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2장 그리스도와 주의 날
 이처럼 하찮은 존재들에게 관심과 동정을 베풂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로 제정된 안시일의 본질적인 중요성이 예수의 시대에는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안식일에 인간의 필요에 대한 요청에 반응하기 보다는 그 날을 의식적으로 잘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우리는 두 종류의 안식일 준수자들을 대조함으로써 이 전반적인 곡해에 대한 하나의 적절한 실례를 제공하게 된다. 한 편은 그를 박해하는 자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시고 한편 손 마른 사람의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 나서는 그리스도의 편에 선 사람들이다(막 3:4-5). 다른 편은 심지어는 예배 장소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안식일 시간에 결점을 찾아 예수를 죽일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율법 전문가들의 편에 선 사람들이다(막 3:2, 6). 이러한 상반된 태도는 안식일에 사람을 구하거나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합법적인 지에 대해 물은 예수의 질문에 대한 설명을 잘 제공해 주는데, 그것은 다시 말해서 안식일에 다른 사람의 육체적, 영적 구원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파괴적인 노력과 자세를 갖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47) (41.1)
 안식일을 개혁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계획은 율법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태도의 전후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48) 산상설교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사명이 율법의 다양한 규범들을 그것들의 원래의 의도대로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마 5:17, 21과 그 이하의 절들), 계명 들의 이면 속에 있는 의미들을 분명하게 하는 이 작업은 긴박하게 필요로 되었는데, 그것은 많은 조항들에서 축적된 인간의 전통으로 인해 그 본래적 기능이 불명료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막 7:9)라고 지적 했다. 예를 들어 “네 아비나 어미를 공경하라”고 명령한 다섯 번째 계명은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에 따르면 고르반(Corban)이라는 전통에 따라서 무효화되었다는 것이다(막 7:12, 13). 이것은 자신의 부모에게 제공되어야 할 봉사나 의무를 성전에 드리는 예물로 바꾸는 것으로 분명하게 존재하였다. (41.2)
 안식일 계명도 예외가 아니어서 만일에 많은 무의미한 궤변적 제한 사항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창조자요 구속자이신 분에 대한 사랑과 이웃들에 대한 사랑의 시간이 되기보다는 자기의 의를 위한 제도로 남아버리게 되고 마는 것이다. (42.1)
 불구가 된 여인
 그리스도의 안식일 개혁의 목적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특별한 치료 사건들을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불구가 된 여인에 대한 치료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회당에서 행하신 마지막 행위였다. 유대 관헌들의 틀에 박힌 반대는 예수께서 회당에서 그의 안식일 봉사를 계속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편 손 마른 사람을 치료한 이전의 사건과 비교할 때 이 사건은 상당히 진보된 면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간청하지도 않은 여인에게 병으로부터 “놓였다”고 선언(13:12)하시므로 자동적인 행동에 옮기시는 보다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셨고, 회당의 지도자들을 공식적으로 꾸짖(13:15)으시는 그의 꾸지람에서 보다 더 진보적 내용을 보여 주셨다. 유대 관헌들(이 경우에는 회당장)은 또한 안식일에 치료를 받기를 간구하는 모든 회중들을 공공연하게 정죄함으로써 회당 밖에서뿐만 아니라 이제는 회당 내에서도 이의를 제기한다(13:14). 마침내 안식일의 구속적 기능은 보다 명확하게 표현되어진다. “놓이다”(λύειν)라는 동사는 이제 안식일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 동사가 그리스도에 의해 우연히 사용되었다고 믿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영어 개정표준성서(RSV) 번역본에서 그것이 각각 서로 다른 유의어인 “놓이다”(to free), “풀어내다”(to unite), “풀다”(to loose)로 번역되었지만(13:12, 15, 16), 그 짧은 진술 안에서 이 동사는 3번씩이나 나타나기 때문이다. (42.2)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을 건넬 때 그 단어를 처음 사용한다. “네가 병에서 놓였다”(12절), 18년 동안 “꼬부라져 있던(11절) 그 여자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자마자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3절), 회장당의 반응은 안식일에 대해 일반적으로 곡해하는 측과 안식일을 진정한 의미를 가진 날로 회복시키려는 노력하는 그리스도 측 사이의 현저한 차이를 명확하게 해준다. 회당장은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라고 공표한다(14절). 안식일을 이해할 때 사랑을 베풀 사람보다는 순종해야할 규칙들로 이해하였던 유대 관원들에게 있어서 치료 행위는 안식일에 하기에는 부적절한 노동이 었다. 전인적 회복에 관심을 가진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이 구속적 행위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안식일보다 더 좋은 날은 없었다. (43.1)
 이러한 안식일의 구속적 기능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놓이다”(to free)라는 동사를 두 번 더 사용하고 있다. 한 번은 랍비들이 용인하고 있는 내용을 언급하면서 사용한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13:15), 안식일에 짐승에게 물을 먹이는 것은 구덩이에서 양을 구조하는 것(마 12:11)과 마찬가지로 응급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어떤 짐승들은 물을 먹지 않으면 무게가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상품 가치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하루 정도는 생존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왜곡된 가치관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즉 안식일에 동물을 방치 함으로써 파생된 재정적 손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재정적 답례를 얻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는 것 보다 더 중요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그리스도의 말씀을 너무 지나치게 해석하는 것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께서 분명하게 하고자 한 것은 안식일에 제공되는 기본적인 봉사가 심지어는 동물들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이다. (43.2)
 동물을 풀어 놓는 것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면서 그리스도는 결론을 내리기 위한 수사학적인 질문의 형태 속에서 다시 그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면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13:16) 중요치 않은 것으로부터 중요한 것으로 이끌고 가는 논법(a minori ad maius)으로, 그리스도는 안식일이 어떻게 역설적으로 왜곡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소나 나귀는 안식일에도 구유에서 풀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고통 중에 있는 여인은 그 날에 그녀의 육체적 영적 질병에서부터 풀려날 수 없었다. 이 얼마나 왜곡된 안식일인가! 그래서 그리스도는 안식일을 하나님의 의도하신 목적대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규범적인 전통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이것과 다른 모든 실례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 계명의 속박된 의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거의 잊혀져버린 그 날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이다. (44.1)
 사단에게 매인바 된 한 희생자를 안식일에 해방시키시는 그리스도(13:16)를 명상하면 자신의 사명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한 그분의 예고를 상기시킨다(눅 4:18; 사 61:1-3 비교). 그러므로 안식일에 아브라함의 딸을 사단의 속박에서부터 해방시키신 것은 그 날의 메시아적 표상의 성취를 나타낸다. 폴 제렛(Paul K. Jewett)은 이 점에서 통찰력 있는 해석을 제시한다. (44.2)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행위 안에서 우리는 사랑과 동정과 자비의 행위뿐만 아니라 참된 ‘안식일의 행위’를 소유한다. 그 행위를 통해 구약성서의 안식일 안식의 성취인 메시아적 안식일이 우리의 세상에서 파괴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모든 날 중에서 안식일은 치료를 위해 가장 적합한 날이다.49)
(45.1)
 그리스도께서 구약성서의 안식일 표상(유월절과 같이 그것과 관련된 제도의 경우에서처럼)을 이렇게 성취하신 것이 제웻에 의해 잘못 제안 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첫째 날에 모임을 갖기 위해 안식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50) 그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의 구속적 표상을 성취함으로 안식일을 그 실체, 즉 그의 구속적 사명에 영원히 어울리는 기념일로 만들었다.51)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중재에 대하여 증인이 된 그 여인과 다른 사람들이 안식일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누가는 기록하기를, 주께서 안식일에 구원하는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 한 반면에 “온 무리는 ∙∙∙ 기뻐” 했고(13:17), 그 여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3:13). 의심할 것 없이 안식일에 그리스도의 봉사로 말미암아 축복을 경험한 그 여자와 무리들에게는 그 날이 그들의 몸과 영혼을 치료받고 사단의 속박으로부터 구세주의 자유 안으로 탈출한 기념일이 되었다. (45.2)
 중풍병자와 소경
 안식일과 구원의 사역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요한 복음에 기록된 두 개의 안식일 기적 사건에서도 잘 나타난다(요 5:1-18; 9:1-41). 그 두 사건은 다소 유사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함께 고찰하려고 한다. 그 두 개의 사건들은 몇 가지 면에서 닮은 점들이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둘 다 만성질환자였다. 한 사람은 38년 된 병자였고(5:5), 다른 한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였다(9:2). 이 두 사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행동하도록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고(5:8), 소경에게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9:7). 이 두 경우에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라고 정식으로 그리스도를 고소했으며, 이것으로 그가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하고자 했다.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9:16; 5:18 비교). 이 두 상황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고소 내용은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실 제적인 행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랍비들의 안식일 규례들을 어긴 것에 있었다. 예를 들자면 무기력한 환자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명령한 것(5:8, 10, 12)이나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준 것(9:6, 14) 등에 대한 고소였다.52) 이 두 사례에서 그리스도는 안식일을 범했다는 비난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구속 사역들은 안식일 계명에 의해 배제된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계명에 의해 기대된 것들이라고 주장했다.(5:17; 7:23; 9:4). (46.1)
 안식일에 병 고치는 행위들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주장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답변을 소개하면서, 그 답변에서 요한이 사용한 “이르셨다”(answered, απεχρίνατο)라는 동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구절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에서 마리오 벨로소(Mario Veloso)는 이 동사의 형태가 요한복음에 오직 두 번 나타난다고 기록한다.53) 첫 번째 기록은 유대인들의 기소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응답하실 때(5:17) 나타나며, 두 번째 기록은 주어진 그 응답을 설명할 때 나타난다(5:19). 요한이 약 50여 차례에 걸쳐 사용한 일반적인 형태는 “απεχρίθη” 인데, 영어 성경에서 이 단어 역시 “이르셨다”(answered) 로 번역된다. 그 동사의 중간태인 “απεχρίνατο”를 특별히 사용한 것은 한편으로는 벨로소가 설명하는 것처럼 공적인 답변을 의미하는 것이고,54) 다른 한 편으로는 물톤(J. H. Moulton)이 표현하는 것처럼 “동인(動因)이 행위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55)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공식적으로 답변을 하셨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또한 스스로를 그 응답의 요지와 동일하게 여기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답변하신 몇 마디의 말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 (46.2)
 안식일을 어겼다고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공식적으로 변호하시면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한 것이었는가? 이 진술은 꽤 많이 연구 조사되어 왔으며 여러 광범위한 결론들이 제출되었다. 다니엘루(J.. Danielou)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 안식일 안식을 하나님께 적용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그 태도를 정죄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것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의 상징이 가지는 본질적인 실체로 이해 된다.”56) 로르도르프(W. Rordorf)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요한복음 5:17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실 때부터 결코 쉬지 않으셨으며 그분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쉬지 않으시고 계시지만 마지막 날에는 쉬실 것이라는 점에서 창세기 2:2 이하를 해석하는 것으로 이해된다.”57) 평행절인 요한복음 9:4에 비추어서 그는 추측하기를 “하나님의 약속된 안식일 안식은 ∙∙∙ 무덤에서 예수께서 쉬심으로 이행되었다”고 했다.58) 그래서 결론을 내리기를 “예수는 창세기 2:2 이하의 내용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매 주 안식일에 쉬라는 그 명령을 스스로 폐지하”셨다는 것이다.59) 폴 제웻(Paul K. Jewett)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라는 표현을 구속사에 있어서 “약속으로부터 성취로”의 이행, 다시 말해서 구약의 안식일 안식의 약속으로부터 부활의 날에 확립된 그 약속의 성취로의 이행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 오스카르 쿨만(Oscar Cullmann)의 해석을 다시 제안한다. 60) 그 논증은 쿨만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안식이 첫 창조의 마지막 날에 성취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부활 때에 처음으로 성취되었다”는 견해를 조건으로 한다.61) 그래서 부활의 날로서 일요일은 구약성서의 안식일에 약속된 하나님의 안식의 성취와 정점으로 나타나게 된다. (47.1)
 이와 같은 해석이 유효한 것인지를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έως άρτι”라는 표현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그 후 안식일 일요일 논의에 나타난 그 관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5:17)시는 것을 창세기 2:2 이하에 언급된 창조의 사역에 관계된 것으로 보고자 하는 견해에는 광범위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62) 이렇게 해석하게 된 이면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지금까지 해 오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창조의 안식일 안식을 여전히 경험하지 않으셨으며, 이 안식이 실체가 되는 모든 것이 종말적으로 회복되는 때에 비로소 그 시간이 이르러오게 될 것임을 설명하고자 함이다. 하지만 제웻이 말하는 것처럼 부활에 의해 “그 궁극적 안식일의 전조와 기대가” 성취된 일요일이 안식일을 대신해 이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경축되어지고 있는가?63) (48.1)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저들은 헬라화된 유대인 사상가 필로(Philo)의 해석적 범주들을 차용하였는데, 필로는 하나님의 휴식이 지나치게 의인화되는 견해를 피하기 위해 창조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상을 지지하였다. 그는 “하나님은 활동을 결코 멈추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 불의 속성인 것처럼 창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다”라고 기록한다.64) 하지만 필로는 하나님의 안식과 더불어 완성된 유한한 사물들의 창조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신적 사물들의 창조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한다.65) 그 후(서기 약 100-130년경)에 가말리엘 2세(Gamaliel II), 죠수아 벤 차나니아(Joshua ben Chananiah), 엘리에젤 벤 아자리아(Eliezer ben Azariah), 아퀴바(Aqiba) 등의 랍비들은 로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활동을 계속하고 계신다고 선언했다.66) (49.1)
 하지만 헬라화된 유대 사상에서 나타나는 이 계속적인 신적 창조의 개념은 요한복음의 가르침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요한은 성경의 다른 모든 책들의 견해와 일치하게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이 “태초”(1:1)로 알려진 과거의 한 시간에 완성되었음을 가르친다. 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the Word, 1:1)을 통하여 “만물이 ∙∙∙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었다(1:3). “태초에”(αρκή)라는 표현과 그 동사의 부정과거형인 “εγενετο-만들어지다. 혹은 생기다”라는 단어는 모두 창조의 사역이 먼 과거에 마쳐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매우 명확하게 지적해준다. 게다가 요한복음 5:17에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수행된 일들과 동일시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것이 창조의 사역을 언급하고 있을 가능성이 도저히 없음을 보여주는데, 그 이유는 그 때 그리스도께서는 창조 사역에 종사하고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67) 아버지의 일과 아들의 일 사이를 차별화시키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는 두 분 사이의 절대적인 연합을 파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49.2)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 표현이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가 아니라 구속의 행위를 언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암시해 주는 것들이 있다. 구약성서는 하나의 설명적인 선례를 제공해 준다. 버트람(G. Bertram)이 이해한 것처럼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활동은 이스라엘과 그 민족의 역사적 전 과정에 걸쳐 본질적으로 나타난다.”68) 벨로소(M. Veloso)는 다음과 같이 잘 인지했다. “그것은 역사를 인간 행위의 단순한 계승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69)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들은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봉사와 반복적으로 동일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5:36)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봉사 사업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역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또한 명백하게 진술되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6:29). 그리고 또 다시 “만일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10:37, 38; 14; 11; 15:24 비교).70) (50.1)
 이 성경절들은 요한복음 5:17에 언급된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하시는 사역”의 구속적 특성과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과 평행구절인 요한복음 9:4과 간단히 비교해 보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의문들을 제거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가 없느니라”(9:4)고 말씀하신다. 그 두 성경 구절 사이에 존재하는 현저한 유사성은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그 문맥 속에서도 나타난다. 그 두 사례들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적들로부터 쏟아진 안식일을 어겼다는 비난으로 부터 그의 안식일 사역을 변호한다. 하지만 요한복음 9:3-4에서 하나님의 사역의 구속적 특성은 너무나도 분명히 나타난다. 아버지는 그의 사역을 하도록 아들을 보내신 자“로서 묘사되며 이로써 그리스도의 활동이 대사적 성격을 함축하고 있음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소경을 고치신 바로 그 치료행위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9:3)임이 분명한 것으로 묘사 된다. 이러한 증거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 즉 요한복음 5:17에서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하시는 일은 그 어떤 안식일 준수도 폐기할 수 있는 중단되지 않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완성시키신 구속 사역을 언급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도나티엔 몰랏(Donatien Mollat)의 잘 선택한 표현을 사용한다면, “조건부로 말해서, 하나의 ‘하나님의 일’이 있는데 그것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에서 행하는 아들의 사명이다.”71) (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