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2장 그리스도와 주의 날
 “주의 날”(κυριακή ήμέρα)이라는 표현은 2세기 말엽에 일요일에 대한 기독교의 용어로 처음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 용어는 오직 “주님”(κύριος)께 속한 한 날을 의미한다.1) 전통적으로 많은 그리스도인 들에게 일요일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날로서, 그분께 바쳐진 날로 간주되어왔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로지 자신에게만 바쳐진 새로운 예배일 제도를 미리 고려하셨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일요일 준수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23.1)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말씀가운데서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들어있지 않다. 하지만 공관복음(마 12:8; 막 2:28; 눅 6:5)에는 “안식일의 주인”(κύριος του σαββάτου)이라는 비슷한 어법이 나타난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의 논쟁하는 중에 적법한 안식일 활동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서 사용하신 것이다. 많은 저자들은 예수께서 스스로 선언하신 “안식일의 주인” 이라는 용어와 “주의 날”로서 일요일 제도 사이에 우연한 관계가 있음을 확립시키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모스나(C. S. Mosna)는 단호하게 주장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는데 특별히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린 안식일과 같은 형식적인 짐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킴으로 그렇게 하셨다.”2)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선언을 통해 예배일에 관련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신 것이라고 이해한다. 윌프리드 스토트(Wilfrid Stott)도 비슷하게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그 말씀을 일요일 제도에 대한 함축된 언급이라고 보았다. “그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공관복음에 모두 세 번씩이나 사용된 이 표현 속에는 주의 날에 대한 숨겨진 언급이 있는 것이다. 주님으로서 그분은 자신의 날을 선택하신다.”3) (23.2)
 우리는 이러한 가설이 유효한 것인지를 평가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기본적인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질문은 그리스도께서는 진정으로 안식일을 준수했는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것을 파기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에 후자라면, 우리는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결과적으로 안식일을 대신하게 된 새로운 예배일의 기초를 놓고자 했는지에 대해 찾아볼 필요가 있다. (24.1)
 양식비평가들은 이러한 연구조사 자체를 무익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안식일에 대한 교훈과 활동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들을 믿을만한 역사적 사건들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원시교회에 대하여 후대교회가 선포한 신앙고백의 반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스스로 어떤 것을 생각하셨든지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4) 그러한 역사적 회의주의를 정당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특별히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에 대한 새로운 탐구(a new quest)는 복음서 안에서 상당히 많은 양의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들을 찾고자 하는 이전의 방법론과 기대들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비평하고, 그것들을 비역사적인 신화들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5) 그러나 저들의 주장대로 복음서에 나타난 안식일 관련 자료들이 당대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는 없어도 후기 기독교 공동체의 사상을 나타낸 것이라면, 그 점만으로도 그것들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는 감소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여전히 안식일에 대한 초기교회의 태도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치 있는 자료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6) 사실상 복음서의 저자들은 안식일에 행한 그리스도의 치료 행위(적어도 7개 이상의 에피소드가 기록됨)7)와 논쟁들을 기록하는데 많은 공간과 주의를 기울였는데, 그것들은 그들이 그 책들을 기록할 시대에 안식일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24.2)
 안식일의 표상과 메시아적 성취
 그리스도의 안식일에 대한 견해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그 출발점으로 삼기에 적합한 것은 누가복음 4장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공중사역을 시작하면서 안식일에 나사렛의 회당에서 설교하신 내용을 보게 되는 데 그 설교 내용에서 안식일과 관련된 하나의 인용문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복음서 전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봉사가 안식일에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이 거의 시작된 예비일”에 마쳐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23:54). 누가에 따르면 그 날은 예수께서 관습적으로 지킨 날이었다(눅 4:16). 누가는 반복적인 거부반응을 야기시킨 예수의 안식일 봉사(눅 4:29; 13:14, 31; 14:1-6)가 그리스도에 대한 최종적인 거절과 희생의 서막으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25.1)
 설교의 시작에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이사야 61:1-2(58:6비교)를 언급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26.1)
 모든 주석가들은 그리스도께서 공식적으로 임명을 받아서 선포한 “주의 은혜의 해”(4:19)는 안식년(즉 일곱 번째 해), 혹은 희년(즉 일곱 번의 안식년이 지난 후 50년째 되는 해)을 언급하는 것이라는 데 실질적으로 동의한다.8) 이러한 연례 제도들에서 안식일은 히브리 사회에서 압제받던 자들을 해방하는 날이 되었다. 땅들은 휴한지(原地)가 되었고, 가난한 자들과 빼앗긴 자들과 동물들을 위해 농산물들이 자유롭게 제공 되었다.9) 노예들은 그들이 원한다면 해방되었고, 동료 주민들이 진 빚들은 탕감되었다.10) 희년은 또한 원주인들에게 재산을 반환해 주도록 요구하였다.11) 그리스도께서 읽으신 이사야의 본문이 안식일 제도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혹은 갇힌 자), 눌린 자”의 해방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 문맥에 의해서 분명해진다. (26.2)
 그리스도께서 그가 공적사역을 개시하는 첫 번째 설교에서 안식년의 용어들을 통해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선언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구절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간단하지만 매우 적절하게 설명하신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4:21), 제윗(P. K. Jewett)이 적절하게 인지했듯이, “위대한 희년 안식일은 메시아의 오심으로 그들의 죄로부터 해방된 모든 사람들과 그분 안에서 상급을 발견한 모든 사람들에게 실체가 되었다.”12) (26.3)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왜 그의 사명을 안식일에 약속된 해방의 성취로 선언하셨는가? 그분께서는 안식일 제도가 그 제도의 실체인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하나의 표상이었으며, 그래서 그의 공식적인 사역과 더불어 표상적인 안식일의 의무가 끝나게 되었음을 하나의 숨겨진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의도하셨는가?(그 경우라면 그리스도는 새로운 예배일을 만들어 안식일을 대신할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그 날이 그의 구속적 행위에 대한 적절한 기념물이 되도록 하기위해서 그의 사명을 안식일과 동일시했는가? (26.4)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안식일에 내포된 메시아의 구속적 사역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본래 안식일 제도 안에는 신의 축복이 보증되어 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창 2:3, 출 20:11 비교), “축복”에 대한 구약성서의 개념은 충만하고 풍부한 삶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창조 이야기에서 안식일의 축복(창 2:3)은 생물들의 축복(창 1:22)과 인간의 축복(창 1:28)에 이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분의 완전한 창조를 넘어서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전체적인 축복을 표현한다(창 1:31).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복 주심으로 인류역사의 전 과정을 통해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되셨음을 약속하셨다.13) (27.1)
 구속의 계획 속에 펼쳐 보이신 안식일의 축복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과 매우 특별하게 연결된다. 예를 들어 십계명에 대한 출애굽기의 내용에서 야훼는 스스로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낸 자비로우신 구속자로서 소개하신다(출 20:2). 히브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새롭게 부여된 이 자유를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서 안식일 계명은 모든 것, 심지어는 동물들까지도 일하지 말아야한다고 요구한다(출 20:10). 출애굽기 20:1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신명기의 십계명에서도 그 서문에서 구속적 모티프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신 5:6), 안식일 계명 그 자체에서도 분명하게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아마도 구속의 의미가 안식일 계명과 직접적인 연관성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과 모든 후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신명기는 안식일이 항상 백성들의 직접적 관심사가 아니었던 과거의 하나님의 창조 행위(출 20:11절에서처럼)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기초한 것임을 설명하기 위해 그 구속적 의미를 안식일 계명에서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14) (27.2)
 한스 발터 볼프(Hans Walter Wolff)가 잘 설명한 것처럼, 여기에서 안식일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위해 정말 필수적인 것, 즉 야훼가 애굽에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단언에 있다. 매 안식일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이 해방자이시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15)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통하여 출애굽의 해방을 기억하도록 한 이 요구는 그것을 지킬 자유가 없던 모든 사람들에게 까지 안식일 휴식을 확장시킨 구체적인 경험으로 강조되었다. 하지만 안식일에 쉬는 것은 단지 역사적인 출애굽 해방을 회상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연상적 보조물로서만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차일즈(Brevard S. Childs)가 논평한 것처럼, 과거의 구원의 경험을 현재의 시간 속에서 경험하도록 의도한 것이었다.16) (28.1)
 듀발(A. M. Dubarle)은 다음의 글을 통해서 이 해석을 추인한다. (28.2)
아빕월의 첫 시간에 성취된 구원이 안식일 시간의 전 과정 동안에 효과적으로 나타났고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한 단순한 기념물로서 기념하는 문제가 아니라 첫 은혜를 계속해서 새롭게 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를 누리는 것이다.17)
(28.3)
 안식일은 3가지 차원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원에 대한 기념이 된다. 매주 한 번씩 삶의 고난으로부터 해방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재적 체험은 미래 메시아적 구속뿐만 아니라 과거 유월절의 해방에 대한 전형이 되었다. 이 세 가지 차원의 밀접한 관계로 인해 유월절과 안식일은 모두 미래의 메시아적 구원의 상징이 된다.(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이 연례행사인 유월절을 주간 단위로 확장한 것이듯이, 후대에 일요일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연례행사인 부활절의 주간 단위 기념일이 되었다). (29.1)
 안식일의 구속적 기능은 표면적으로는 메시아의 사명에 대한 예표로서 이해되었다. 주간 안식일과 안식년 모두를 통해 히브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부여된 노동과 사회적 불평등의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은 언젠가 메시아가 그의 백성들에게 가져다 줄 완전한 구속의 전조로서 이해되었다. 이사야서에서는 모든 민족들을 불러 모으는 메시아의 시대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사 66:23)는 때로 묘사되고 있다. 메시아의 사명은 또한 이사야에 의해(그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취임 설교에서 적용하였다, 눅 4:18-19) 안식년과 관련된 언어로 묘사된다(61:13). 제윗(P. K. Jewett)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해석한다. 안식년과 희년의 구속과 회복의 행위 안에서 하나님은, (29.2)
개개인에게 인격적 자유를 보장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그의 백성의 유산으로 분배된 몫을 잃지 않도록 하시는 구속자로서 다시 한번 나타나신다. 분명하게 이것은 구속에 대한 형식적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아들이시요 중 보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구속자로 드러내셨기 때문이다.18)
(29.3)
 안식일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메시아적 표상은 안식일 안식의 경험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데, 헤셀(A. J. Heschel)은 안식일 안식을 의미하는 메누하(menuhah)를 “행복과 고요, 평화와 조화”로 정의하고 있다.19) 한 학술 논문에서 테오도르 프리드먼(Theodore Friedman)이 제시한 설득력 있는 설명에 따르면, 안식일의 평화와 조화는 선지자들의 글과 탈무드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마지막 날이나 앞으로 도래할 세상으로 알려진 메시아 시대와 자주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다음과 같이 주해한다. (30.1)
이사야는 ‘기쁨’(oneg)이라는 단어와 ‘존귀’(kaved)라는 단어를 안식일과 마지막 날(즉 메시야 시대에 대하여 묘사하는데 사용하고 있다(58:13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 존귀한 날이라’, 66:11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그 함축된 의미는 분명하다. 마지막 날을 특징지을 기쁨과 즐거움이 안식일에 의해서 지금 바로 유효하다는 것이다.20)
(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