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2장 그리스도와 주의 날
 프리드만은 또한 “안식일이 도래할 세상(즉 메시아 시대)의 삶을 예기하는 것이고, 그 삶을 미리 맛보는 것이며, 그 삶의 패러다임이” 라고 가르치는 랍비적 진술들을 유익한 사례들로 제공한다.21) 안식일에 대한 다소 유사한 해석이 후기 유대묵시문학에서 발견되어지는데, 그곳에서 세상의 존속 기간은 각각 1,000년을 나타내는 “우주적 주간”의 여섯 시대로 계산되며, 그 마지막 천년의 때는 안식일로 이어진다. 이 종말적 안식일은 압도적으로 많은 구절들에서 명백하게 회복된 낙원에 선행하거나 아니면 그것과 동일시 된 메시아의 날로 여겨진다.22) (30.3)
 히브리서 3장4장에 나타난 안식일 안식의 주제는 구약성서로부터 넘겨받은 메시아적 표상의 또 다른 한 단초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G. von Rad)는 영적이고 “완전히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시 95:11 참고)기 위한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평화의 개념(신 12:9; 25:19)으로부터 구약성서에서 “안식”에 대한 주제가 발전하는 것에 주목한다.23) 후에 살펴볼 것이지만, 이 개념은 히브리서에서 다시 제안되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앙”으로 하나님의 “복음”(4:1-2)을 믿고(4:3), 순종하며(4:6, 11), 받아들임으로 “안식일 안식”(4:9)에 들어오도록 초청되었다. 저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이해된 안식일 안식의 현세적 개념(신 12:9; 25:19)을 거절하는데,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4:8) 그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 이래로 그의 백성들에게 유효하게 하신(4:3, 4, 10) “안식일 안식”(4:9)이 아니라고 그가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 안식은 “오늘날”(4:7) 구원의 “복음”(4:2, 6)을 받아들임으로써 경험될 수 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사건에 대한 암시가 분명하다. 그분 안에서 구약성서의 안식일 안식에 대한 성취가 나타나며, 그분을 통하여 그것이 오늘날 믿는 자들에 의해 경험될 수 있다.24) (31.1)
 이 간결한 조사는 구약성서의 안식일에 메시아를 암시하고 있는 표상들이 존재함을 충분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그리스도께서 그의 취임 설교에서 안식일의 구속적 기능이 이행되었음을 주장한 것은 부가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자신을 안식일과 동일시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메시아 되심을 단언하셨다. 후에 제시될 것이지만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안식일 봉사를 통하여 그의 메시아적 사명을 나타내신 이유를 설명해 준다.25) 일례로,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연합된 고소는 이러한 사실을 잘 이해하도록 해 주는 증거가 된다.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진행되었던 실제 재판에서는 그분을 고소하는 내용으로 안식일을 범한 것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로르도르프(W. Rordorf)가 잘 묘사한 것처럼 “그의 대적들은 분명하게 안식일을 위반한 사건에서 조차 암시되어 있던 메시아적 주장에만 우선적으로 전력을 기울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26) (31.2)
 안식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
 예수께서 안식일에 본질적으로 들어 있는 메시아적 기대가 성취되었음을 스스로 주장한 사실은 매우 중요한 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즉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실제적인 준수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셨는가? 그분께서는 안식일 제도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시인하셨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 준수의 의무가 그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참 안식일로 대치된 것으로 여기셨는가? (32.1)
 어떤 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대해 논쟁하시고 그 날에 병을 고치신 행위들이 안식일 계명들이 더 이상 구속력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의도하신 계획적인 도발 행위들이었다고 해석한다. (32.2)
 예를 들어 다니에루(J. Danielou)는 주장하기를, 예수의 치료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상징적인 안식일(즉, 토요일)을 대신하는 진정한 안식일(즉, 일요일)을 개시하셨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27) 이와 동일한 확신 속에서 로르도르프(W. Rordorf)도 다음과 같이 이 사상을 더욱 더 강조하여 표현한다. “예수의 치료 행위로 인해 안식일 계명이 단지 그 경험 속으로 흡수되어버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폐지되었다.”28) (32.3)
 초기 교부들의 해석. 불행하게도 위의 이러한 결론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안식일 행위나 안식일에 대한 가르침에 기초한 분석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서의 안식일 자료에 대한 초기 교부들의 해석과 조명에 따른 것이었다. 교부들의 해석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이자 유산으로 전해져 지금도 여전히 전승되고 있다. 사실상 2세기 이후부터 교회 교부들은 복음서에 언급된 “안식일의 위반 사례들”에 대한 목록들을 기록했다. 안식일에 반대하기 위한 강력한 사례들을 제시하기 위하여 그 새로운 목록들을 계속해서 추가했다. 그들은 복음서로부터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언급한 “안식일 파기”와 관련된 주장을 실례로 다루었다. 안식일에 금지된 진설병을 먹은 다윗(마 12:3; 삼상 21:1-7 비교),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고(요 7:23) 희생 제사를 드린(마 12:5)29) 제사장들, 안식일에 그분의 사역을 중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요 5:17) 등이 그러한 실례들이다. 30) 이 목록은 “여리고 성벽 주위를 돌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여 안식일을 파기한 여호수아의 경우나31) 안식일에 싸운 마카베가의 사람들의 경우,32) 그리고 아마도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모세 이전에 살았던 부조들과 의인들의 경우 등과 같은 다른 “증거들”과 함께 더 보강된다.33) (33.1)
 인정할 수는 없지만, 만일에 이러한 논쟁들이 건전한 성서 해석에 기초한 주장들이라고 추정한다면, 이러한 예외적인 내용들은 안식일 계명이 구속력을 갖지 않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리스도의 안식일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향한 그분의 태도가 무엇이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복음서에 나타난 안식일 자료를 다루는 초기 교부들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역시 안식일과 전 유대교의 규례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한 부정적이고 상반된 설명들에 시종일관 동의해야만 하지 않는가? 예를 들어 “문자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목적이 아니었다”든지34) 유대인들은 “모세가 그것을 받자마자 완전히” 그 언약을 잃어버렸다(4:7)는 바르나바스(Barnabas)의 주장, 로마인들의 눈에 유대인들을 벌주기 위해 뽑아 낸 것이라는 오명의 낙인이 찍혀진 안식일을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강요했다는 유스티누스(Justin)의 주장,35) 안식일은 비탄의 시간으로 유대인들에게 강요되었었다는 시리아의 디다스칼리아(Didascalia)의 개념,36) 혹은 안식일이 타락의 결과로 소개된 것이었다는 아프라하테스(Aphrahates)의 개념 등에 동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개념들에 동의하는 학자들을 찾아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37) (34.1)
 만일 안식일의 의미와 본성에 대한 이러한 해석들이 구약의 성서적 증거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논쟁들을 안식일을 반대하는 “증거”로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사실상 그것들은 대부분 이러한 종류의 잘못된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이 연구의 후반에서 우리는 2세기 초에 로마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교회와 회당 사이에 긴장을 증대시킨 유기적인 조건들이 “반유대주의적 차별”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했음을 주목할 것이다. 안식일 준수와 같은 유대인들의 역사와 관습들을 부정적으로 재해석하는 내용들 속에 이러한 정황들이 나타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기 교부들의 해석의 빛에 따라서 복음서의 안식일에 관한 기록들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 우리는 오히려 오직 그 문서들의 진가를 고찰함으로써 안식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를 평가해야만 한다. (34.2)
 초기 안식일의 치료 행위들
 마가와 누가의 복음서는 그리스도께서 처음에는 그의 안식일 치료 행위들을 특별한 경우에 국한시키셨다고 시사해 준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의미와 준수방법에 대한 그의 선언이 격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누가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안식년의 성취로 당신의 메시야 되심을 최초로 선언하셨을 때(눅 4:16-21) 두 가지 치료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 첫 번째 사건은 갈릴리의 한 도시인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서 발생했다. 이 사건은 안식일 예배 도중에 발생했는데 귀신들린 사람을 영적으로 치료해 준 것이었다(눅 4:31-37). 두 번째 사건은 예배가 끝난 직후 시몬의 집에서 이루어졌는데 시몬의 장모를 육체적으로 회복시킨 것이었다(눅 4:38, 39). 이 두 경우에서 그리스도는 절실한 필요와 사랑으로 인해 행동하신다. 첫 번째 실례에서 그리스도의 행동을 일으킨 원인은 사단의 권세로부터 한 사람을 해방시켜 예배의 질서를 회복시켜야 할 필요성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이 행위 속에 이미 함축되어져 있는 안식일의 구속적 기능은 그 다음의 치료 행위 안에서 보다 명백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 두 번째 실례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하는 제자 중 한 사람과 그의 장모를 존중하는 마음에 이끌려 행동하신다. 이 경우에 육체적인 치료는 모든 식구들에게 안식일을 기쁜 날이 되게 해 주었다. 그 치료 행위가 안식일예배가 마친 직후에 일어났음 또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39절). 이러한 첫 번째 치료 행위의 초기 단계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안식일이 구속과 기쁨과 봉사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후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안식일 봉사들 안에서 더욱 더 명확하게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 초기의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주요한 치료 행위들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논쟁과 거절을 피하기 위하여 분명하게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미루어졌다.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눅 4:40, 막 1:32 비교). (35.1)
 한 편 손 마른 사람
 다음의 치료 사건은 세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 되어 있는 한편 손 마른 사람에 대한 것(마 12:9-21; 막 6:6-11)인데,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 개혁을 시작하신 시험 케이스였다.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한 손이 마비된 사람이 자신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아마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사주한 한 대리인에 의해 그곳에 데려와졌을 것이다.38) 이 사람들은 예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감시하기 위해 회당에 왔으며,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사람을 그 고치는가 하여 엿보”기 위해 왔다(막 3:2).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께 다음과 같은 시험성 질문을 던졌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2:10). 그들의 질문은 환자를 위한 진정한 염려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었으며, 안식일이 치료봉사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열망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랍비들의 궤변에 의해 예견된 모든 예외 조항들을 알고 있는 권위자요, 그들의 규례의 세목들에 근거해 그리스도를 심판하고자 하는 권위자들로 거기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저의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셨다(막 3:5). 하지만 그는 그 도전을 받아들이고 정정당당하게 그 도전에 직면하셨다. 우선 그분께서는 “이리 오라”(막 3:3)고 말씀하시므로 그 사람을 앞으로 초청하신다. 아마도 이 단계는 병자에 대해 동정심을 일으키도록 하면서 동시에 당신께서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 지를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 그분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율법 전문가들에게 물으셨다(막 3:4). 마태에 따르면 이 질문을 더 날카로운 핵심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한 비유적 형태의 진술로 두 번째 질문을 추가하셨다(그 질문은 약간 변경된 형태로 누가복음 14:5절과 13:15절에 두 번 더 나타난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마 12:11, 12). (36.1)
 이 진술들은 하나의 중요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구체적인 예화를 포함한 두 번째 질문과 더불어 설명했던 원칙에 대한 질문으로, 그리스도는 안식일 계명을 근본적으로 폐지하고자 하신 것이었는가? 혹은 그 제도가 가진 본질적인 신적 가치와 기능을 회복시키고자 의도하신 것이었는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고플렛(L, Goppelt)은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주장 한다. “예수의 이중 질문은 안식일 계명의 마침을 명시한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법적 조항이 되지 않으며, 만일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중복된 대안, 즉 생명을 구하는 것이 유효하다면 안식일은 절대적 효력을 더 이상 가지지 못한다.”39) (37.1)
 이 해석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안식일의 정신 및 기능과 대조된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정말 그럴 수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안식일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와 요용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 계명의 본래 목적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 이 가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실 때 생명의 가치를 보호하시는 것에 실패하셨다는 죄책을 씌우는 것이 된다. (38.1)
 로르도르프(W. Rordorf)도 원칙과 실례에 대한 그리스도의 질문과 관련해 “잘못된 연역적 방법”으로부터 도출된 동일한 결론에 찬성하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설명하기를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과 다급한 필요로 짐승을 구조하는 실례에서부터 “어느 누구도 안식일에 즉각적인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되는 환자에게도 들어맞는 추론을 합법적으로 이끌어낼 수는 없다”고 한다.40) 이 점에 대해서 미쉬나는 명백한 입장을 취하는데, “생명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안식일 법을 밀어놓아라”고 했다.41) 하지만 안식일에 치료한 다른 모든 실례들뿐만 아니라 여기 한편 손 마른 사람의 경우에 그 문제는 응급 상황에 처한 병자에게 주어지는 도움이 결코 아니었다. 복음서의 논쟁에 나타나는 사례들은 항상 만성적 질환에 처한 환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로르도르프는 생명을 구하는 원칙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과 관련된 하나의 서술적인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필요에 곧바로 구원을 베푸는 메시아적 사명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이런 “메시아적 의식”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계명은 더 이상 의의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으며, 그것은 단순히 폐지되었다”고 했다.42) (38.2)
 이런 유형의 분석은 그 이야기에 대한 몇몇 부분들을 바르게 평가하지 못한 것이다. 첫째로, 그리스도를 시험하기 위해 제기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2:10)라는 질문은 특별히 안식일 준수의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둘째로, 두 질문의 형태(하나는 원칙을 수반하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설명하는) 속에 나타난 예수의 답은 또한 안식일에 무엇을 행하는 것이 옳은 것인 지를 명백하게 다루었다. 셋째로,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막 3:4)의 합법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질문과 안식일 시간이 지난 이후로 그 치료의 행위를 연기해도 그의 생명을 구하거나 죽이는 것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만성적 질환자 사이와 관련된 잘못된 유추는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대해 세우신 새로운 가치에 의해 만족스럽게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마태에 의해 기록된 긍정적인 진술에서 명확하게 표현된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2). 만일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면 그것을 행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나 혹은 생명을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나중에 살펴볼 것이지만, 이 원칙이 안식일을 지키는 두 반대 유형의 사람들에 의하여 그 이야기 속에서 예증된다. (38.3)
 불행하게도 로르도르프는 안식일에 대한 마태의 긍정적인 해석이 그의 연구의도와 조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태가 “안식일을 향한 예수의 태도에 대한 도덕적인 오해를 일으켰다고 비난하므로 그 문제를 해결 하고자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오해는 ”이웃 사랑에 대한 의무는 어떤 정해진 환경 속에서 안식의 날을 지키라는 명령을 대신 한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43)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기록했을 때, 안식일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셨던 의미와 기별에 대해 마태가 정말로 오해했던 것인지 아니면 올바로 이해했던 것인지 알고 싶을 것이다. 포로기 이후의 유대사상에서 안식일을 신실하게 준수하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한 정교한 장치가 마련되었음은 사실이다. 엄밀하고 궤변적인 많은 규칙(랍비 오하난에 따르면 1521개의 파생 법칙들이 있었다고 한다)44)들이 안식일을 경계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러한 규칙들은 그 날에 대한 준수를 사랑의 봉사보다는 율법적 의식으로 바꾸어 버렸다. 하지만 안식일을 이 후기시대에 율법주의적으로 발전한 것에 비추어 배타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39.1)
 “네 이웃을 사랑해야하는 의무”는 그 초기 역사에서는 안식일과 그 관련 제도의 정수였다. 예를 들자면 안식일 계명의 다양한 내용들 속에는 안식일에 근거해 자유가 부여된 사람들에 대한 반복된 목록이 나타난다. 특별히 서술된 사람들로는 일반적으로 남종, 여종, 계집종의 자식, 가축, 유하는 객 혹은 나그네들이었다. 이것은 안식일이 특별히 방어 능력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을 베풀기 위해 제정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너는 육 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 23:12). 앤드리어슨(Nuels-Erik Andreasen)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해석하고 있다. “야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자유를 보증했을 때처럼 집주인은 그의 수하들의 인격적 가치와 관계를 가져야 한다.”45) 안식일이 심지어는 가축들을 위한 관심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것은 사실 감동적이다. 그러나 볼프가 잘 진술하고 있듯이, “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모든 종속된 노예들중 계집종의 자녀와 나그네가 특별히 서술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존재들은 일하도록 명령되었을 때 상환 청구권이나 보호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46) (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