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을 내밀라 제 1 장 믿음을 활용하여 치유 받은 기적들 기적 1 ►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본문 : 요 5:1-15
 중풍병이란 뇌졸중(腦卒中) 곧 갑작스런 뇌동맥 장애로 신경과 의식에 운동 마비가 일어나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거나 손발이 마비되는 병이다. 일단 머리 속 혈관이 터지면 그 뒷부분 뇌세포가 산소 공급에 장애를 받아 소멸되므로 실어증(失語症) 증세를 보이고 만일 뇌동맥이 혈전으로 막히면 뇌경색증이 된다. 병이 심하면 큰 소리에 겨우 눈을 뜨는 세미코마(반 혼수) 상태가 되며, 더욱 위중하면 대화는 물론 눈뜨는 것조차 불가능한 디프코마(혼수) 상태가 된다. 다행히 조금 회복된다 할지라도 손발이 부자연스럽고 말도 똑똑치 못하며 마음대로 걷거나 뛸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중풍병은 실로 참혹한 병인 것이다. (11.1)
 허랑 방탕하게 살다가 갑작스럽게 뇌혈관이 파괴돼 그만 중풍병(中風病)에 걸려 버린 한 불쌍한 환자가 있었다. 심령이 죄로 곪아 썩어 육신의 병을 가져온 것이다. 병세(病勢)가 아주 대단하여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서거나 걷는 것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족들은 그를 치유하고자 들것에 실어 이 의원 저 의원 갈 수 있는 곳은 다 가 보았다. 당대에 유명한 의사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치료하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낫기는커녕 오히려 병세가 더욱 악화되는 게 아닌가! 결국 가산만 탕진해 버렸다. 친척들의 경조사(慶甲事)는 물론 아름다운 천연계를 거닐어 본 지도 어느 덧 반생(半生), 곧 38년을 보내었으니 그는 마치 병치레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자 같았다. 지난 날 치유(治樹)를 받고자 애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버린 그에게 드디어 죽음의 그림자가 내리고 있었다. 피골(皮骨)이 상접한 그는 절망의 나날 속에 오직 죽을 날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2.1)
 그러나 비록 사경을 넘나드는 처지에 있었다 할지라도 그에게 남아 있던 강한 삶의 의욕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꼭 건강을 회복하여 지난 38년 동안 그토록 가고 싶었던 성전에서 하나님을 뵈어야겠다고 희망했었다. 그런 의욕 때문에 그의 가냘픈 생명이 근근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가닥 치유의 희망을 던져 주는 참으로 좋은 소식이 들려 왔다. 예루살렘 성안에는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는데 만일 물이 동(動) 할 때 누구든지 제일 먼저 뛰어들기만 하면 무슨병에 걸렸든 금방 낫는다는 소문이었다. 비록 그것이 허망한 전설이었다 할지라도 그 소식은 중풍 병자에게 강한 삶의 욕구를 자극시켰다. (12.2)
 “나도 그곳에 가서 연못에 제일 먼저 뛰어들어가 건강을 회복해야겠어.” (12.3)
 그리하여 가족들에게 소리쳐 거듭 거듭 졸라댔다. (12.4)
 “나를 베데스다 연못가로 데려가 달라” (12.5)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하려고요.” (13.1)
 “어떻든 나를 그쪽에다 데려가 달라” (13.2)
 성화(成火)에 못 이긴 가족들은 그를 들것에 실어 결국 베데스다 연못가로 데려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 가서 보니 허망한 치유를 기대하는 각양각색(各樣各色)의 환자들이 연못가에 이미 진(陣)을 치고 있었으며 한결같이 모두다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들은 별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중풍 병자를 연못가에 홀로 내버려둔 채 그만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13.3)
 “자비의 집”이라는 뜻인 베데스다 연못은 예수님 당시의 양문(羊門), 곧 양을 파는 시장 옆에 있었다(요 5:2: 느 3:1). 오늘날 예루살렘 성 동쪽 스테반문 안 가까운 곳에 소재하고 있다. 그러면 왜 베데스다 연못은 하루에 몇 번씩 동했을까? 그것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베데스다 연못은 기원전 2세기경 시몬 대제사장이 성전에 물을 공급하고 의학적 치료를 목적으로 용천(漫泉)에 만든 것으로 길이 55피트 넓이 12피트의 쌍둥이 연못이었다. 베데스다 연못은 기혼샘처럼 간헐천(間歌泉)으로 물이 하루에 몇 번씩 솟아올랐다. 이 용천 때문에 물이 하루에 서너 번 부글부글 동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물이 사방에서 뿜어져 나와 부글부글거리는 물리 치료실인 셈이다. (13.4)
 물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미국에 있는 유치파인이나 와일드우드에 가보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시설해 둔 매우 훌륭한 수치료(水治療) 시설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몇 기도원이나 요양원은 좋은 수치료 시설을 해 놓고 주기적으로 환자를 받아 치료를 하고 있다. 지상의 낙원 하와이에 갔을 때에 나는 어느 신자의 집에서 며칠간 묵었는데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보고 너무나 놀랐었다. 왜냐하면 거기 노천 수영장이 있었고 그 양편에 수치료 시설이 딸려 있었으며 남녀 사우나실도 있어서 그 아파트에 사는 자는 누구든지 스위치만 켜면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수치료 시설을 우리 나라의 각 교회마다 만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13.5)
 한 때 베데스다 연못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양을 씻기던 정결탕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그곳에 가보면 행각(行閣)이 연못 가장자리에 4개, 중앙에 한 개 도합 다섯 개가 있으며, 관망대 위에서 연못의 모든 유적들을 일목 요연(一目療然)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1888년 고고학자 헤르 쉭크(Herr Shick)에 의해 발굴되었다. (14.1)
 그러면 왜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뛰어들면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을까? 이유는 백성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베데스다 연못의 용천을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헛되게 믿게 됐다. 그리고 누구든지 물이 동할 때 물 속에 제일 먼저 뛰어 들면 어떤 병을 가졌든지 나음을 받는다는 허무맹랑한 소리가 퍼졌다. 이 황당 무계(荒唐無權)한 전설 때문에 세상 의학에 절망한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이 마지막 실낱같은 삶의 희망을 가지고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대부분이 들것에 들려서, 어떤이는 등에 업혀서 죽을 힘을 다해 이곳에 왔다. 연못가 행각에는 그곳에 아예 누워 있는 소경, 절뚝발이, 중풍 병자, 혈기 마른 자, 그리고 날마다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각양 각색의 환자들, 또한 그들을 데리고 온 수많은 사람들로 두루 섞여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요술적(妖術的) 치료를 믿고 헛된 기적의 소망을 안고 연못가에 와서 아예 밤을 지새우는 환자들도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그들에게는 물이 동하는 때에 제일 먼저 연못 안에 뛰어드는 것이 최대의 희망이었다. 때때로 물이 동할 때에 힘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발로 밟고 서로 다퉈 물에 뛰어 들었으며 간혹 가련한 여인들과 힘없는 아이들이 물에는 뛰어들지 못한 채 밟혀 죽는 진풍경(珍風景)도 벌어지곤 했다. 모두 다 이기적이고 경쟁에 광분(狂奔)해 있었다. 사실 연못에는 한 번도 뛰어들어가 보지 못한 채 거기서 기다리다 그만 지쳐 죽고 마는 환자들도 많았다. 실로 얼마나 애처로운 장면인가! 하나님께서 과연 그와 같은 치열한 생사 투쟁(生死鬪爭)을 통해 오직 승리한 자만 치유해 주실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 생각은 복음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뛰어들어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려고 광분하는 것은 마치 허망한 신기루(3氣樓)를 잡으려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14.2)
 아직 열 두 제자들을 정식으로 택하기 전 갈릴리 지역에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절기를 지키기 위해 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성(城)에 다다른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시기 전 먼저 베데스다 연못가에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며 운집(雲集)해 있는 환자들을 찾아가셨다. 헛된 전설을 따라 그곳에 와서 치유를 기다리며 병으로 신음(呻吟)하는 처참한 환자들을 둘러보시고 그분의 마음은 참으로 측은해지셨다. 주님은 여러 횐자들 중에 가족들에게까지 버림을 받아 거기 연못가에 홀로 누워 실낱같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반신 불수(半身不隨)의 38년 된 중풍 병자를 보시자마자 그만 끓어오르는 연민의 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며칠 동안 굶고 잠도 자지 못한 채 피골이 상접해 있는 중풍 병자의 몰골은 참으로 기가 막힌 참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환자는 삶의 의욕 때문에 근근히 생명만 유지됐을 뿐 거의 죽은 자와 같았다. 가끔 물이 동할 때 머리를 들고 훤히 바라보기는 했지만 자력(自方)으로 먼저 물에 뛰어든다는 것은 그에게 턱없는 환상에 불과했다. 자기보다 힘센 자들이 먼저 뛰어들곤 한 것이다. 실망을 거듭한 중풍 병자는 그만 삶의 의욕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생애의 벼랑 끝에 이르고야 말았다. (15.1)
 “내 인생은 끝이야 마지막 한 가닥 치유의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어.” 중풍 병자는 점점 깊은 좌절의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런데 아, 이게 웬 일인가! 어떤 사람이 자기를 환한 얼굴로 굽어보며 치유의 소망을 일깨우는 게 아닌가! (15.2)
 “네가 낫고자 하느냐?” (15.3)
 그의 비참한 생애를 꿰뚫어 보시던 주님께서 다 죽어 가는 그에게 그렇게 질문한 것이다. 참으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저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마 12:20)시는 긍휼과 자비로 충만한 음성이었다. 중풍 병자는 너무나 자명(自明)한 질문에 단순히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만 하면 될 것을 주님의 의중(意中)을 간파하지 못하고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기진맥진(氣盡脈盡)한 채 대답했다. (15.4)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 (16.1)
 여전히 헛된 연못의 치료를 기대하던 그는 자기를 물에 밀어 넣어 줄 사람이 생겨 꺼져가던 삶의 의욕이 되살아나며 치병에 대한 희망을 가진 것이다. 다시말해 “낫기를 원하오니 여기 계시다가 저 물이 동할 때에 나를 제일 먼저 집어 던져 넣어 주십시오. 힘이 없으면 발로라도 차서 밀어 넣어 주십시오. 나는 지금 이판 사판입니다. 그냥 이곳에서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아무튼 제일 먼저만 밀어 넣어 주십시오”라고 한 것이다. 중풍 병자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연민이 넘치는 질문을 하신 분이 바로 만병(萬病)의 의원이신 예수님인 줄은 미처 몰랐다. 주님께서는 그 중풍 병자가 허망한 전설을 믿는다고 꾸짖지 않으셨으며 또한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활용하도록 요구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측은히 여기사 병의 원인인 죄를 용서하시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치유를 선포하셨다.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