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히브리서 연구) 제 2 장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대제사장 되심
 그리스도는 사람의 운명과 완전하게 일치되셨으며, 실패한 아담의 자리에 서셨다. 창조 당시의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귀한 존재로서 땅과 지으신 만물들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위양 받아 “영광과 존귀로 관 씌”움을 받았다. 그러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영광과 존귀의 관”을 상실하였다. 은혜의 언약은 그리스도가 새 아담이 되셔서 아담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것이었다. (56.1)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히 2:8) (56.2)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본 절은 시편 8장 5절을 인용한 것이다. 시편 8장에는 만물이 주의 발 아래 두실 때의 세상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서 누리는 사람의 행복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56.3)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5~9) (56.4)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속에는 만물이 사람(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복종하게 되어 있지만 아직은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바울은 만물로 사람에게 복종하게 하는 통치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죽음과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논증하고 있다. (57.1)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57.2)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킹제임스 성경에는 “그러나 우리가 죽음의 고난 때문에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신 예수를 보니”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은 죽음의 고난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이유는 모든 인간이 시험 아래 있기 때문에 시험 받는 인류를 도와주시고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2:18)신 것이었다. (57.3)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
 예수님은 아담을 따라 범죄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인류가 잃어버린 존귀와 영광을 회복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모든 인류를 받으시고 그를 보좌 우편에 앉히신 것은, 또한 아들 안에서 모든 인류를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도사람이 되셨고, 모든 사람의 죽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 (57.4)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58.1)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
 예수님 때문에 만물이 존재하고 그를 통하여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다. 즉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라는 말씀이다. (58.2)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사람이 들어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직 창조주만이 인간의 잃어버린 영광을 회복시킬 수 있는 자격이 있으셨다. (58.3)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합당하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형 프레포‘두드러지다’, ‘탁월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는데 있어서 당신의 공의와 자비에 가장 탁월한 방법을 선택하셨다. 단지 구주께서 죄의 책임을 지시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이 아니다.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인류의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품성과 부합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자체보다도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모든 인간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시고 시험을 받으심으로 모든 인간이 도달해야 할 품성의 완전, 죄 없는 생애의 완전을 이룩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시는 방법이 탁월하고 합당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탄생에서부터 십자가까지 가장 합당한 방법을 선택하셨다. 요한이 예수님에게 침례 베풀기를 주저할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고 하셨다. 이처럼 구주에게 있어서 모든 인간과 같은 입장이 되신 것은 가장 합당한 구원의 방법이었다. (58.4)
온전하게 하다
 헬라어 동사 텔레이오오‘완전으로 나아가다’, ‘도달하다’, ‘성숙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육체적, 지적, 영적 능력이 성숙해지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자라나는 매 단계마다 완전하셨다. 그렇지만 “고난으로 온전케 하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죽음의 고난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완전의 목표에 도달케 했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생애의 시험과 고난을 극복하시고 죽음까지도 정복하심으로서 완전한 분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리스도가 친히 모든 인성이 당하는 고난에 참여하심으로 온전함을 이루시고 모든 사람을 온전하게 하시는 방법은 참으로 탁월한 방법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중보자 없이 서신 경험은 장차 환난의 때에 중보자 없이 설 자들의 경험까지도 미리 맛본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인간의 대리자와 보증인으로서 하나님의 형벌로 고통을 당하셔야 하였다. 그분은 공의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으셔야 하였다. 그분은 죄인들이 중보자 없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셔야 하였다.1 (59.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5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