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2장 그리스도와 주의 날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진정한 안식일 준수의 방식은 친절한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것으로 묘사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활동 바로 그 자체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사실, 애굽의 속박(신 5:15)과 죄의 속박(눅 5:18-19; 13:16; 요 5:17)으로부터 하늘의 구원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로서 안식일은 신자들이 다른 사람에게 친절과 자비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원을 경험하는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주장한 진정한 안식일 봉사에 대한 규칙은 먼저 마음으로부터 살아있는 사랑의 봉사를 요구하며, 그 다음에 예식의 규정을 이행하라고 요구한다. 복음서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하신 것에 대해서는 적게 기록하고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 동정과 자비의 봉사를 하신 것에 대해서는 많이 기록한 것은 이런 의미를 진지하게 배려한 것이다. (63.1)
 안식일의 근본적 가치는 이와 동일한 사건과 함께 진술된 그리스도의 또 다른 말씀 속에서 강조되어진다. 오직 마가에 의해서만 기록된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98) 몇몇 저자들은 해석하기를, 이 유명한 그리스도의 선언은 “인간의 복지가 안식일 안식보다 우월한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99). 그리고 안식일은 “더 이상 축복을 가져오지 않고 고난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실패했으며, 안식일에 대한 반역과 그것을 무시한 결과는 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100) 이러한 해석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해석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근시안적 사고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그 의도하신 목적을 성취할 수 없어 결과적으로는 나중에 폐지할 수밖에 없는 율법을 주신 분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의도된 목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거나 악용하는 인간의 방식에 의해 그 유효성이 결정된다. 그러한 결론은 계명의 유효성을 결정하는 궁극적 판단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64.1)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라고 예수께서 단언하신 것은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였는가? 이 말씀을 “인간의 복지가 안식일 안식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그 안식일 안식이 인간의 복지를 제한하도록 사람들에게 독단적으로 강요되었었음을 암시하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바로 그 말씀에 반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분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διά) 만들어진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안식일이 인간의 창조 후에 만들어(έγένετο)진 이유가 사람을 규정과 규칙들의 노예가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육체적, 영적 행복을 주기 위해서였던 것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안식일을 적절하게 준수하는 것이 인간의 복지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호리려 그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찰스 어드만(Charles R. Erdman)이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설명했듯이, (65.1)
이 점이 바리새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너무 지나치게 해석해 그 계명에 사소하고 불합리하며 성가신 요구사항들과 제한 사항들을 부과하므로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 더 이상 기쁨이 아니요 짐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 율법은 인간을 섬기는 것이 되는 대신에 무자비한 주인으로 변형되었고, 그 폭정 아래서 인간들은 신음하게 되었다.101)
(65.2)
 그리스도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라는 이 유명한 선언으로 새로운 날을 지키는 새로운 제도를 예기하면서 원래의 안식일 계명을 폐지하시고자 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안식일을 인간의 필요보다 더 높인 포로 후기의 유대인들의 랍비주의적 안식일 신학에 의해 강요된 굴레들을 벗겨버리고자 하셨다.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의 필요를 자제하도록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 날에 의도된 기능, 즉 고통의 나날 중의 한 날이 아니라 축복의 날이 되도록 하는 기능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66.1)
 몇몇 학자들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날이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 그분께서는 안식일이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라는 널리 보급되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개념을 정죄하고자 의도한 것이며, 그것으로 안식일의 보편적인 범위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102)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대한 이런 폭넓은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말씀이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그 구절의 전후 상황에 비춰볼 때 전혀 맞지 않는다. 그 구절에서 논의되고 있는 물음은 안식일 안식의 보편적인 범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근본적 기능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103) (66.2)
 그리스도는 자신의 메시아적 권위와 함께 안식일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재가(裁)하기 위해서 모든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그 유명한 선언,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 이니라”(막 2:28)는 선언을 덧붙인다. 어떤 학자들은 이 결론이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전의 진술(2:27), 즉 안식일은 일반적으로 사람과 관련된 것이지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진술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고소된 사람은 인자가 아니라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 시라는 선언은 그것을 어긴 제자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자”라는 표현은 “인자”뿐만 아니라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는 아람어 ‘바르나사’(barnasha)를 잘못 번역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라면 그리스도께서 원래 말씀하신 것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사람(인자가 아님)은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가 된다(막 2:27-28).104) 저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사람”에서 “인자”로 바뀐 변화는 초기교회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안식일의 위반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떠맡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소심하게 그 의무로부터 자유로웠던 그리스도에게서만 그 책임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105) (66.3)
 “인자”라는 표현이 아람어 관용구에 대한 잘못된 번역이라는 개념은 정당성이 없다. 나인햄(D. E. Nineham)이 적절하게 진술했듯이, 만일에 그 아람어가 28절에서 잘못 번역된 것이라면 “왜 27절에서는 그렇지 않은가?”106) 하지만 그 관용구는 이 장의 앞부분(2:10)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거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과 한 유사한 논쟁을 하면서 죄를 사하는 자신의 권위를 확언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인자”로 정의하고 있다. 이 표현은 사실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정의하실 때 가장 선호하는 것이었다(복음서에서 이 표현은 80여 차례 나타난다). 그 이유는 이 표현이 그분의 메시아 되심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자”“사람”과 같은 뜻이라는 해석은 조세프 슈미트(Josef Schmid)에 의해 잘 진술된 것처럼 “예수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타이틀로서만 그 ‘인자’라는 단어가 발견되는 마가복음의 문학적인 용례에 반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예수 자신이 안식일을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것으로 인지하고 있는 사실에도 반대하는 것이다.”107) 사실상,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다는 그리스도의 단언(27절)과 일반적으로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결론, 즉 그 의무로부터 자유롭다는 결론을 조화시키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108) 이 경우에 28절27절을 보다 알기 쉽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것의 원칙을 부정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67.1)
 더욱이 리차드 맥콘넬(Richard S. McConnell)이 그의 학위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통찰력 있게 지적한 것처럼, (68.1)
예수의 말씀이 원래 의미하는 바가 안식일의 주인이 사람이라는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해도, 이것이 로르도르프(Rordorf)가 주장하듯이 안식일 법에 더 이상 전혀 구속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들이 어떻게 영광을 돌리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를 결정하도록 하는 권리를 그의 제자들에게 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었다. 제자들은 그 율법의 종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주인의 예를 따라 그 안식일 율법 이면의 의도를 성취하는 방법을 결정하도록 권위를 부여받았다.109)
(68.2)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새로운 예배일에 의해 안식일이 대체되었음을 옹호하기 위한 초기교회의 노력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곳에 있지도 않는 논점으로 그 구절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 논점은 안식일 대 일요일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고소에 따라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막 2:24)고 있었던 제자들의 행위에 관련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 밀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는 안식일을 위해 의도된 기능과 조화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몇 가지의 논증들을 제기함으로써 이 비평을 논박하고 있음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안식일의 근본적 목적, 즉 그 날은 인간의 복리를 보장해주는 날이라는 것을 설명한 후, 그리스도께서는 결론적으로 자신이 그 날의 주인 되심을 단언하신다. (68.3)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는 이 두 구절은 어울리지 않는데, 후자가 전자를 “약화시키고 제한시키”110)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러한 결론은 “사람과 인자”라는 두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그 두 용어를 비교한 것에 기초한 것이다. 하지만 그 두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집중한다면 생각의 맥락은 분명해진다. 사람과 관련해서, 안식일은 그를 위하여 있는(εγένετο)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인자와 관련해서, 그는 안식일의 주인(κύριος)으로 나타난다. “이러므로”(ώστε)라는 추론은 그가 그 날을 인간의 유익을 위해 만들었기(27절) 때문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28절)라는 사실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사실상 헬라어 구문에서 강조는 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처음에 위치한 “주인”이라는 술부에 있다. 그것의 문자적인 영역은 “그러므로 주인은 안식일에도 인자가 된다”(therefore Lord is the Son of man also of the Sabbath)로 되어 있다.111)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심은 안식일이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이 전의 선언에 근거하고 있다. (69.1)
 인간의 유익을 위해 안식일이 제정되었다는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그날의 주인이 되심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 답은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을 창조했으며, 그의 복리를 보장하기 위해 안식일을 제정했다고 당연히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결국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심은 사람 그 자체에 관련된 그분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69.2)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그 두 구절들은 논리적으로 일치하며, 후자는 전자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몇몇 성서 주석가들은 이 두 구절에 대한 이러한 논리적인 의존 관계를 인정한다. 예를 들어 헨리 바클레이 스웨테(Henry Barclay Swete)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마가복음에서 사상의 일치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인간의 유익을 위해 만들어진 안식일은 그것을 소유하신 이상적인 인간이시며, 전형이신 분의 지배를 받는다.”112) 이와 유사하게 조셉 허비(Joshep Huby)도 그 두 구절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복리를 위해 만들어진 안식일은 인간의 영적 복리와 구원을 위해 무엇이 적당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판단자로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인자의 주권에 종속된다.”113)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언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안식일과 관련된 근본적인 자유”를 제공하시는 것이 아니다.114) 오히려 그것보다는 리차드 맥콘넬(Richard McConnell)이 주장한 것처럼, “그분께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인간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지를 결정하는 권위를 당신이 가지고 계심을 선언하시고 계신 것이다.” (70.1)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그의 제자들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의 변호는 상당히 긴 연설인데, 그것은 논쟁이 논쟁을 추가하듯이 단계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제자들의 무죄함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네 번째 계명의 진정한 의미(출 20:8-11)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다섯 가지의 기본 사상들이 공관복음에 기록되어져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필요 앞에선 법도 무력하다는 일반적인 원칙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다윗의 예를 언급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빵과 거룩한 시간이 예외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둘째로, 안식일 계명은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보살펴주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계획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의 일반적인 원칙으로부터 제사장들에 의해서 안식일이 예외적으로 활용되어진 특별한 사례로 옮겨간다. 그분 자신이 성전과 제사장직에 대한 더 고상한 원형 이 되시기 때문에, 제사장들처럼 그를 따르는 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불쌍한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봉사를 더욱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셋째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호세아의 진술을 인용하여, 예수께서는 안식일 준수의 우선순위는 먼저 궁핍한 사람을 돌보는 사랑의 봉사를 하는 것이고, 그 후 의식적 규례들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넷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의 복리를 보장해주기 위해서 제정되었기 때문에 안식일 계명 때문에 인간의 필요를 부인하는 것은 그 본래의 목적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근본 원칙을 재차 단언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함으로써 제자들의 행위와 안식일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최종적이고도 결정적으로 재가(裁可)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주권을 받아들이고 그분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일들을 하고 있는 제자들은 죄가 없었지만, 어리석은 랍비들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안식일을 존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안식일의 의도된 목적과 그 날의 주인을 거절하는 것으로 정죄되었다. (70.2)
 안식일의 주인이 되심에 대한 이와 같은 메시아적 선언에 비추어 볼때, 이후의 안식일 논쟁에 대한 서문 격으로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초청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구주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αναπαύσω)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ανάπαυσιν)을 얻으리니 이는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71.1)
 이 초대 속에서 그리스도는 두 번씩이나 당신에게로 나와서 배우고자 하는 자에게 안식을 약속하신다. 몇몇 해설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내용의 다음 구절이 “그때에—έν έκείνω τω καιρώ”(12:1)로 시작하는 것으로 봐서 이 선언은 분명히 어느 한 안식일에 이루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후의 안식일 관련 소재들과 연관되어야 한다.115) 그러므로 다니엘루(J. Danielou)가 언급한 것과 같이 예수께서 약속하신 안식이 “참 안식일의 휴식”(anapausis, rest)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116) 이 경우에 그리스도의 안식일 안식은 “쉬운 멍에”“가벼운 짐”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 사람들에게 무겁게 작용했던 랍비식의 요구들과는 상반되는 것이었을 것이다.117) 이런 모습은 사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던 자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랍비들을 언급하시면서 저들이 율법을 “멍에”로, 제자들을 목에 “멍에를 지는 자들로 언급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118) (72.1)
 무거운 법적 의무들을 수행하면서 안식을 얻고자 헛되이 수고했던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약속한 새로운 “안식일 안식”이란 과연 무엇인가? 복음서에 나타난 안식일 관련 소재들을 살펴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속의 사명에 적합한 하나의 상징으로 안식일을 만드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구원의 시간, 즉 안식일의 성취로 선포하실 뿐만 아니라(눅 4:18-19), 안식일에 자신의 구원사역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궁핍한 죄인들을 구원하셨다(요 5:17; 9:4). 이로써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영혼들이 안식일을 자유의 날로써 기억하고 경험하게 하셨다. 게다가, 그리스도가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시며 이 땅에서 자신의 구속적 사역을 완성하시는 때 역시 금요일 오후, 즉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요 19:30).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 이후 무덤에서 안식하시며 안식일을 신성하게 하셨다(눅 23:53-54; 마 27:57-60; 막 15:42, 46). 우리가 잘 알듯이 창조의 마지막에 안식일 안식은 온전하고 완벽한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을 표현 했다(창 2:2-3). 그리고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마지막에도 안식일 안식은 인간에게 회복된 온전하고 완벽한 구원에 관한 신의 기쁨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역을 보면, 안식일 안식은 구속주가 짐진 영혼들에게 주는 구원의 축복을 보여주는 완벽한 예가 되고 있다. (72.2)
 히브리서에 나타난 안식일
 앞에서 암시했듯이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는 히브리서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안식일의 안식-σαββατισμός”(4:9)이 가지는 축복의 영속성을 재확인 받았으며 그 축복들을 받아들이도록 촉구 받았다고 전한다.119) 히브리서의 저자는 안식일 준수의 축복이 유대 민족의 언약과 분명히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공유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안식일 준수는 사실상 물질적 번영과 연관이 있었는데, 이는 오직 정치적 평화의 상황에서 언약 공동체에 소속된 자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120) 그러나 히브리서의 저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견지하고 있던 안식일과 관련한 독점적이고 물질적인 견해들을 바로잡고, 안식일 준수의 보편적이고 구속적이며 영적인 속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창세기 2:2시편 95:11의 두 구약성서의 구절을 결합시켰다. 저자는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히 4:4; 참고, 창 2:2-3; 출 20:11; 31:17)라고 했던 창세기의 기록을 통해서 안식일의 기원을 추적해서 창조의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안식일 안식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안식일에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유효성을 부여한다. 아돌프 사피어(Adolph Saphir)가 제대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이 안식일”“창조 속에 드러난 궁극적인 약속인 완전한 평화와 안식의 근거이자 본질이다.”121) 시편의 경우, 저자는 “안식일 안식”의 범위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안식”(5:10, 3, 5)에 참여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는 구원의 축복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