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2장 그리스도와 주의 날
 시편의 저자는 시편 95편에서 “저희(이스라엘 민족)와 같이 우리도 ∙∙∙ 받은”, “믿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안식일 안식의 “복음”(4:2)이 지닌 보편적인 구속의 영역을 증명하기 위해서 몇 가지 눈에 띄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우선, 그는 11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맹세 부분을 놓고 다음과 같이 추리한다. 즉,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안식일 안식을 약속하셨지만 광야 세대가 그들의 불순종으로 [안식의 약속의 땅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4:4; 참고 3:16-19).122) 그는 “그러므로 그곳에 들어갈 자들은 남아있다”(4:6)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로, 그는 하나님의 안식일 안식이 여호수아 때의 이스라엘 민족들이 안식의 땅에 들어갔던 그 이후 세대에도 안식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어 설명한다. 왜냐하면 “오랜 후의 다윗”(4:7)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말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4:7, 참고, 시 95:7). 안식일 안식의 복음이 최초로 선포된 이후, 더욱이 다윗의 때에도 하나님께서 “오늘날”이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그 분의 약속을 거듭 강조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안식일 안식(σαββατισμός)에 들어가는 약속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4:9).123) 마지막으로, 폰 라트(G. von Rad)가 설명했듯이, 저자는 “시편이 하나님의 안식일 제의를 재차 강조한 그 ‘오늘날’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분명해졌다”라는 의견을 내비친다(4:7).124) 이러한 일련의 추론을 통하여 그는 안식일이 세 가지 차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첫 번째는 창조의 완성을 기념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안식의 땅에 들어가는 약속과 그것의 일시적 실현을 상징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다니엘루(J. Danielou)가 언급한 것처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곱째 날의 또 다른 안식일(sabbatismos)을 예시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의미”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성취되고 실현되었다.125) 히브리서의 저자는 창세기와 시편 두 본문의 병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미래의 안식일 안식으로 예정된 창조와 구원의 온전한 목적에 참여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74.1)
 히브리서의 저자가 안식일의 실제적인 준수를 논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로부터 주어지는 축복의 성취와 영구성에 대해서만 논하고 있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는 문자적으로는 안식일 준수 여부에 대한 어떠한 추론도 이끌어 내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편지서가 안식일 준수와 같은 유대교의 의식들을 많이 강조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대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는 타당성을 거의 얻지 못한다.126) 저자가 안식일 준수의 정당성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4:9)는 그 축복을 경험하는 측면에서 권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증언을 오히려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 즉, 그는 안식일 준수를 이미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의 서한을 받는 사람들은 안식일 계명의 법적 의무가 아닌 그리스도의 오심과 관련한 그 날의 참 의미를 깨달았어야 했다. (75.1)
 대다수의 해석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안식일 안식”(또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4:9)을 배타적으로 미래에 실현될 것으로만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안식일 준수에 대한 사도 서한의 가르침에 대한 두드러진 오해에 대하여 사무엘 로우리(Samuel T. Lowrie)는 다음과 같은 그럴싸한 설명을 내놓았다. 즉 히브리서는 “개종한 히브리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생기고 나서 오랜 후에야 정경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약 4세기경). 결과적으로 사도 서한의 실제 독자들이 처한 환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이방인 해석 자들은 초기 유대인 개종자들이 깨달았어야 했던 핵심들을 놓치게 되었다.127) (76.1)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 남아있는 ‘그’ 안식일 안식”(4:9)을 다시 확인하고 “그 안식에 들어가”(4:11)라는 권고는 안식일을 지킴으로서 얻게 되는 축복들이 앞으로도 실현될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면서도 그 전체의 구절은 동시에 현재의 안식일 준수의 경험에 대한 몇 가지 중요 한 시사점들을 아울러 내포하고 있다. 일례로 3절에서 저자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είαερκόμεθα)”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렌스키(R. C. H. Lenski)가 언급한 것과 같이 여기에서 현재 시제는 추상적 보편성을 표현한 것이 아니므로 “그들은 들어간다”로 읽어야 한다.128) “우리는 들어간다”라는 개인적인 형식은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는”(4:3) 저자와 독자들이 현재(present) 시점에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물론 그 안식은 다음의 성경절에서 제시 해주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창조 이래로 계속 유효하게 지켜져 온 하나님의 안식일 안식을 말하는 것이다(4:3-4). 이와 유사하게 문자적으로 “남겨 두다”(to leave behind)라는 의미의 “남아 있다”(remains-άπολείπεται)는 현재 수동태이므로 미래 어떤 일의 가능성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8절에서 저자는 여호수아의 세대가 그 약속을 소멸시키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9절에서 말하는 문자적인 의미는 “그러므로 안식일 안식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남겨져 있다” 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시점이 현재시제로 기록된 것으로 봐서 그것은 미래 가능성보다는 현재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76.2)
 이 구절과 관련해서 7절에 두 번 반복되는 “오늘날-σήμερον”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에서 하나님의 안식의 “복음”(4:6)을 강조하면서 사용한 “오늘날”이라는 단어가 다윗의 때에 안식일 안식의 복음이 다시 전해진 때로부터129) 그것이 기독교의 시대까지 확장된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4:7)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그것을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이것은 안식의 복음에 대한 미래적 의미가 아닌 “오늘날,” 즉 현재의 응답이다. 이 응답은 기독교의 안식일 준수의 의미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19절에서 이 개념은 하나님과 인간의 안식에 대한 유비를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들어갔다—είσελθών”“쉬셨다—κατέπαυσεν” 이 두 동사는 현재가 아닌 부정 과거 시제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 두 단어가 미래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정과거란 사건이 과거에 발생했다 할지라도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안식일 경험은 현재에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역표준성경(RSV)에서는 이 본문이 하나님의 안식이 현재 존재할 뿐 아니라 그 영원한 특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감안해서(4:1, 3, 6, 9, 11) 두 동사를 현재 시제로(“enters ∙∙∙ ceases”)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부 해석가들은 이런 문맥들을 고려하지 못하여 여기에 기록된 안식을 죽음의 안식130) 혹은 믿는 자들이 미래에 하늘에서 누릴 상속으로서의 안식 정도로 해석하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안식일 안식이 현재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구절을 미래적인 단일 의도만으로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77.1)
 항상 악한 일을 행하는 인간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선하시기 때문에 10절에 기록된 비유의 핵심을 인간의 일 그 자체만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비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본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일로부터 쉬시는 것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기 때문에 일을 멈추는 것은 안식일의 핵심 요소이다. 그러므로 싫은 안식일의 속성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서술로 이해할 수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남겨져 있다는 안식일 안식—σαββατισμός—의 기본적인 특성을 제시함으로써 그 속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히브리서의 저자는 단지 안식일에 독자들로 하여금 세속적 활동을 멈추게 하고자 독려하고 있는 것인가? 사실 유대인 그리스도에게 이 부분을 상기시켜줄 필요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안식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만들어 낼 뿐이기 때문이었다. 안식일 안식의 축복이 단순히 하나의 부정(negation)이 될 수는 없다. 저자는 분명히 안식일에 누리는 안식을 더 깊은 의미로 이해하였다. 이는 “순종치 아니함—άπειθείας” 즉 불순종을 낳은 믿음의 부재로(4:6, 11)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과 “믿음—πίστει,” 즉 순종을 낳은 충실함으로 그 안에 들어간 자들 사이의 대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곧 안식일에 안식을 취하는 행동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4:2, 3, 11)을 경험하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칼뱅(Calvin)이 설명하는 것과 같이 믿는 자들은 “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허락해야” 하는 것이다.131) 바르트(K. Barth)의 표현대로, 하나님과 같이(4:10) 안식일에 안식함으로써, 믿는 자들은 “그분(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 의식적으로 참여하게 된다.”132) (78.1)
 히브리서의 저자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남아 있는 안식일 안식은(4:9) 단순히 나태하게 놀고 지내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매주 새롭게 생겨나는 기회, 즉 창조 구속의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들을 믿음으로 받기 위해 자신을 돌보던 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축복으로서의 안식일 경험은 현재에 소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4:11), 이러한 미래지향적 의미는 안식일이 전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마지막 구원에 대한 기대와 부합되고 있다. 신약과 랍비 문헌 모두에서도 안식일은 장차 올 나라의 형태로 여겨진다.133)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그 나름대로 안식일 준수의 본질(그리스도인 생활의 핵심이기도 한), 다시 말해 현재의 구원의 축복을 경험하는 것과 하늘 가나안에서의 종말론적 완성 사이의 긴장을 나타내고 있다.134) (79.1)
 안식일 준수에 관한 이와 같은 확장된 해석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외적, 물질적 개념을 중시하던 것을 멈추게 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 분명하다. 물론 저자가 복음서에 나타난 안식일 소재들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해석을 통해 일찍이 논의된 안식일에 관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견해가 의미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일례로 히브리서 4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안식일 안식의 영구성이 가진 의미(참고, 4:3, 4, 5, 10절)는 요한복음 5:17의 주님의 말씀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35) 하나님의 안식은 실제로 타락한 인간들을 되찾기 위해 계획된 그분의 지속적인 구원 활동인 셈이다. 인간을 회복시키고 구속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유일자로써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안식의 최고의 현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께로 오는 모든 자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약속은(마 11:28)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허락된(히 4:1, 3, 6, 9, 11) 안식일 안식의 핵심(σαββατισμός-κατάπαυσις)이다. 현재의 안식일에도 우리가 누리는 이러한 구원의 축복은 지상에서의 우리의 순례가 끝날 때에 온전히 경험되어질 것이다. 히브리서 4장에서 안식일을 구원의 축복을 경험하는 시간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의 관점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일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문자적 폐기가 아닌 계명의 영적 정상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80.1)
 안식일에 관한 그리스도의 특별한 권고
 복음서의 안식일 관련 내용들에 대한 분석을 마무리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μηδέ σαββάτω)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 24:20)라는 말씀과 함께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며 제자들에게 주신 특별한 권고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81.1)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특별한 권고를 하신 이유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은 앞서 제시되었다. 일례로 성문이 닫혀 있거나 심리적으로 도망하는 데 불리한 상태이거나, 엄격한 안식일 준수자들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거절하거나, 그 날에 3분의 2마일만 여행하도록 허락하는 랍비들의 규율을 위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또는 안식일에 소위 안식일 모독에 대해 격분할 광신적인 유대인들의 분노 등으로 인해서 안식일에 도피하는 것이 방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들이다.136) 하지만 일부에서는 마가복음 13:18“안식일에도(neither on a Sabbath)-μεδε σαββάτω”라는 구절이 빠졌기 때문에 이는 후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삽입한 것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137) 이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기록자가 당시에 안식일을 법적 구속력이 있는 개념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마태가 유대인들의 관습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자신의 독자들을 존중했다는 점을 고려 할 때,138) 그 구절의 실제성에 의문을 제기할 만한 근거는 없다. 마가복음(13:18)에서 그 구절이 누락된 것은 마가가 유대인이 아닌 다른 청중에게 글을 쓰고 있었고, 그래서 유대인들의 제약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이동하지 말라고 한 말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81.2)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안식일 준수를 포기하지 못한 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전쟁과 관련된 안식일 규례의 불확실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139) 그들의 설명대로 이 본문은 실제적인 안식일 준수에 대한 설명은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 구절이 미래의 도피 상황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다루고 있고, 그 도피 상황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우연히 발생할 가능성을 두고 그런 개념에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안식일 준수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안식일 준수 여부에 대해 불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 권면이 안식일 준수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커다란 고난이 닥쳐올 것에 대한 대비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마 24:15, 21). 이 구절에서 단순하게 언급된 안식일은 그 날이 고난의 때에 도피를 하기에 부적합한 요인 중의 하나로 제시되는 것이지, 안식일 준수 여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이 다른 날로 대체될 것을 예견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그가 떠난 후로도 안식일의 영속성을 당연하게 여겼다. (82.1)
 이 진술을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안식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안식일에 대한 견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식일에도 불가피 하게 도망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말하는 이 표현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안식일에 도피하는 일을 금지하시는 것인가? 사실 예수는 환란의 때에 도피하기에 알맞은 조건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떤 식으로든 겨울이나 안식일에 도피하는 것이 불법적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이 이러한 불리한 여건으로 인해 탈출을 하는데 방해를 받을지 모를 것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임신을 했거나 아이를 돌보는 여인들의 처지나(마 24:19절) 겨울이나 안식일로 인해 생기는 이동의 어려움에(20절) 대해 고려하는 것은 도덕적 판단과 같은 가치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애정 어린 염려를 뜻하는 것일 뿐이다. 안식하는 날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도피를 대비하고 또 자신들의 도피를 방해할지도 모르는 광신적 유대인들에 대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을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관점에서 안식일을 도피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때로 보았던 것이다.14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권고를 통해서 안식일에 해당하는 행동에 대해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적합한 상황을 위해 제자들이 기도하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 준수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가 안식일 준수의 영구성을 예견했다는 것을 예시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아가일(A. W. Argyle)이 언급한 것처럼 “마태가 집필했던 이 시기는 안식일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준수되고 있을 때 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41) (82.2)
 결론
 복음서에 담긴 안식일 관련 자료들을 분석하여 몇 가지 결론을 얻었다. 우선, 복음서의 저자들이 안식일 준수의 방법에 관한 그리스도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갈등을 풍성하게 보고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유대계 사회와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안식일이 잘 유지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안식일에 관한 선언들이나 치유 활동들에 관한 광범위한 이야기들은 사실상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준수에 대해 논쟁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예수의 안식일에 대한 태도를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서의 준수방식으로 이해한 것이지, 그것이 예배의 날을 새로운 날로 변경하고자 예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논쟁의 본질은 안식일 준수의 새로운 의미(a new meaning)와 새로운 방법(a new manner)에 있었다. (83.1)
 안식일 준수의 새로운 방법과 관련해서, 그 날은 수동적인 무의미(idleness)의 시간이 아니라 궁핍한 영혼들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의 봉사를 하는 시간으로 여겨졌다(막 3:4; 마 12:7, 12; 요 9:4). 이와 같은 새로운 이해는 A.D. 130년에서 200년경의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한”처럼 아주 오래된 문헌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이 문서에서 유대인들은 “그분(하나님)은 우리가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을 금했다—이 어찌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주장하여 “하나님에 대해 거짓으로 말”한데 대한 비난을 받았다.142) (84.1)
 우리는 그리스도의 안식일 개혁을 통해 안식일의 긍정적인 의미와 근본적인 가치가 더 분명하게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당시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율법적 제약들과는 반대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수행하셨으며, 이를 통해 수많은 랍비들의 규제들로부터 그 날을 자유롭게 하는, 즉 그 날을 인류를 위한 영육의 행복과 건강을 위한 날로 회복시키고자 하셨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친절을 베푸심으로 사랑을 보여주셨다. 이렇게 행동하신 목적은 단순히 계명이 제시하는 인도주의 적 의무를 성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거룩한 축복의 경험과 받아들임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84.2)
 우리는 복음서에서 안식일과 구원의 관계를 몇 가지의 방법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일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시된 하나님의 안식은 나태함과 무용의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분이 “이제까지 일하”시는 시간(요 5:17) 이었다. 이와 동일하게 예수께서는 제사장들이 곤궁한 죄인들을 돌보기 위해 정당하게 안식일을 활용한 경우(마 12:5; 요 7:23)도 안식일의 구속적 기능을 보여주는 예로써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안식일 사역과 메시아적 주장 속에서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와 관련된 최고의 계시를 발견했다. 구주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안식일에 시작하시고 안식일에 끝맺으셨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적 시간의 해방과 구속의 약속들이 성취될 것이라는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들 분명하게 선언하셨다(눅 4:18-21). 이와 더불어 그분께서는 안식일에 자신의 구속 사역을 강화하셨고(요 5:17; 9:4; 막 3:4), 이로써 “사단에게 매인 바 된”(눅 13:16) 죄인들이 안식일을 자신들의 구원의 날로써 경험하고 기억하도록 하셨다. (85.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역에서 드러난 사실은 예배를 위한 새로운 날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안식일을 “뒷전으로 물리거나” 혹은 “단순히 무효화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오히려 믿음 안에서 그분에게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안식을 기념하기에 적합한 날로써 구주에 의해 만들어진 날이다(마 11:28).143) (85.2)
 우리가 발견한 이와 같은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는 히브리서 4장에서 그 예가 제시되고 있다. 히브리서의 기록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남아 있는 안식일 안식”(4:9)은 유대 민족을 위해서만 남겨진 물리적 경험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는 모두에게 주어지는 영속적이고 영적인 축복(4:2, 2, 11)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같이(4:10) 안식일에 하던 일을 멈춤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정된(4:7) 구원의 축복을 노력이 아닌 은혜로써 미리 맛볼 수 있도록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해석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초기 교회가 예수의 메시아적 선언과(막 2:28; 마 12:6; 요 5:17) 치유 활동들을 통해서 안식일을 새로운 예배의 날로 대체하고자 의도하셨다고 이해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 준수의 진정한 의미를 계시하신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기 위한 시간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