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히브리서 연구) 제 2 장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대제사장 되심
 문장에서 보듯이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이 우리가 직면하는 시험과 다른 것이었다면 그것으로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이 이러한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4:15)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66.4)
 그리스도만이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불행과 유혹을 다 경험하셨다.여인이 낳은 사람으로서 그분처럼 격렬한 유혹을 받고 세상의 죄와 고민의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분처럼 넓고 부드러운 동정을 가진 사람 또한 다시 없었다. 인간의 모든 경험을 맛보신 그리스도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유혹과 싸우는 사람들을 동정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그 참 정상(情想)을 직접 경험하셨다.10 (66.5)
 “사단은 매 발걸음마다 그분을 공격하고 그분에게 가장 심한 유혹을 제시해 주기 위하여 언제나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벧전 2:22)셨다. 그분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고, 그분의 완전한 거룩함에 비례하여 고통을 겪으셨다. 그러나 흑암의 왕은 그분에게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유혹에 반응한 단 하나의 사상이나 감정도 찾지 못했다.11 (66.6)
시험
 본문에 사용된 헬라어 페이라스데이스(시험 받으셨다)는 동사 페이라조(시험하다, 유혹하다)의 부정과거 수동태분사이다. 명사는 페이라스모스이다. 성경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몇 가지로 사용되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본문에 사용된 단어이다. 명사형 ‘유혹(temptation)’, 또는 ‘시험’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당하는 내적인 시험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과 우리가 받는 시험은 같은 시험이다. (67.1)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은 우리가 당한 시험보다 더 극심한 것들이 많았다. 특히 신성을 사용하라는 유혹은 모든 인생들이 당하는 시험보다 더 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험이 모든 인성이 당하는 시험을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이 받는 시험에 더해진 시험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은 모든 인생이 받는 시험 외에 신성을 사용하라는 신성의 시험이 더해진 시험이었다. 인성으로서 모든 인간이 받는 시험 또한 그의 모든 일생동안 받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67.2)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동사페이라조의 부정과거 수동태로페이라스데나이)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4:1) (67.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으로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실 것이었다.···그리스도에게도 식욕은 첫 번째 큰 시험의 토대였다. 멸망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구속 사업이 시작되어야 한다.12 (67.4)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죄인의 자리에 두시고 아담이 넘어진 곳을 건너셨으며 인류에게 임한, 혹은 임할 그 어떤 시험보다 백배나 강한 광야의 시험을 견디셨다. 예수는 모든 유혹 받는 영혼이 저항할 수 있는 동일한 방법, 즉 자신을 영감의 기록에 위탁하고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시므로 사단의 유혹을 저항하셨다.13 (68.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오늘날의 어린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시험거리를 갖지 않으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성경 말씀은 그분이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하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한다.14 (68.2)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이 시험을 물리친 방법으로 승리할 수 있다! (68.3)
 우리를 시험(페이라스모스)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마 6:13; 눅 11:4) (68.4)
 시험(페이라스모스)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 막 14:38; 눅 22:40) (68.5)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도 있다. 우리를 연단시켜 강하게 하며 시련과 환란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한 시험이다. 헬라어 명사 도키메, 동사 도키마조(눅 12:56; 고전 11:28; 고후 8:8; 13:5)가 사용된다. ‘시험하다’, ‘살피다’, ‘분별하다’, ‘증명하다’라는 뜻이다. (68.6)
 비슷한 의미의 단어로는 헬라어 명사 귐나시아, 동사 귐나조(히 5:14)가 있다. ‘연단한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68.7)
 다른 하나는 시험하여 ‘미혹에 빠뜨린다’는 의미의 헬라어 명사 아파테, 동사 아파타오( 엡 4:22; 히 3:13)가 있다. ‘기만하다’, ‘속이다’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68.8)
 D. 시험과 죄의 차이점
 그는 인성을, 그것의 연약성들과 그것의 경향들과 그것의 시험거리들을 지닌 채 취하시고 ∙∙∙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히 4:15)으셨다.15 (69.1)
 문제의 제안 —본 연구의 “시험은 죄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다룰 때 죄와 마음의 교감이 이루어진 상태에서의 죗된 욕망을 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전제로 한 것이다. 또한 죄를 품어서 생긴 죄의 정욕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죗된 욕망을 품으면서 “나는 죄 없다”는 생각으로 기만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또한 시험 자체를 죄로 보고 낙심과 정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 또한 없게 되기를 바란다. (69.2)
 1. 시험의 능력(죄의 정욕(passion), 시험에 이끌리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시험 자체는 죄가 아니다. 시험에 사로잡혀 굴복할 때 죄가 되는 것이다. (69.3)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롬 7:5) (6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