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aul Tillich,
Dynamics of Faith (New York:Harps and Brothers, 1957), 42.
2. Ellen G. White,
Patriarchs and Prophets (Mountain View, Calif:Pacific Press, 1958), 42.
“사탄은 ---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코자 노력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 계획을 제대로 표명되지 못하게 하였다. 천사들에게 율법을 부과하는 행위는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피조물들에게 굴복과 순종을 요구하는 것도 정당치 못하다고 하였다. 피조물들에게 굴복과 순종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을 높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재림교회의 사상계 밖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상이 좀더 넓은 시각에서 표현되고 있다. 그 일례로서 C.S. Lewis,
The Screwtape Letters (Landen:Collins/Fontana, 1953), 92:
지옥의 전체 철학은 다음과 같은 격언 위에 기초되고 있다. 즉 이것은 저것이 아니다. 특히 이 자아가 저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장점은 나의 장점이고 너의 장점은 너의 장점이다. 이쪽이 얻으면 저쪽이 잃는다. 심지어는 무생물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차지하고 이는 공간에서 다른 물체들을 축출함으로써 존재한다. 만약 그 물체가 확장한다면 그것은 다른 물체들을 제쳐 냄으로써 이든지, 아니면 다른 물체들을 흡수함으로써 가능할 뿐이다. 짐승들에게는 그 확장이 먹고 먹히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마귀들에게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자아로부터 의지와 자유를 빨아 마셔버리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경쟁 속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3. 하나님의 유착성과 초극성이라는 양극성은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이라는 일반적이고 존재론적인 양극성에 대한 경험적인 추론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사항은 하나님과 전체 피조물계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4. Paul Tillich의 신학에 익숙한 독자들은
Dynamks of Faith (New Yak: Harper and Brothers, 1957), 41-43에서 상징의 두 기능을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한
“representation”(대표, 표시)과
“re-presentation”(재연, 다시 발표함)의 연결 관계를 인식할 것이다.
5.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 최소한 14번, 신약 성경에 16번이 나온다. 베드로의 그 유명한 고백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도 그 중 하나이다.
6. Ellen G. White의 안식일 해설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행위의 상징(
“기념”)으로서 안식일을 강조하고 있다. cf.
Patriachs and Prophets, 48, 307, 338;
The Desire of Ages, 281, 288;
The Great Caitroversy, 54, 436-438;
Education, 250-251
7.
Patriachs and Prophet 47-115를 비교하라:
“모든 것이 완전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가치를 반영하고 있었다. 하나님온 쉬셨다. 그러나 그것은 피곤한 자의 쉼 같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지혜의 열매가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영광이 선하게 들어남으로 말미암은 충만한 기쁨 같은 쉼이었다.” “이 세상에 대하여 말한다면 하나님의 창조 사업은 완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일들은 세계와 창조할 때부터 이루었기 때문이라(히 4:3).” Martin Buber,
Moses (Oxford: East and West Library, 1946), 82을 참고하라:
“히브리 단어 사바트(쉬다)는 행위나 상황이 완성된 것만을 의미한다. 미완된 어떤 것을 의미하거나, 미완된 상태로 남겨 놓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사바트란 말에 포함된 핵심적인 의미는 어떤 행위나 기능이 완성되었다는 것, 더 이상 무엇 무엇을 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Karl Barth,
Church Dogmatics (Edinberg:T. & T. Clark, 1936-63), III-1, 214-215를 참고하라. 하나님이 당신의 창조활동을 끝냈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세계와 인간의 창조를 만족하셨다. 그는 그 자신과는 다른 이 실재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만족스러웠고, 이같은 피조물의 창조주가 된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그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사업들 속에서 자신의 능력과 은혜의 외적인 범위를 발견하고 자신의 영광이 들어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한다는 사실에 만족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가 제칠일에 그 이상의 활동을 자제한 이유는 그가 자신이 사랑할 대상을 발견하였고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8. 이같은 표현은 최소한 28회에 걸쳐 나타난다.
창 17:7-8; 출 29:45-46; 레 26:12, 45; 신 14:4; 26:17-18; 삼하 7:24; 대상 17:22; 사 51:15-16; 렘 7:23; 11:4; 24:7; 30:22; 31:1, 33; 32:38; 겔 11:20; 36:28; 37:23, 26-27; 호 1:9-10; 2:23; 슥 8:8; 13:9; 롬 9:25-26; 고후 6:16; 계 21:3 9. 안식일과 계약의 밀접한 관계는
이사야 56:4, 6의 평행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고자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의 뜻에 맞는 일만하고 나의 계약을 굳게 지키면”(
4절)
“외국인들도 --- 안식일을 속되지 않게 지키고 나의 계약을 확고히 지키기만 하면”(
6절)
10.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적 관계를 나타내는 성서적 상징으로는 안식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구약 성경에는 무지개(
창 9:12-13)가 있고, 할례(
창 17:10-14)가 있다. 신약 성경에는 주의 만찬의 포도주(
마 26:28)가 있다.
11. Ellen G. White,
Testimonies for the Church (Mountain View, Calif.: Pacific Press, 1948), HL 350을 비교하라.
“그의 성일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하나님의 그들을 그의 선택한 백성으로 여기는 표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계약을 그들에게 성취하시겠다는 보증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표징을 받아들이는 모든 영혼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영원한 계약 아래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디 하나 하나가 약속을 뜻하는 순종의 황금 사슬에 자신을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다.” 12. 예수님의 교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사상이다.
마 7:7-11; 18:19; 21:22; 요 14:13-14; 15:17; 16:24.
13. Abraham J. Hesch인
The Sabbath: It’s Meaning for Modem Man (New York: Farrar, Straus and Young, 1951), 12, 14, 15.
14. Anselm of Canterbury(c. 1033-1109)의 An Address(Proslogion), ch, 2에서:
“그 이상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존재”; 그리고 Boethius(480-542),
The Consolation of Philosophy, book 3, proee 10 에서는
“하나님 이상의 그 어떤 것도 생각될 수 없다”고 하였다.
15. Herbert W. Richardson, Toward an American Theology (New York: Happer and Row, 1967), 123에서 거룩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이란 말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안식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6. Heschel의
The Sabbath는 시간과 공간의 대비를 너무 강조하는 것 같다. 우리의 문제는 공간의 물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 물체에 대한 우리의 집착에 있는 것이다.
17.
“여호와의”란 번역보다는
“여호와께”란 번역이 더 정확한 번역이다.
출 16:23, 25; 20:10; 31:15; 35:21; 신 5:14등이 그 경우이다.
18.
출 31:13; 레 19:3, 30; 26:21; 겔 20:12, 20 등.
19. Matitiahu Tsevat,
“The Basic Meaning of the Biblical Sabbath,” Zeitschrift fur die alttestamentliche Wissenschaft 84(1972), 455-458을 비교해 보라.
20. White,
The Great Controversy, 49-51 와 433-456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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