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창조와 구속과 소망의 축제) 4. 초극성의 현존 (Fritz Guy)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이 말이니라(사 58:13-14)
(30.3)
 “안식일을 존귀히 여기는” 것과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는”것의 관계를 너무 피상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많다. 즉 두 경험 사이의 연결을 단지 비본질적이고 따라서 자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부모들이 때때로 자녀들에게 학교성적에 따라 용돈의 액수를 정해서 상금을 주는 식의 연결고리 같은 말이다. (30.4)
 그러나 안식일에 관한 이같은 관점은 안식일을 사회 경제적인 강압 구조에 얽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창조주에게는 무가치하며 인간에게는 매력 없는 것이다. 그 밖에도 이같은 관점은 안식일의 종교적인 활력을 간과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실상 인간은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제칠일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안식일이야말로 “시간속의 궁전”이며, “삶의 막간이 아니라 삶의 클라이맥스”13 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클라이맥스가 발생할 때 인간은 그 앞에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과 변화시키는 능력과 영적 발전을 위한 비할바 없는 잠재력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연루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많이 강조했으므로 이제는 그 못지않게 하나님의 궁극성을 강조해야 할 차례이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로도 연루성이 궁극성을 상대화 하거나 희석 시키는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계성에 대한 이해가 궁극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 시키고 궁극성에 대한 존경과 찬양을 더하게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0.5)
 이 글에서 “궁극성”이란 용어는 하나님이 단순히 최고의 실재와 가치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것으로도 개념화 할 수 없는, 고등한 그 어떤 것 이상의 실재와 가치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여 사용되었다.14 이것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할 것없이 모든 유일신교들이 그 신을 정의한 고전적인 형태이다. “궁극성”이란 단어는 이것 말고도 서로 밀접히 관련된 두개의 사상을 더 포함하고 있다. 그 첫번째는 “거룩”의 관념인데 그것을 정확히 정의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15 그러나 이 거룩은 궁극성의 인식에 규칙적으로 수반되는 외경과 숭경의 감정을 유발시킨다. 두번째는 “타자성”, “저편성”, 또는 “은폐성”의 관념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가지 방식으로 이 세상과 관련되면서도 여전히 이 세상 밖에, 창조된 여하한 것 넘어에 자신의 존재를 갖고 있는 분이시다라는 사실을 의도하고 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실재가 언제나 인간의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무한히 벗어나 있다는 것을 뜻한다. (31.1)
 하나님의 궁극성은 두개의 원칙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궁극적인 실재요 권능이시다. 그는 그 자신의 원천이며 다른 모든 실재와 능력의 원천이다. 그는 그 자신 밖의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제한 받지 않는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은 영원하며 전능하신 분이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일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와 인간에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그래서 하나님의 행동은 어떤 의미에서 창조된 실재에 의하여 제한 받고 있다는 사실은 마땅히 하나님 자신의 창조적 의도에서 나온 하나님 자신의 자기 제한 행위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관계성(연루성)은 자신의 창조적 결단과 더불어 발생하는 것일 뿐 어떤 방식으로 그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31.2)
 하나님의 이같은 궁극성은 안식일이 시간적 상징이라는 사실에서 제시되고 있다. 시간적 상징은 여기서 떡과 술, 물과 대야와 수건등 물질적으로 이루어진 대상들과 대조(모순이 아니라)를 이루고 있다.16 첫째로 시간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대상이며, 오히려 자신을 규정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멸시한다. 시간은 인간에 대한 “밀접성”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부터의 “저쪽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제격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시간의 신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비를 상기 시키기 때문이다. (32.1)
 둘째로 시간은 인간 존재의 “질료”이다. 시간이 “소진 되면”인생이 끝나고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어떤 사람에게나 어떤 노력을 위해 우리의 시간을 내준다고 한다면 이것은 돌려 받을 수 없는 투자를 하는 셈이다. 즉 자기 자신을 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하나의 거룩한 날은 영원한 하나님의 궁극성을 확언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의 근원이시고 우리 자신의 시간의 진로이시다. 그분에게는 시간이 전혀 문제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궁극적인 실재요 권세이시기 때문이다. (32.2)
 그러나 하나님은 긍극적인 실재나 권능 이상의 존재이다. 그는 궁극적인 선이시며 가치이시기도 하다. 통상적으로 실재와 권세가 가치와 권위를 유발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 다른 고려가 필요하다. 세상에는 선이 결여된 실재와 가치를 결여한 권세의 사례들로 운동장 깡패, 전횡적인 배우자, 정통성 없는 정부 등 얼마든지 많다. 그래서 하나님은 궁극적인 실재와 권세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선이요 가치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 사실은 성서의 문건들을 통해 전달된 특별 계시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즉 성경의 특별 계시에 나타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연루성의 본질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일단 인정되고 난 후에야 이 사실이 기독교 “복음”의 신학적 또는 철학적 추론으로 조직화 될 수 있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라는 사실은 하나님은 궁극적인 선이요 가치라는 사실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32.3)
 궁극성의 이 두번째 특성은 한 쪽으로는 (하나님의 권세에 대한 공포와 대조를 이루는)예배의 적극적인 동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재림교회에서 “대쟁투”로 이해하고 있는 주제의 핵심 사안이다. 원수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나 권세가 아니다. 그것은 전체 우주의 이익을 위하여 결국은 옹호될 것이다. 원수의 진정한 도전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을 향한 것이다. (32.4)
 거룩한 날 즉 성일로서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궁극성의 두가지 특성을 모두 상징하고 있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이같은 궁극성을 상기 시키고 그 궁극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하며 그 궁극성을 확언할 수 있는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러한 연관을 통하여 우리는 안식일의 제칠일성이 갖는 특별한 중요성을 가장 분명하게 인식할 수가 있다. (33.1)
 적극적인 의미에서 안식일을 준수하는 행위는 곧 하나님의 궁극성을, 그것도 단지 하나님의 실재와 권세라는 뜻에서의 궁극성만이 아니라 그의 선과 가치라는 의미의 궁극성을 함께 인정하고 확언하는 행위이다. 첫째로 제칠일은 “여호와께”17 안식일로 간주된 날이며 “여호와의 성일”(사 58:13)로 알려진 날이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반복해서 제칠일을 “나의 안식일”이라고 부르고 계시다.18 둘째로 특정한 날, 달, 연과는 달리 제칠일의 순환은 “자연적”인 기초위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어떤 천문학적, 농업적, 심리학적 주기가 안식일에 어떤 “실용적” 중요성을 부여한 것도 아니다. 안식일의 기원과 그 중요성은 모두 독특하게 종교적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선물이다. 간단히 말하면 안식일은 창조주에게 “예”아니면 “아니요”를 말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안식일의 “제칠일성”은 이와같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실재와 권능으로서 그리고 선과 가치로서의 하나님의 궁극성을 상징하고 있다. 매 제칠일을 “여호와께”바치는 행위는 모든 날에 대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존 전반에 걸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이다.19 (33.2)
 소극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제칠일을 안식일로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경제적 안전과 복지 뿐만 아니라 개인적이며 전문적인 성취나 성공과 만족 등 모든 비 초월적 가치들을 상대화 한다. 이러한 형태로 안식일은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무의식 중에 굴복하기 쉬운 물질주의와 신분 향상의 위력으로 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수단이 된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쾌락”“업무”가 중요치 않게 인식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특징적으로 개인적인 성공을 궁극적인 선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우리가 직업적으로 어떤 인도주의적인 분야나 종교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경우에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안식일이 다가오면 이 안식일이 우리 자신의 피조성과 상대성을 일깨우고 우리에게 우리의 모든 노력과 의도들을 하나님의 궁극성의 관점과 상황에 맞출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날은 일차적으로 쉼과 예배를 위한 날이다. 이 날은 어떤 업무가 제아무리 자선적인 것이고, 제아무리 관대한 동기에 기인한 것이라 할 지라도(우리의 동기는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덜 관대한 경우가 흔하지만) 우리가 개인적 또는 직업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날이 아니다. (33.3)
 하나님의 궁극성(실재와 권세, 그리고 선과 가치로서)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연루성(창조와 현존, 책임과 응답을 통한)과 함께 상징하는 날로서 안식일을 인정한다면 왜 재림신자들의 생활과 사상에 있어서 안식일의 경험이 그토록 중시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안식일은 단순히 어떤 종교적 관행에 끝나지 않는다. 안식일은 심오한 신학적 선언이다. 이같은 인식을 지니게 된다면 안식일 대신에 다른 날을 예배일로 설정하는 행위가 어찌하여 진정한 성서적 종교로부터의 심각한 일탈로 간주되는 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0 뿐만 아니라 이로써 우리는 안식일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인”(계 7:2)으로서 뜻하고 있는 종말론적 중요성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으로서의 안식일은 “대쟁투”의 현안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바로 하나님의 궁극성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성 안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준비하는 삶의 자세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34.1)
 미 주
 1. Paul Tillich, Dynamics of Faith (New York:Harps and Brothers, 1957), 42.

 2. Ellen G. White, Patriarchs and Prophets (Mountain View, Calif:Pacific Press, 1958), 42.

 “사탄은 ---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코자 노력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 계획을 제대로 표명되지 못하게 하였다. 천사들에게 율법을 부과하는 행위는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피조물들에게 굴복과 순종을 요구하는 것도 정당치 못하다고 하였다. 피조물들에게 굴복과 순종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을 높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재림교회의 사상계 밖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상이 좀더 넓은 시각에서 표현되고 있다. 그 일례로서 C.S. Lewis, The Screwtape Letters (Landen:Collins/Fontana, 1953), 92: 지옥의 전체 철학은 다음과 같은 격언 위에 기초되고 있다. 즉 이것은 저것이 아니다. 특히 이 자아가 저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장점은 나의 장점이고 너의 장점은 너의 장점이다. 이쪽이 얻으면 저쪽이 잃는다. 심지어는 무생물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차지하고 이는 공간에서 다른 물체들을 축출함으로써 존재한다. 만약 그 물체가 확장한다면 그것은 다른 물체들을 제쳐 냄으로써 이든지, 아니면 다른 물체들을 흡수함으로써 가능할 뿐이다. 짐승들에게는 그 확장이 먹고 먹히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마귀들에게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자아로부터 의지와 자유를 빨아 마셔버리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경쟁 속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3. 하나님의 유착성과 초극성이라는 양극성은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이라는 일반적이고 존재론적인 양극성에 대한 경험적인 추론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사항은 하나님과 전체 피조물계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4. Paul Tillich의 신학에 익숙한 독자들은 Dynamks of Faith (New Yak: Harper and Brothers, 1957), 41-43에서 상징의 두 기능을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한 “representation”(대표, 표시)과 “re-presentation”(재연, 다시 발표함)의 연결 관계를 인식할 것이다.

 5.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 최소한 14번, 신약 성경에 16번이 나온다. 베드로의 그 유명한 고백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도 그 중 하나이다.

 6. Ellen G. White의 안식일 해설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행위의 상징(“기념”)으로서 안식일을 강조하고 있다. cf. Patriachs and Prophets, 48, 307, 338; The Desire of Ages,  281, 288; The Great Caitroversy, 54, 436-438; Education, 250-251

 7. Patriachs and Prophet 47-115를 비교하라: “모든 것이 완전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가치를 반영하고 있었다. 하나님온 쉬셨다. 그러나 그것은 피곤한 자의 쉼 같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지혜의 열매가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영광이 선하게 들어남으로 말미암은 충만한 기쁨 같은 쉼이었다.” “이 세상에 대하여 말한다면 하나님의 창조 사업은 완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일들은 세계와 창조할 때부터 이루었기 때문이라(히 4:3).”

 Martin Buber, Moses (Oxford: East and West Library, 1946), 82을 참고하라: “히브리 단어 사바트(쉬다)는 행위나 상황이 완성된 것만을 의미한다. 미완된 어떤 것을 의미하거나, 미완된 상태로 남겨 놓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사바트란 말에 포함된 핵심적인 의미는 어떤 행위나 기능이 완성되었다는 것, 더 이상 무엇 무엇을 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Karl Barth, Church Dogmatics (Edinberg:T. & T. Clark, 1936-63), III-1, 214-215를 참고하라. 하나님이 당신의 창조활동을 끝냈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세계와 인간의 창조를 만족하셨다. 그는 그 자신과는 다른 이 실재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만족스러웠고, 이같은 피조물의 창조주가 된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그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사업들 속에서 자신의 능력과 은혜의 외적인 범위를 발견하고 자신의 영광이 들어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한다는 사실에 만족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가 제칠일에 그 이상의 활동을 자제한 이유는 그가 자신이 사랑할 대상을 발견하였고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8. 이같은 표현은 최소한 28회에 걸쳐 나타난다. 창 17:7-8; 출 29:45-46; 레 26:12, 45; 신 14:4; 26:17-18; 삼하 7:24; 대상 17:22; 사 51:15-16; 렘 7:23; 11:4; 24:7; 30:22; 31:1, 33; 32:38; 겔 11:20; 36:28; 37:23, 26-27; 호 1:9-10; 2:23; 슥 8:8; 13:9; 롬 9:25-26; 고후 6:16; 계 21:3

 9. 안식일과 계약의 밀접한 관계는 이사야 56:4, 6의 평행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고자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의 뜻에 맞는 일만하고 나의 계약을 굳게 지키면”(4절)

 “외국인들도 --- 안식일을 속되지 않게 지키고 나의 계약을 확고히 지키기만 하면”(6절)

 10.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적 관계를 나타내는 성서적 상징으로는 안식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약 성경에는 무지개(창 9:12-13)가 있고, 할례(창 17:10-14)가 있다. 신약 성경에는 주의 만찬의 포도주(마 26:28)가 있다.

 11. Ellen G. White, Testimonies for the Church (Mountain View, Calif.: Pacific Press, 1948), HL 350을 비교하라. “그의 성일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하나님의 그들을 그의 선택한 백성으로 여기는 표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계약을 그들에게 성취하시겠다는 보증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표징을 받아들이는 모든 영혼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영원한 계약 아래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디 하나 하나가 약속을 뜻하는 순종의 황금 사슬에 자신을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다.”

 12. 예수님의 교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사상이다. 마 7:7-11; 18:19; 21:22; 요 14:13-14; 15:17; 16:24.

 13. Abraham J. Hesch인 The Sabbath: It’s Meaning for Modem Man (New York: Farrar, Straus and Young, 1951), 12, 14, 15.

 14. Anselm of Canterbury(c. 1033-1109)의 An Address(Proslogion), ch, 2에서:“그 이상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존재”; 그리고 Boethius(480-542), The Consolation of Philosophy, book 3, proee 10 에서는 “하나님 이상의 그 어떤 것도 생각될 수 없다”고 하였다.

 15. Herbert W. Richardson, Toward an American Theology (New York: Happer and Row, 1967), 123에서 거룩은 하나님의 “영광”“위엄”이란 말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안식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6. Heschel의 The Sabbath는 시간과 공간의 대비를 너무 강조하는 것 같다. 우리의 문제는 공간의 물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 물체에 대한 우리의 집착에 있는 것이다.

 17. “여호와의”란 번역보다는 “여호와께”란 번역이 더 정확한 번역이다. 출 16:23, 25; 20:10; 31:15; 35:21; 신 5:14등이 그 경우이다.

 18. 출 31:13; 레 19:3, 30; 26:21; 겔 20:12, 20 등.

 19. Matitiahu Tsevat, “The Basic Meaning of the Biblical Sabbath,” Zeitschrift fur die alttestamentliche Wissenschaft 84(1972), 455-458을 비교해 보라.

 20. White, The Great Controversy, 49-51 와 433-456을 보라. (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