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2장 그리스도와 주의 날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하시는(5:17) 일을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사 명과 동일시하는 것이 옳다면 필연적으로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요한복음 5:17에서는 창조에 대한 개념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 에, 앞서 살펴본 해석들, 즉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아직 이루시지 못했던 창조의 안식일 안식에 대한 언급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해석들은 모두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51.2)
 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의문점이 남는다. 즉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끊임없는 구원 활동들에 기초해 자신의 안식일 치료 행위를 옹호한 사실은 제웻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폐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그를 통해서 명백해 지지 않았는가?72)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안식일 활동들을 통해서(비록 분명치 않은 방식이기는 하지만) 안식일 준수의 종결을 선언하셨던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어겼다고 고소한(요 5:16, 18; 9:16) 유대인들과 동일한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셨던 바로 그 고소 내용 그 자체였다. 우리는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들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안식일 구원 활동들을 변호하면서 그 안식일에 예견된 인도주의적 가치에 기초해 자신을 변호하시는 그분의 특별한 방식을 이미 알게 되었다. 그러한 인도주의적 방식은 심지어는 랍비들의 안식일 준수 조항들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요한복음에서도 자신에게 부과된 안식일을 어겼다는 혐의에 대해 공식적으로 논박할 때 그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인정된 신학적인 논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논법을 고려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예수께서 모든 사례들 속에서 안식일을 범하셨음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행동의 합법성을 옹호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벨 로소(M. Veloso)가 적절하게 주장한 것처럼 예수의 “답변은 그 고소를 인정하려는 의미로 제시되기 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그것을 논박하고자 하는 의미로 제시되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안식일을 범한자로 고소하는 그들의 고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안식일에 하기에 적합한 구속의 사역을 성취하시고 계신 것이었다.”73) (52.1)
 요한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답변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 것이었는 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부분적으로 논의했던 한 사실, 즉 안식일이 창조를 통해 천지만물과 연결되어져 있고(창 2:2-3; 출 20:8-11) 출애굽을 통해 구속사업과 연결되어져 있음(신 5:15)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 모든 세속적인 활동들을 금지하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였던 것처럼,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날에 동료 이웃들에 대한 자비로운 행위를 통해 구속주 하나님을 따르게 된다. 이러한 안식일의 의미는 우리가 주목했던 바와 같이 안식일에 그 사회의 하층 계급들에게 동정적이었던 사람들의 삶 속에서 뿐만 아니라 특별히 성전의 예식 안에서도 진실이었다.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금지된 일상적인 많은 일들을 수행하 였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가정에서는 빵을 굽는 것이 금지되었지만(출 16:23) 성전에서는 여전히 그 날에도 한주일 동안 진설된 빵을 교체하기 위해서 새로운 빵을 구웠다(삼상 21:3-6). 성전을 관리하는 일과 희생제도에 관련된 모든 일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질적으로 일상적이었던 많은 활동들이 안식일에 수행되었는데, 시편 기자가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은 “예로부터 ∙∙∙ 인간에 구원을 베푸”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시 74:12). (53.1)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에 의해서도 인정된 이러한 안식일 신학에 기초해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안식일에 그가 행하신 구원의 행위가 합법적인 것이었음을 변호하셨다(요 5:17). 다시 말해 그는 안식일에 아버지께서 하신 것과 동일한 구원의 활동에 종사하신 것이고, 그것은 완전히 합법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5:19) 아버지의 사역의 특성을 설명하신다. 그 특성들에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생명을 주시며(5:21), 구원의 심판을 행하시는 것(5:22-23) 등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라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했던 유대인들에게, 그가 안식일에 아버지의 구원의 사역을 행하시는 것이라고 변호하자, 유대인들은 그분에게 두 가지의 조항의 죄 몫을 부여했다.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 라”(5:18). (53.2)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적대적인 반응에 대응하기 위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합법성을 더욱더 분명하게 해명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요한복음 7:21-23(대부분의 주석가들이 5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인식 하는 구절임)에서74) 우리는 그 논쟁의 자취를 발견한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안식일 행위에 대한 이전의 신학적 정당성을 더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할례의 예를 지혜롭게 활용하고 있다.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 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7:22-24). (54.1)
 태어난 지 팔일 째 되는 날(레 12:3)이 안식일이 될 때 그 날에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이 왜 합법적인 것이 되었는가?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는데, 그것은 이미 그 합법성이 잘 이해된 사항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할례는 그 언약의 구조수단을 중재한 구속적 행위로 간주되었다.75) 그러므로 전신을 구원하기 위해 안식일에 신체의 248개 부분(유대인들의 계산에 따른 것임)76) 중 하나를 절단하는 것은 합법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전제에 기초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회복시킨 자신의 행위에 ”화를 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7:23).77) (54.2)
 이 실례는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신다는 진술을 명확하게 하고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 사례에서 구원의 사역이 하늘의 아버지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제사장들과 같은 그분의 대리자들에 의해서 안식일에 성취되어지고 있음을 제안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전인의 구속을 위해 일하는 날로 이해된 것이다. 사실상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치료사건 속에서 나타나듯이 이후의 안식일에 고침을 받은 사람들을 찾아갔으며, 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영적인 필요까지 보살펴준다(요 5:14; 9:35-38). 그의 대적자들은 그리스도의 안식일 봉사에 나타난 구속적인 특성을 인식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외모로 판단 하기 때문이었다(7:24). 그들은 중풍병자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간 위법 행위를 자신들이 표방했던 육체적인 회복과 사회적 재통합보다 더 중대한 것으로 여겼다(5:10-11), 그들은 안식일에 진흙을 혼합한 행위를 소경의 마음에 빛을 회복시켜 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9:14, 15, 26).78) (55.1)
 그러므로 랍비들의 규율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도발적인 침해 사례들(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게 한다든지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준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사례들)은 안식일 계명을 무효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날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 었다. 라그랑게(M. J. Lagrange)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설명한다. (55.2)
그리스도는 율법의 정신에 대립되는 것과 조화되는 것 사이를 주의 깊게 구별 지었다. ∙∙∙ 예수는 아버지와 같이 일하였으며, 만일에 아버지께서 하신 일들이 성경에 규정된 그 안식에 결코 대립된 것이 아니었다면 안식일에 그 아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활동들은 그 제도의 정신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79)
(56.1)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요 5:17)고 그리스도께 서 말씀하실 때 그분께서 언급하신 아버지의 일들은 요한에 의해 이미 완성된 것으로 여긴 창조의 사역들이 아니라 구속의 사역들이었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를 완성하셨을 때에 쉬셨다. 하지만 죄 때문에 그분께서는 그것을 완전히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이제까지 일 하시”고 계신다. 아버지께서 끊임없이 종사하고 계시는 이 구속사역들은 안식일 계명에 의해서 예기되고 허락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가 병자를 회복시키셨을 때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가 아니라고 부인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가 아버지께서 하신 것과 같은 바로 그 구원의 사명을 이행하고 계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한복음 9:4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하기 위한 그 동일한 초청을 그의 제자들에게까지 분명히 확대하고 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9:4). (56.2)
 어떤 학자들은 “밤”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하는 데,80) 그 죽으심으로 일요일 준수로 기념된 부활에 의해 하나님의 참 된 안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의도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리스도께 십자가의 “밤”이 매우 가까이 이르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용어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에만 적용된다고 말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데 그 이유는 그 “밤”이라는 표현이 “아무도(ουδείς) 일할 수 없는(9:4)시간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신적, 인간적 구속의 활동이 중지되는 것으로 여겨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 용어가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초대가 더 이상 베풀어 지지 않을 때인 구속사의 끝을 언급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당신께서 하신 구호봉사를 옹호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들인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신다(5:17)는 표현과 “때가 아직 낮이매 ∙∙∙ 우리가(일)하여야 하리라”(9:4)는 표현은 안식일에 대한 구세주의 이해를 잘 요약해 주는데, 즉 그 시간은 받은 구원을 다른 사람과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끊임없는 구원을 경험하기 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81) (56.3)
 밀 이삭을 자름
 안식일의 구속적 기능은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었던 사례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막 2:23-28; 마 12:1-8; 눅 6:1-5). 이 사건에서 하나의 논쟁이 그리스도와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행동의 책임을 예수께 돌렸다. 어떤 학자들은 “제자들이 길을 열며(οδόν ποιειν) 이삭을 자르니”(2:23)라는 마가의 표현을 그리스도를 위해 밀밭을 통과하는 길을 만들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분노는 많은 양의 곡식이 잘려져 나갔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길을 열며”(οδόν ποιειν)라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취한다면 그런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 문맥에 비추어볼 때 이 경우는 거의 그것을 정당한 해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만일에 제자들의 의도가 그들의 주인이 밀밭을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내는 것이었다면,82) 그들은 손으로 밀 이삭을 자르는 대신에 짓밟거나 아니면 낫으로 밀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더욱이 제자들이 실제로 밀밭을 통과할 길을 내고자 했다면 그들은 단지 안식일을 범한 것뿐만 아니라 개인의 재산을 침해하고 파괴하고 훔친 것으로도 고소를 당했어야 했다. 따라서 밀 이삭을 자른 것은 자신들의 주인을 위해 “길을 내기 위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개역표준역(RSV)에서 번역한 것처럼 밀밭을 지나갔던 경로를 따라서 “그들의 길을 가고 있을 때”(막 2:23) 발생한 것이었다.83) (57.1)
 하지만 랍비들의 견해에 따르면 제자들은 그 행위로 몇 가지 조항을 위반하였다. 곡식의 이삭을 잘랐으므로 그들은 추수하는 죄를 범하였고, 손으로 그 이삭들을 비볐기 때문에 탈곡하는 죄를 범하였다. 껍데기와 곡식을 분리하였으므로 그들은 키질하는 죄를 범하였고, 그 모든 절차로 인해 안식일에 음식을 준비하는 죄를 범하였다.84) 따라서 그들의 행동을 철저하게 안식일을 모독한 행위로 여긴 바리새인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예수께 불평을 하였다.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막 2:24). (58.1)
 우리는 먼저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이삭의 생 곡식을 먹으므로 자신들의 배고픔을 만족시키려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어디에서 안식일을 보냈는지도 알고 싶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저들의 여행 거리를 문제 삼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들은 안식일에 허락된 여행 거리인 약 3분의 2마일 이상을 걷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85) 본문에는 그들의 행선지에 대한 힌트가 제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안식일에 그들 사이에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회당에서 예배에 참석했었으며, 만찬에 초대받지 못해 쉴 장소를 찾기 위해 밀밭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을 가능성을 말해 준다. 만일에 그런 경우였다면, 특별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12:7)는 인용문으로 바리새인들에게 응답한 그리스도의 답변은 안식일에 환대를 베푸는 것을 소홀히 한 저들에 대한 숨겨진 책망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안식일 음식을 준비하는 것 중에 중요한 하나의 규례는 예상치 못한 방문객들을 위한 계획을 실제적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히쉬(R. G. Hirsch)가 잘 진술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의 비난에 대해 또 다른 비난으로 응수하신다. 제자들의 행위에는 변명의 이유가 있었지만, 안식일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소홀히 한 바리새인들의 행위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86) (58.2)
 제자들의 행동에 대한 동기(마가복음에서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옹호하는 그리스도의 변호 내용에 함축되어 있음)는 마태에 의해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마태는 “제자들이 시장하여”(마 12:1)라고 기록한다. 제자들의 배고픔에 대한 마태의 언급이 저들의 안식일 위반을 정당화시켜주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로르도르프(W. Rordorf)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든다.

   (1) 그것은 “전날에 모든 사람들이 한 것처럼 자신들의 음식을 준비하지 못하므로” 그들의 본분을 소홀히 한 것을 의미한다.

   (2) “만일에 그들이 그들의 선교사업을 수행하느라 안식일 시간 전에 음식을 준비할 수 없었다면, 그들은 그 날에 금식했어야 했다.”

   (3) 제자들은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생명의 위험에 처해진 것”이 아니었다.87) 저자는 노련한 랍비로서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마태가 제자들의 행위를 정당화한 것은 안식일에 대한 랍비적 관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관점에 기초한 것임을 그 저자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마태에 의해 기록된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례들은 안식일을 인간의 필요를 넘어선 제도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봉사(12:12)와 “자비”(12:7)의 시간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제자들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안식일에 행한 행위는 합법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88) (59.1)
 이 사건에서 그를 대적하는 자들의 비평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신 다양한 논쟁들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안식일에 대한 그분의 견해를 좀 더 잘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들 외에는 먹지 못하도록 금지된 진설병을 먹으므로 저들의 허기진 배를 만족시켰던 다윗과 그 함께한 자들의 이야기를 바리새인들에게 상기시켜 주었다(삼상 21:1-7). 이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분명하다. 만일에 다윗이 거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성별한 빵을 먹으므로 허기진 배를 채운 것이 옳은 것이었다면, 제자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안식일의 거룩한 시간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 역시 합법적인 것이었다.89) 이 두 사례에서 거룩한 빵과 거룩한 시간은 특별히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모든 율법의 이면적인 목적은 생명을 취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 생명을 안전하게 보장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 그것들의 사용은 정당화된다. 그러므로 그 예외조항은 계명의 유효성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확증하는 것이다.90) (60.1)
 다윗의 경우와 그리스도의 경우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그 논쟁을 더 설득력 있게 해 준다. 다윗의 추종자들은 군사들이었(삼상 22:2)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평화적인 사람들이었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다윗은 밀이삭과 비교해 훨씬 더 중한 율법인 금지된 진설병을 먹었다. 사실 굶주린 다윗은 특별한 하나님의 규칙을 파기하였다(레 24:5; 요세푸스, Antiguities, 3, 10, 7). 반면에 배고픈 제자들은 단순히 랍비들의 개념을 파기한 것이었다. 무수히 셀 수 없는 세대들에 의해 승인된 한 예외 조항에 호소하므로(“읽지 못하였느냐” 막 2:25)91),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의 죄 없음(마 12:7)을 논증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으로부터 중요치 않은 것으로(a majori ad minus) 논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다윗과 같이 그의 제자들은 필연성이라는 더 고상한 율법에 순종했었기 때문이었다.92) 하지만 주목할 점은 그리스도께서는 더 자유주의적인 궤변을 끌어들여서 법령에 대한 위법 행위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모든 형태의 궤변은 사람을 예속시킨다고 그는 보았다.)93)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윗의 행위는 “옳지 않는”것이었다고 그리스도는 명확하게 진술한다(막 2:26). 제자들 또한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 완전한 휴식에 대한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그는 넌지시 비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사례에서 그들은 결백하였는데 그 이유는 더 큰 의무조항이 그보다 작은 의무 조항들을 무효화시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비가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60.2)
 이 개념은 마태복음에서 더 정교하게 다듬어지는데, 그리스도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 많은 비합법적인 활동들을 성전에서 수행하므로 “안식일을 범하”(12:5)지만 죄가 되지 않는(12:5) 제사장들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사실상 안식일에 성전에서는 곱절이나 되는 제물들로 인해 할 일이 증가되었다(민 28:9-10).94) 안식일이 되면 더 열심히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에게 “죄가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이미 주목했듯이 그 답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제공하기 위해 고안된 안식일 사역의 구속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본질적으로는 그 계명에 의해 분명히 정죄되는 활동들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이 죄가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백성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안식일의 목적을 충족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그 날에 하나님의 제사 규례를 이행하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제사장들에 의해 수행된 봉사를 예를 들어 그의 제자들과 자신의 행위를 옹호할 수 있었는가? 그 답은 계속된 그리스도의 진술 속에서 발견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95) 성전과 그 봉사의 상징적 기능은 이제 성취되었고 진정한 대제사장의 봉사로 대체되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정말이지 되도록이면 안식일에 그리스도 역시 그의 “희생제사,” 즉 불쌍한 죄인들을 위한 그의 구호봉사를 더 증강하셔야 했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의 추종자들, 즉 새로운 제사장들에게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하셔야 한다. 요한복음 7:22-23에서 그리스도께서 이와 동일한 개념을 표현하신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할례의 구속적 행위로 말미암아 새로 탄생한 자들에게 언약의 축복을 베풀어주었듯이, 그리스도께서도 안식일에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일하셔야만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안식일 신학을 설명하기 위한 정당한 준거틀(frame of reference)을 성전과 그 봉사에서 발견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의 구속적 기능은 그의 메시아적 사명과 안식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에 대한 가장 좋은 예가 되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구원하시는 사업과 안식일 목적을 동일시하므로 그 계명이 가지는 궁극적인 신의 목적, 즉 하나님과 인간과의 친교를 드러내신다.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과거 창조를 기념하는 시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살펴주므로 구원의 축복을 경험하는 시간이 된다. (61.1)
 불행하게도 안식일의 인도주의적 차원은 그리스도의 시대에 거의 잊혀졌다. 율법적 의식에 대한 요구가 인간의 필요를 돌보아주어야 할 요구를 대체했다. 마태에 의해 기록된 진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곡해된 안식일을 다음과 같이 공공연하게 공격하였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제자들은 비록 철저하게 쉬어야 하는 안식일 법규를 어겼지만 그 계명의 진정한 의미가 “제사가 아니라 자비”이기 때문에 “무죄”하였다. “자비”“제사”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 단어들이 인용된 책인 호세아서에서 선지자 호세아는 마치 하나님의 진노가 많은 값비싼 희생 제물들에 의해 달래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5:6) 간 백성들을 꾸짖는다(삼상 15:22 비교), 선지자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인애(mercy, 자비)”라는 것을 상기시킨다(6:6). 불트만(R. Bultmann)이 주석했듯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이 자비는 “도움을 주는 행위”에서 나타나는 애매한 “성벽”이 아니라 확고한 태도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라고 신구약성서는 설명한다.96) 특별히 마태복음에서 “자비”는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지불해야할 의무가 있는 원조와 구제의 행위를 나타낸다(마 5:7; 9:13; 12:7; 23:23). 악테마이어(I. R. Achtemeier)가 잘 표현해 주고 있듯이, “서기관이 되었든, 바리새인이 되었든, 세리가 되었든, 죄인이 되었든 어떤 사람일지라도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사랑과 도움과 위로를 주어야 한다.”97)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동정과 위로를 베푸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는 부족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괴롭힌 배고픔이 그들의 심령 속에 그 어떤 동정적인 감정이나 도움을 베풀고자하는 열망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제자들을 정죄하였다. (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