TDNT III, 4-14.
45) Niels-Erik Andreasen,
“Festival and Freedom.”,
Interpretation 28(1974):289.
46) Hans Walter Wolff, 504.
47) E. Lohmeyer는 마가복음 3장 4절의 예수님의 질문을 자신을 죽이기로 결심한 대적자들의 음모에 대한 풍자적 암시로 보았다(
Das Evangelium des Markus 1951, 68이하). 참고, Idem,
Das Evangelium des Matthäus, 1956, 186.
48) W. Rordorf는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에서 두 가지 역설적 원칙을 발견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인정하셨으며 심지어 그것을 강화시키셨고, 반면 그분의 신성한 권위로써 그분은 특히나 율법의 의식적 규제들에 대해서는 그것을 거스르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Sunday, 78쪽). 이러한 결론이 원칙적으로는 맞지만, 메시아적 귄위로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무효화시키셨다”(Ibid., 70쪽)는 의식적 규제들의 범주에 대해 안식일을 축소시키려고 한 Rordorf의 시도는 모두 정당하지 못하다. 이유는 바로 그가 안식일이 하나의 도덕적 계율이기 보다 하나의 의식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나타난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그분께서 다른 아홉 계명에 나타내신 것과 다르지 않다. William Hendriksen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일러주실 때에 나머지 아홉 개의 계명을 설명하실 때 쓰신 같은 방법을 따르셨다고 제대로 지적하고 있다. 아홉 계명을 살피고 난 후 Hendriksen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네 번째 계명의 참 의미를 드러내셨다. 비록 긴 말로 언급하지는 않으셨으나 그분이 뜻하신 바는 랍비들에 의해 추가되고, 또한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동안 필경사들과 바리새인들로 인해 퍼진 안식일에 대한 잘못된 설명들을 비난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음의 진리들을 철저히 무시하거나 자신들의 가르침에 수용하려 들지 않았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요약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a. 불가피한 필요는 법을 알지 못한다.(마 12:3-4).
b.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존재한다(5-6절).
c. 자비를 베푸는 것은 언제나 옳다(7, 11절).
d. 안식일을 포함한 모두의 통치자는 인자(the Son of Man)이다(마 12:8; 참고, 6절).” 49) P. K. Jewett, Lord’s Day, 42.
50) Ibid., 82. Jewett는 안식일이 지닌
“구속적 연사의 영구적 해석상의 범주”에 대해 인정하고 또한 잘 설명을 하면서도,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날을 간직할 필요만 있을 뿐, 매 주 첫 날 모이는 관습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이어나갔다(인용한 본문에서). 한편으로는 안식일이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축복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구주를 숭배하기 위한 다른 날을 택한다는 것이 역설적이지 않은가? 일요일 준수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타당성에 대해 면밀히 살펴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결코 이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51) Ferdinand Hahn은 이 점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나 인간에 대한 은혜로 이해되고 있는 것을 염려하셨다. 그리하여 법과 전통의 측면에서 그분은 자신의 종말론적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참된 의도를 드러내셨다”(
The Worship of the Early Church, 1973, 15). 그리스도의 안식일 치유 사역의 구속적 의미는 그분이 치료하신 자들에게 주신 영적 사역 가운데에서도 드러난다(참고, 막 1:25; 눅 13:16; 요 5:14; 9:35-38).
52) 39가지의 금지된 안식일 활동 가운데 하나는
“한 범주의 것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Mishnah,
Shabbath 7, Soncino ed. of the Talmud, 349). 진흙을 이겨 만드는 것도 동물들의 먹이를 섞는 일과 마찬가지로 바로 랍비의 안식일 율법의 저해되는 사항에 속한다(Mishnah,
Shabbath 7, 2). 랍비들이 안식일에 짐을 옮기는 것을 금지했던 것은 예레미야(17:19-27)와 느헤미야(13:15-19)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러한 조치를 한 이유는 안식일에 상거래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필요한 소유물을 운반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53) Mario Veloso,
El Compromiso Cristiano, 1975, 118-119. Rudolf Bultmann 또한
“απεχρίνατο은 오직 이 부분과 19절에서만 발견된다. ∙∙∙ 이는 그 대답의 공식적 특징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덧붙인다(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1971, 244).
54) Ibid., 119.
55) J. H. Moulton,
A Grammar of the New Testament Greek, 1908, I, 153, 157. 이는 그리스도의 발언을 무엇보다 더욱 중요하게 만든다. G. A. Turner와 J. F. Mantey는 심지어
“이 절(17절)은 네 번째 복음서의 강조점 중 하나이자 전체 장(chapter)의 핵심 구절일 것”이라고 말한다(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1965, 138).
56) J. Daniélou,
Bible and Liturgy, 227. 57) W. Rordorf, Sunday, 98.
58) Ibid., 99쪽. H. Strathmann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Das Evangelium nach Johannes, 1951, 157, 175). 참고, Edwyn C. Hoskyns,
The Fourth Gospel, 1947, 267.
59) W. Rordorf, Sunday, 100.
60) P. K. Jewett,
Lord’s Day 참고.
61) O. Cullmann,
“Sabbat und Sonntag nach dem Johannes evangelium. Εως άρτι,” In memoriam E. Lohmeyer, 1953, 131. 그는 안식일 대신의 일요일 기념이 네 번째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5장 17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참된 안식이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처음으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연 이 구절을 옳게 해석하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아직까지 일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순간에 중단되었단 말인가? 우리는 이 개념이 요한복음서에 낯선 것임을 제시 할 것이다. Francis Noel Davey는 좀 더 급진적인 관점을 취한다. 주장하는바 하나님의 일하심은
“안식일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완전한 전복과 성취와 관련이 있으며, 이는 그 공백이 하나님의 창조적 또한 생명을 주시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The Fourth Gospel, 1947, 267). 왜 하나님은 안식일을 전복시키기 위해 일하셔야 하는가? 하나님이 스스로를 대적하여 일하시는 것인가? 안식일은 그분의 솜씨의 결과물이 아닌 것인가?(창 2:2-3; 출 20:8-11)
62) 참고, W. Rordorf,
Sunday, 98. B. F. Wescott은 아버지의
“일들”을
“만물의 회복과 구원, 물질적 창조물의 유지”라고 이해한다(M. Veloso, 122 재인용), P. K. Jewett,
Lord’s Day, 85. J. H. Bernard는 본문의 고대 해석을 검토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 말들은 하나님께서 즉 지금까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신다는(그것이 표현되었을 때 명백한) 발상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창조 이래로 멈춘 적이 없다∙∙∙하나님의 안식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Gospel according to St. John,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1953, 236-237). 이와 유사하게 J. N. Sanders는
“예수님은 사실상 일곱 째 날에 노동으로부터 휴식의 명령을 설명한 병인학적 신화와 같이 6일 동안의 창조 이후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어떠한 서투른 의인관적 이해를 거부하신다(참고, 창 2:1-3; 출 20:11; 31:17)”라고 단언한다(
A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Harper’s N. T. Commentaries, 1968, 163). Hilgenfeld 또한 이러한 의견을
“창세기 속 하나님에 대한 생각의 의도적 모순”으로 이해한다(F. Godet,
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 1886, 463에서 인용). Rudolf Bultmann은 하나님이
“이제까지 일하시다”라는 개념이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마치신 후 휴식을 취하셨음에도 불구하고(창 2:2 이하; 출 20:11; 31: 17) 세상의 심판 날에도 끊임없이 일을 하고 계시다는 분명한 유대인적 생각에 근거해 있다고 평가한다(Bultmann, 246).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너무 제한적 관점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특히나 21, 25, 28절에서 생명의 주심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일들”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63) P. K. Jewett,
Lord’s Day, 86.
64) Philo,
Legumm allegoriae, 1, 5-6. 우리는 앞서 이 논쟁이 초대 교부들로부터 안식일 준수를 무효화하기 위해 시작되어 왔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일례로 Origen은 요한의 글을 토대로
“그는 이 구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한 어떤 안식일에 대한 명령을 내리시기 위해 일을 쉬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로부터 휴식을 취하셨다는 그 진정한 안식일은 결국 장차 올 나라일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In Numeros homiliae 23, 4).
65) Philo, 1, 16.
66) H. Strack, P. Billerbeck,
Kommentar, II, 420-434. 참고, G. Bertram,
“έρχον,” TDNT, 11, 639-640.
67) M. Veloso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들은 아들이 하는 일에 의해 명백하게 확인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요한복음 5:17-29절에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심(17절), 아버지가 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homoios) 하신다고 말씀하심(19절),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ison) 삼으심(18절), 아버지께서 생명을 주심과 같이 아들 또한(houíto kai) 생명을 주신다고 선언하심(21절), 모두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과 같이(kathós) 아들을 공경해야 한다고 단언하심(23절),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hósper) 아들에게도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분명히 전하심(26절)”(M. Veloso, 119).
68) G. Bertram, 641.
69) M. Veloso, 124-125.
70) 참고, 요 6:39; 12:49; 50; 4:34; 4:42.
71) D. Mollat,
Introduction à l’étude de la Cristologie de Saint Jeon, Mimeographed Edication, Gregorian University, 1970, 116. F. Godet은
“창세기 속 안식은 자연의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것인 반면, 이 질문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거룩한 일에 대한 것이다”라고 영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 1886, 463). Luthardt 또한 하나님이
“이제까지 일하신다”는 것의 구속적 의미를 인식하고 있으며 이것을 안식일적 제도가 아닌 종말론적 안식일과 대비시키고 있다:
“이 시기까지 구원 사역은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미래의 안식일에 가능케 될 것이며, 고로 나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며 나 또한 일한다”(F. Godet, 462에서 인용), F. F. Bruce는 요한복음 5장 17절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설명 한다.
“그대들은 안식일에 일을 함으로써 그 날을 범했다고 나를 공격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식일이 창조 사역이 마친 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시고 계시며, 고로 나 또한 그러하다”(
The Epistle to the Hebrews, 1964, 74). Bruce는 하나님의 안식일 안식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과 수종으로 답하는 자들을 통해 누려질” 구원의 축복으로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올바르게 해석하고 있다(Ibid.).
72) P. K. Jewett,
Lord’s Day, 86. F. Godet이 잘 설명했듯이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그분의 사명과 선언으로써 전복시키려 하셨다고 가정하는 것은
“그분이 자신의 일생동안 끊임 없이 지켜 오신 그 법에 대한 복종의 태도와 모순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예수님의 삶에서 진정한 법과 관련한 대안에 관한 한 어느 하나의 위반도 그것을 증명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73) M. Veloso, 128. Raymond E. Brown은 구원은 특별히 안식일에 주어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1-XII, 1966, 217).
74) William Barclay,
The Gospel of John, 1956, I, 252.
“이 구절(요 7:22-24)이 7장이 아니라 5장의 일부임을 기억해야 한다.” 75) 할례의 구속적 의미에 관해서는 Rudolf Meyer의
“περιτέμνω,” TDNT, VI, 75-76을 참고하라.
“새로 태어난 아이는 ∙∙∙ 그의 어머니가 재난을 막기 위한 울부짖음으로 할례를 행할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당신은 내게 피의 남편이로다!’” 76) 참고,
Yoma 856, Soncino ed., 421.
77) M. J. Lagrange는 그리스도께서는 할례의 모본을 통하여
“자신이 모세의 율법이나 안식일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보이려 하셨다”고 설명한다(
Evangile Saint Jean, 1948, 140).
78) 이는 요한복음 9장 26절에서는 더욱 비꼬는 듯이 표현되고 있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79) M. J. Lagrange, 141. 참고, Severiano del Paramo,
Evangelio de San Mateo, La Sagrada Escritura 1961, I, 152.
80) 참고, W. Rordorf, Sunday, 99. H. Strathmann,
Das Evangelium nach Johannes, 1951, 157, 175. Francis Noel Davey,
The Fourth Gospel, 1947, 267.
Syriac Didascalia 21에서는 안식일을
“우리 주의 잠”으로 여기고 있다(Connolly, 190). Augustine 역시 안식일의 안식을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쉬신 것과 연관을 짓고 있다.(
De Genesi ad litteram 4, 11;
Epistola 55 ad
lanuarium 9, 16). 하지만 그
“아무도 일할 수 없는 ∙∙∙ 밤”(9:4)이 무덤 속에서 그리스도의 휴식만을 의미한다고는 할 수 없다. 이는 그분의 죽음이 모든 구속적 활동들을 중단시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81) 요한복음 9장 4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던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때에 하라는 명을 받았다. 우리는 당연히 매일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안식일에
“이제까지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념하고 경험할 수 있으니 도리어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직책”(고후 5:18)을 가장 잘 성취할 수 있는 시간이야말로 안식일이 아니겠는가?
82) 이 의견은 W. Rordorf가 제시한 것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리하여 왜 제자들이 그러한 동요를 야기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더욱 쉬워진다”(
Sunday, 61). 참고,
“그를 위하여 길을 내는 것이 아마도 더 나았을 것 ∙∙∙.” P. K. Jewett,
Lord’s Day, 37.
83) Sherman E. Johnson,
A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1960, 67.
“법으로 밭모퉁이에 곡물을 거둘 수 있었으며(레 19:9; 23:22; 룻 2) 누구도 지나는 자들이 단 몇 움큼의 곡물을 취하는 것에 대하여 항의를 할 수 없었다”(참고, Mishnah
Peah 8, 7).
“예수께서는 밀밭 옆으로 이를 거쳐 지나가셨고, 그 지나간 길로 인해 그 분의 양쪽으로 밀밭이 이어지고 있었다.” Heinrich A. W. Meyer,
Critical and Exegetical Hand Book to the Gospels of Mark and Luke, 1884, 33. William Barclay는 다음과 같이 그럴싸한 설명을 제시한다.
“예수님 시절 팔레스타인에는 밀밭과 경작지들이 가느다랗게 줄지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땅은 길들이 따라 나있어 통행이 가능한 곳이었다.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제자들과 예수님이 걷고 계셨던 곳이 바로 이 밀밭들 사이에 난 길들 중 한 곳이었다. 제자들이 곡물을 훔치고 있었다는 암시는 어디에서도 찾 아볼 수 없다. 율법 또한 굶주린 여행자들이 낫을 사용하지 않고 이삭을 취하는 제자들이 하던 것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신 23:25)”(
The Gospel of Matthew, 1958, II, 23)
84) 모든 이러한 행동들은 안식일에 금지된 노동의 39가지 주요한 사항들에 속하는 내용들이었다. 전체 항목은 E. Lohse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E. Lohse, 12. 다음의 책도 참고하라. Mishnah,
Shabbath 7, 2.
85) Josephus는 감람산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킬로미터, 즉 3,033걸음 정도였다고 전한다. 사도행전 1장 12절에는 이 거리가
“안식일에 가기(알맞은 길이라)” 적당한 거리로 제시되고 있다(
Antiguities 20, 8, 6).
86)
Jewish Encyclopedia, 1962,
“Sabbath”라는 단어를 보라.
87) W. Rordorf,
Sunday, 61.
88) W. Rordorf는 안식일의 긍정적 의미와 기능을 수긍할 수 없었기에
“새로운 기독교적 결의법(의) ∙∙∙ 시작” 이자
“도덕주의적 차원을 빌미로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오해(이웃 사랑에 대한 의무가 특정 상황에 따라 안식의 날을 지켜야 하는 명령으로 대체되고 있음)”하고 있다며 마태를 비난했다(
Sunday, 67, 68). 참고. G. D. Kilpatrick,
The Origins of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1946, 116이하. 한 복음서 저자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더 큰 이해를 주장하는 것이 한 근대 학자에게 있어서는 오만함이 아닌가? 게다가, 안식일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마태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의 이득이 무엇이든 간에, 이는 우리에게 초기 팔레스타인의 기독교 공동체 가운데 안식일에 대한 지배적 개념들을 비춰볼 수 있는 귀중한 증거들을 제시해준다. 예를 들어
the Epistle to Diognetus 4, 3에도 이러한 견해가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
the Gospel of the Nazaraeans, 38. the Oxxyrhynchus Papyrus I(약 A.D. 200)의 4-11번째 줄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만일 그대가 세상에 대하여 절제하지 않으면 왕국을 보지 못할 것이며, 안식일을 안식일로써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니라”(E. Hennecke,
New Testament Apocrypha I, 106). 이 구절은 글자 그대로
Gospel of Thomas의 Logion(그리스도의 말) 21에도 등장한다. 첫 부분은 안식일에 대한 영적 해석을 보여준다. 좀 더 영적인 측면에서 Clement of Alexander의
Stromateis, 4, 6, 29, 3에도 동일한 생각이 드러나 있다.
“영지주의적 상승의 범위에 따르면, 그것은 안식일의 주인인 사랑이 스스로를 선포하는 은혜에 의한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긍정적 이해의 또 다른 간접적 증거는 초대 교부들이 안식일에 부여한 영적 해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그들은 안식일은 죄와 자비와 정의를 베푸는 일, 의와 진리에 대한 명상으로 부터의 기권(abstention)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Justin,
Dialogue 12, 3. Irenaeus,
Epideixis 96.
Adversus haereses 4, 8, 2. Tertullian,
Adversus Judaeos 4.
Adversus Marcionem 4, 12 and 2, 21. Origen,
In Numeros homiliae 23, 4. 4,
Contra Celsum 8, 23. Ptolemy’s
Letter to Flora 5, 12(SC 24, 60),
Syriac Didascalia 26. 안식일 해석에 대한 추가적 참고와 토론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185, 201. W. Rordorf,
Sunday, 100~108.
89) Heinrich A. W. Meyer는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인용문이 갖는 힘이란 ‘중요한 것으로부터 중요치 않은 것으로(a majori ad minus)’라는 하나의 판단법칙에 의존하고 있다. 다윗은 필요한 경우에 성전의 빵을 분명히 불법적으로 다루었다. 일반적인 관점으로 이는 아직까지 곡물의 이삭의 경우와 비교해 합법과는 훨씬 더 거리가 멀다.” Heinrich A. W. Meyer, 34.
90) Joseph Schmid는 이러한 견해에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경에서 비슷한 행동들에 주목해보면 그 자체로 금지된 일의 형태라 할지라도 어떠한 상황 속에서는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The Gospel according to Mark,
The Regenburg New Testament, 1968, 71).
91)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셨다. 참고, 막 12:10, 26; 마 12:5; 19:4; 21:16.
92) Joseph Schmid는
“단지 하나의 맹목적 규율 때문에 그분의 자녀들이 굶주림을 겪어야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없다”라는 것을 예수께서 보이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Joseph Schmid, 72.
93) Charles R. Erdman는
“예수께서는 밀알 얼마를 줍는 것은 일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심으로 바리새인들에게 답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법을 어겼을지라도 때에 따라서는 안식일 법을 깨는 것이 그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셨다. 필요에 따른 일은 법을 위반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잘못이나 죄가 되지는 않는다”(
The Gospel of Mark, 1945, 55). G. A. Chadwick 또한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다.
“제자들이 떳떳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네 번째 계명이 온전히 지켜졌는가에 판단의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모독한 것이 당시의 정황에 따라 그들에게 옳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1900, 68).
94) 참고, 겔 46:4-5, 10; 역대하 31:3; 역대상 9:32; 삼상 21:6. Roland de Vaux,
Studies in Old Testament Sacrifice, 1964, 36.
95) J. Daniélou는
“성전의 비유는 둘이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Bible and Liturgy, 226). 예수님은 그분이 성정보다 위대하시며 또한 안식일보다도 크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다. 안식일과 성전은 신약의 안식일이자 성전인 예수님 자신이 이곳에 계시기 때문에 안식일과 성전은 사라지게 된다.”라고 예수님(그리고 혹은 마태)께서 성전과 안식일을 동일시하시며 둘을 그분의 메시아적 오심에 의해 사라지고 대체될 것으로 보신 것인가? 성전에 관해서는 예수님께서 그 끝을 예언하셨다(마 24:2). 또한 성전이 예수님의 희생 속에서 그 예표를 마침내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리라(마 27:51)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안식일에 관해서는 이러한 근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님은 사실상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으로 선언하셨고, 그 날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 졌다고 말씀하셨다(막 2:27-28). 또한 그분은 안식일의 구속적 기능을 드러내 보이셨고(눅 4:16-18; 13:12, 15, 16; 마 12:12; 요 5:17), 장차 안식일의 준수에 대해서도 암시를 하셨다(마 24:20).
96) R. Bultmann,
“Neos.” TDNT, II, 479.
97)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1962 ed.,
“Mercy”라는 단어를 보라.
98) W. Rordorf는 마가복음 2장 28절의
“약화(weakening)”라고 주장되는 것에 기초해
“마가복음 2장 27에는 예수님의 실제 말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Sunday, 65).
99)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173.
100) W. Rordorf,
Sunday, 63.
101) Charles R. Erdman, 56.
102) Jubilee 2:31,
“그분은 이스라엘 사람들 외에 아무에게도 이 날에 안식일을 지킬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오직 그들에게만 먹고 마시며 그 날에 안식일을 지키도록 허락하셨다.” 참고,
Mechilta 109 이하. Mishnah, Yoma 8, 6. Gerhard F. Hasel은
“한 민족에게만 안식일을 제한하는 이러한 입장에 반해 예수님은 안식일에 관한 더욱 넓은 관점을 취하셨다”고 설명한다(
“The Saviour and His Sabbath,” The Ministry, Feb. 1975: 12). 참고. Henry Berclay Swete,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1902, 49.
“우리 주의 말씀들은 더욱 높고 멀리 뻗쳐나간다. 안식일 법의 핵심에는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103) P. K. Jewett 또한 이러한 견해를 제대로 언급하고 있다(
Lord’s Day, 38).
104) W. Rordorf, Sunday, 64. 다음의 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O. Cullmann,
Early Christian Worship, 1966, 88.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1959, 152010). J. Wellhausen,
Einleitung in die drei ersten Evangelien, 1911
2, 129.
Das Evangelium Marci, 1909
2, 20. P. K. Jewett,
Lord’s Day, 38. THE T. W. Manson 본래
“인자”는 27절과 28절 모두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Conjectanea Neotestamentica in honorem A. Fridrichsen, 1947, 138이하).
105) 몇 저자들이 이러한 견해를 옹호했는데, W. Rordorf는
“초기 교회는 예수님께서 밝히신 안식일의 참 의미와 관련해 이 구절에서 인간의 근본적 자유를 분명히 발견했음에도 이를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여겼다”라고 주장하며, 고로
“초기 교회는 이 자유를 메시아적 의미에서 해석하고 그것을 그 자체를 위해서는 주장하지 않았다”라고 설명한다(
Sunday, 65). 참고. Joseph Schmid, 73. E. Lohse, 22. E. Kaesemann,
Exegetische Versuche und Besinnungen, 1960, 207. W. Grundmann,
Das Evengelium nach Markus, 1965
2, 70.
106) D. E. Nineham,
The Gospel of Mark, 1963, 108.
107) Joseph Schmid, 72.
108) Joseph Huby는 안식일을 없애고 후자의 경우에 힘을 실어 주기
“인자”를
“사람”으로 바꾸려고 한 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현명한 비판을 내 놓는다:
“이 해설이 범한 첫 번째 실수는 마태와 누가의 유사한 본문의 의미와 신약에서도 끊임없이 쓰이고 있는데 반해 모든 메시아적 의미가 남긴 ‘인자’라는 고유의 표현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는 마가의 생각을 조작하고 인간에게 안식일에 대한 절대적인 주인 됨의 권리를 부여한 27절에서 밝혀진 원칙의 결과를 강제하려는 것이다. 특정한 경우, 상황은 의무로 부터(사람을) 해방시킬 수 있지만 단지 인간의 힘만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신성한 법을 베풀거나 폐지할 수는 없다”(
Evangile selon Saint Marc, Verbum Salutis, 1948, 68).
109) Richard S. MacConnell,
Law and Prophecy in Matthew’s Gospel, Dissertation, University of Basel, 1969, 71, 72. Charles R. Erdman은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한다:
“안식일 모독을 위해서 이 말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오해되고 오역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은 너무도 놀랍고 갑작스러운 일이다. 일부는 그것을 통해 예수께서 실제 안식일을 폐지하거나 그 날을 거룩한 날(holy day)에서 휴일(holiday)로 바꾸려고 하셨다고 제안하기까지 한다. 이는 공식적 승인을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해석한 것에 불과하며, 이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주의의 측면에서 안식일을 해석하려던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일이다.” Erdman의 안식일의 긍정적 기능에 대한 뒤 이은 설명에 주의하라(Erdman, 56).
110) W. Rordorf, Sunday, 65. 참고. E. Käsemann,
Essays on New Testament Themes, ET 1964, 39. H. Braun,
Spät jüdischhäretischer und frühchristlicher Radikalismus II, 1957, 70.
111) R. C. H. Lenski는 이 의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제대로 설명한다.
“강조를 두어야 하는 부분은 역시나 가장 처음 부분에 위치한 술부(predicate)이다. 그러므로 ‘주’(lord)로써 모든 법과 제도 위에 서 계신 그분은 그들이 의도한 바를 모두 이루시기 위해 지금 이곳에 계셨다(마 5:17) ∙∙∙ 스스로가 야훼의 아들로 그 아버지와 함께 인간의 이로움을 위해 종교적 준수와 함께 안식일을 제정하셨던 그 분은 지금 여기에서 신성한 안식일 법을 성취시키심으로써 그 날을 영광스럽게 만드셨다. 그분을 끝으로 제자들이 후일 안식일을 범하여 가책이 느끼는 일은 종결될 것이었다”(
The Interpretation of St. Mark’s Gospel, 1946, 130).
112) Henry Barclay Swete, 50.
113) Joseph Huby, 69. Heinrich August Wilhelm Meyer 또한 비슷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Meyer, 35).
114) W. Rordorf가 주장한 것과 같이 다른 저자들도 비슷한 관점을 취하고 있다(
Sunday, 65).
115) W. Rordorf는 이러한 관련성에 대한 인식하고 있다(
Sunday, 109). J. Daniélou,
Bible and Liturgy, 226. E. Jenni, 39. 교부들 중에는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라. Jerome,
Comm. in Esaiam 16(on 58:13). Augustine,
Epistula 55 ad Ianuarium 12, 22.
116) J. Daniélou,
Bible and Liturgy, 226.
117) James J. C. Cox는 마태복음 11장 28절의 인용구와 12장 1-4절의 안식일 가르침 사이의 연관성을 인식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11장 28절과 관련이 있는 그리스도의 말들(logia)의 마태복음의 변증적/논쟁적 이해”를 또한 강조했다(
“‘Bearers of Heavy Burdens,’ A Significant Textual,” Variant, AUSS 9, Jan. 1971: 12-14). 마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가벼운 멍에를(참고. Didache 6, 2에서
“주의 가르침”은
“주의 멍에”로 언급되고 있다) 랍비들에 의해 부과된 무거운 짐과 대조시킨다. Cox는 마태복음의 본문과 도마 복음(
Gospel of Thomas, Logion 90)과
Syriac Didascalia (1, 6, 10; 2, 34, 7; 6, 12, 11; 6, 17, 6) 속 평행 구절과의 비교를 통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J. C. Fenton은 동일하게
“수고하고 짐진자들이라는 표현은 율법이 필경사들이나 바리새인들에 의해 설명되어진 만큼 그것을 지키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 일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매주 안식일의 쉼은 메시아 도래의 시기의 최종적 쉼에 대한 기대로 여겨졌다”라고 진술한다(
The Gospel of St. Matthew, 1963, 187).
118) 참고. Mishnah,
Aboth 3, 5. Berakoth 2, 2.
119)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일 안식이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남아있다(απολείπεται,, 히 4:6, 9)을 강조하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창조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일의 근본적이고 불가분한 통일성에 대해 진술한다. Karl Barth, Church Dogmatics, ET 1958, 111, 257.
“창조로부터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모든 인간의 결정을 앞서고 또한 대체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안식일 안식(sabbatismos), 그분 자신과 인간의 자유 사이의 거룩한 의지와 정연한 유대와 관계, 합의가 여전히 남아있다.” 참고, C. Spicg,
L’ Epitre aux Hebreux, 1953, II, 83.
120) Isaiah 58장 13-14은 실제 안식일 준수가 언약의 축복을 약속해준다는 개념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다. 이 구절은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것 외에 또 다른 안식일 안식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아있다고 주장하면서, 히브리스 4장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언약과 안식일 준수의 축복이 관련이 있다는 보편적인 견해를 반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견해의 발달과정에 대해서는 G. von Rad와 Ernst Jenne의 글을 참고 하라. Alexander Balmain Bruce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 영적 결말을 지적함으로써 외적인 측면에 치중된 안식일 준수로부터 히브리인들을 떼어놓으려고 애썼다”라고 설명한다.(
The Epistle to the Hebrews, 1899, 162). Fracis S. Sampson 도 히브리서 4장이 안식일 언약의 축복과 관련해 지배적이던
“배타적 견해”를 논박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A. Criti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1866, 156).
121) Adolph Saphir,
The Epistle to the Hebrews, 1946, 184.
122) G. von Rad는 안식일 안식의 개념은 단순히 마음의 평화가 아닌 신명기(12:9이하; 25:19)에서 비롯된
“방랑의 곤함과 적들로 인해 괴롭던 한 민족에게 주어진 온전히 실재하는 것으로써 여겨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G. von Rad, 95). 이 주제는 뒤에서도 계속 전개되고 있다(참고, 수 21:43-45; 왕상 8:56; 대상 22:9; 23:25; 대하 15:15; 20:30; 6:41-42).
123) John Brown은 다음 글에서 이 점에 대하여 다음 글에서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 Hebrews,
The Banner of Truth, 1862, 208.
124) G. von Rad, 99.
125) J. Daniélou,
Bible and Liturgy, 299.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땅의 약속 아래,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와 친절과 만나게 되었다.” W. Robertson Nicoll,
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1956, 279.
126) 이는 히브리서 저자가 옛언약의 우월성에 대한 기독교제도의 탁월함을 주장하기 위해 애썼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예배에도 정통하기 위해 노력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127) Samuel T. Lowrie,
An Explanation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1884, 114.
128) R. C. 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and of the Epistle of James, 1946, 130.
129) W. Rordorf는
“오늘날”의 영향력을 강조 한다:
“우리가 ‘오늘날’(Today)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그 안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그 구절에 담긴 부담을 오해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새로운 날(The new day of the ‘Today’)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다(7절). 이 새로운 날에는 안식에 아직 더 들어갈 수 있다. 이 날이 안식은 믿는 자들에게 이 안식은 현실이 되어왔다”(
Sunday, 112). 누가복음 4장 19절과 요한복음 9장 4절의
“오늘날”과의 유사성에 주의하라.
130) 하나님의 안식(κατάπαυσιν, 히 4:10)이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언급된 무덤에서의 안식(ανάπαυσιν)이 되기는 어렵다.
131) J.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972, II, 339.
132) K. Barth,
Church Dogmatics, ET 1958, III, 50. 참고, C. K. Barrett,
“The Eschatology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in the Background of the New Testament and its Eschatology, ed. W. D. Davies and D. Daube, 1964
2, 372.
“[히브리서 4:11]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불신과 불순종의 반대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의 완성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나누고 있음을 의미한다.” F. F. Bruce는 히브리서 4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안식일 안식과 요한복음 5장 17절의 그리스도의 말씀을 결부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그 안식이 의미하는 바는 주로 미래의 안식이 아니라 창조 이후로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The Epistle to the Hebrews, 1964, 74, 78).
133)
Epistle of Barnabas 15:8.
134) Alexander Balmain Bruce는 이 견해에 대해 잘 기술하고 있다:
“안식일 지키기(Sabbatisim) ∙∙∙ 은 세상의 시작과 끝, 만물의 소모와 창조의 태고의 상태를 절묘하여 연관짓고 있다. 그것은 ‘완벽한(ideal)’ 안식을 의미하고 또한 그렇게 가르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의 복음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the seventh day)에 쉬셨다는 그 이름의 가치가 있는 안식에 처음으로 들어가는데 관심이 있었다는 암시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이름을 택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는 곳이 곧 하나님 그분의 안식(God’s own rest)이라는 것을 만족스럽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랍비들의 안식일은 버리신 대신 인간을 위한(hamanized) 안식일로 그 자리를 대신하셨다. 이를 위하여 그분은 인간의 선을 준수해야 할 법으로 만드시고, 선을 행함이 언제나 옳음을 선언하시며, 또한 거룩한 행동을 쉴 새 없는 것으로, 거룩한 쉼은 상대적인 것으로 제시하심으로써 이로운 행동들을 정당화하셨다.” Alexander Balmain Bruce, 160. 161.
135) F. F. Bruce는
“히브리서 2장에서 발견되는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가 요한복음 5장 17절의 우리의 주의 말씀에 의해 암시되고 있다”고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The Epistle to the Hebrews, 1964, 74, 78).
136) 마지막은 R. C. H. Lenski의 설명이다(
The Interpretation of St. Matthew’s Gospel, 1943, 939). 다음의 자료들을 참고하라. J. C. Fenton, 387. Theodore H. Robinson,
The Gospel of Matthew, 1928, 197. William Hendriksen, 859. H. A. W. Meyer, 416.
137) 0. Cullmann,
Early Christian Worship, 1966, 10. P. Cotton, From Sabbath to Sunday, 1933, 604. W. Rordorf는
“마태복음 24장 22절 속 추가(the addition μηδέ σαββάτω)(혹은 그 절 전체?)가 후기 유대인의(마카비안?) 환경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측한다”(
Sunday, 68). 참고, E. Lohse, 30.
138) 참고, 마태복음 5:18; 10:6, 23; 19:9; 23:3, 23.
139)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179. 1. E. Lohse, 30. J. Schmid,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1968, 34.
140) William Hendriksen, 859.
“안식일 준수를 주제로 한 그리스도 자신의 가르침은(마 12:11; 막 2:27) 그 날에 도피를 허용할 만큼 충분히 관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필경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냈고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많은 규칙들과 규율들은 엄격한 준수자들로 하여금 어려운 자들을 돕는 일을 거부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겨울이나 안식일에 도망치게 되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라고 권고하신 것이다.” 141) A. W. Argyle,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1963, 183. W. Rordorf 또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말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지켜졌다는 바로 그 사실은 그들이 안식일을 높은 존경을 갖고 유지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Sunday, 120).
“마태복음 24장 20절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 준수의 일례를 보여주고 있다.” E. Lohse, 29.
142)
Epistle to Diognetus 4, 3,
ANF I, 26. 안식일에 대한 초기 기독교 교부의 해석에 대한 참고와 논의는 주석 88을 참고하라.
143) W. Rordorf,
Sunday, 70.
(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