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미래의 인류의 상태에 관해서 무모한 추측을 하지만 이 같은 주제는 매우 주의 깊게 다루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고전 13:9, 12)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의 계시는 우리에게 사람의 미래 상태에 관한 정확한 사실들을 말해주는 정보도 제공한다. (270.1)
 이원론 사상으로 인해 그리스도교는 미래의 상태나 “천국”을 무형의 비물질적인 용어들로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는 영혼의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모든 의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다 함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성경적인 사실을 등한시 한 결과로 생긴 현상이다. 죽은 의인들은 육체로부터 이탈해 있는 의식을 지닌 존재들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들이 받을 상급도 그들이 죽을 때에 이미 주어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종류의 “천국”에 거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받은 자들이 거할 실제적인 두 장소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그 중 하나는 그들이 임시로 거처할 장소이고, 다른 하나는 영구히 거처할 장소이다. (270.2)
 1. 구원받은 자들의 임시 거처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천국은 실제로 존재하는 천국이다(왕상 8:30, 39; 시 11:4; 52:2; 80:14; 102:19; 마 5:16, 45; 6:9). 이 천국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에 떠나셨다가(요 3:13, 31; 6:38) 부활 후에 다시 올라가신(히 9:24) 바로 그 천국이다. 그분은 또한 재림의 날에 의인들을 그분에게로 데려가시기 위해 이 천국으로부터 강림하실 것이다(요 14:1-3; 살전 4:13-18; 벧전 1:4). (270.3)
 이 천국은 의인들의 임시 거처가 될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 모두는 하늘에서 그들이 누릴 영광과관련해서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왕의 특권인 심판의 직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단 7:22, 26; 고전 6:2, 3; 계 3:21; 20:4). 하지만 이 같은 직무는 악인들의 최종적인 멸망과 더불어 끝나게 되며, 그런 후에 의인들은 새 땅을 상속받게 된다(계 21:1-7; 참조 심판 III. B. 2; 천년기1. C. 2). (270.4)
 2. 구원받은 자들의 영구적인 본향
 새 땅에 대한 약속은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거룩한 땅을 정결케 하는 일을 그 배경으로 해서 이사야서에 처음으로 등장한다(사 65:17, 21-23; 66:22, 23).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이 예언들의 여러 국면 중에 이스라엘의 순종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지만, 이 예언들이 전체적으로는 신약에 의해 재확인되고 있다(마 5:5; 벧후 3:11-13; 계 21:1; 참조 묵시문학 II. B. 1). (270.5)
 이는 우리에게 기원론과 종말론이 서로 대칭적인 관계에 있음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본래 계획을 따라 세상을 “새롭게” 하고(마 19:28) “만유를 회복하실 때”(행 3:21)가 이르러 올 것이다. 그 후에는 만물이 그분의 뜻과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히 12:27). (270.6)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이 땅에 건설된 인류의 본향도 들어 있다(시 8:6-9). 여섯 째 날에 다른 육지 동물들과 함께 창조된 사람(창 1:24)은 땅에 있는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2:7) 본질적인 면에서 땅과 연결되어 있다(3:19; 참조 시 115:16). 하나님과 맺는 언약에 있어서 땅은 언제나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12:7; 13:14, 15; 15:18; 17:8; 26:3, 4).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가나안 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그분의 백성이 장차 상속받게 될 온 세상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롬 4:13: 히 11:13).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어떤 다른 종류의 우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사야 65:17에 쓰인 용어들은 그것들의 기본 의미가 잘 정의되어 있는 창세기 1장에서 유래된 용어들이다. “하늘”은 야훼께서 새들이 나는(20절) 궁창에 붙여주신 이름이며(8절), “땅”은 육지의 표면이다(10절).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생소한 우주공간이나 다른 행성이 아니라 불로 정화되어 새로워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다(벧후 3:10-13; 시 102:26, 27; 히12:27, 28). 의인들은 이곳에서 생명을 잃는 일이 없이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물질적 특성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분명 삶의 관계적 측면이 물질적 환경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270.7)
 새 땅에서의 관계는 의가 그 기초가 되는 관계이다(벧후 3:13).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때에 그들의 반역이 죄의 저주로 인해 하등 동물들로 호전전인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던 것처럼(창 3:14-19), 온 우주에 거하는 하나님의 피조물들 사이에 고동치는 하나의 조화된 맥박이 그것들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인해 평화로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갈 것이다(사 11:5-9;참조 II. C. 2). (271.1)
 이 본향에는 죄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들은 그곳에서 사망이나 고통 같은 죄의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을 성취하면서 의(義) 가운데서 안전하게 거하게 될 것이다(계 21:4). 우리는 그곳에서 죄와 고통과 악으로 점철된 인간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계획의 우회로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참조 새 땅 II.) (271.2)
 3. 미래의 우리의 몸
 성경적 일원론(인간에 대한 일원론적인 개념, 참조 I. E. 2)에 대한 기술을 끝맺음하기 위해서는 간략하게나마 구원받은 자들의 미래의 육체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 성경적 종말론의 확고한 입장은 구원받은 자들이 그들의 상급을 새 땅에서 받게 된다는 것이다 (271.3)
 이미 바울의 시대에 어떤 이원론자들은 구원받은 자들의 최종적 운명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을 완전히 비물질적인 어떤 상태를 바라는 것으로 격하시켰다(딤후 2:18). 이러한 오류에 대항한 바울의 노력 및 그리스도의 부활과 마지막 날에 있을 의인들의 부활에 대한 성경의 명백한 증언들 덕분에(롬 8:11, 23; 고전 6:14-20; 15:20, 23, 53; 골 1:18; 계 1:5), 전통적인 그리스도교까지도 미래의 육체가 영구히 존속할 것이라는 견해를 유지해 왔다. (271.4)
 하지만 후에 등장한 이원론자들은 고린도전서 15:44-49에 기록된 바울의 말을 근거로 삼아서 부활한 성도들의 몸이 지니게 될 물질적 특성들을 거의 무시하였다. 이 성경구절에서 바울은 그 당시에 사두개인들과 기타 이단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현재의 우리의 몸은 영원히 존속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거나 또는 그럴 만한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자신들의 이해를 근거로 부활을 부정하였다(35절).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바울은, 곡식의 씨와 새롭게 태어나는 식물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해서 연속성이 깨지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한다(36-41절). 그런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 그 변화가 구원받은 자들의 몸 안에서 일어나게 될 것임을 보여 준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42, 43절).(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부활 이전의 몸과 부활 이후의 몸이 완전히 동일한 몸이라고 하는 바리새파의 극단적인 견해[바룩2서 50:2]와는 전혀 다른것이었다.) (271.5)
 바울은 계속해서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44절)고 말한다. 〈개정표준역(RSV)〉과 기타 영어 번역판들에서 “physical”(“육체의” 또는 “물질의”)로 번역된 형용사가 〈제임스왕역(KJV)〉과〈새국제역(NIV)〉에서는 “natural”(“자연의” 또는 “천연의)”로 번역되었다. 여기서 “spiritual”“physical”에 대비시키는 사람들은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신령한 몸”을 비물질적 몸으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에, “spiritual”“natural”에 대비시키는 사람들은 “신령한 몸”을 자연적인 몸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어떤 “초자연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몸으로 생각한다. 여기에 묘사된 사람의 모습은 태초에 창조된 사람의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 (271.6)
 하지만 헬라어 원본에는 이러한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서로 대조를 이루는 이 두 형용사 “육의”“신령한”은 각각 헬라어 단어 프쉬키코스프뉴마티코스를 번역한 것이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프쉬케프뉴마는 둘 다 내면의 삶에서 지니는 각각의 역할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 용어들이다. 이러한 이해를 기초로 해서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프쉬케적인(psychic)몸으로 심고 프뉴마적인(pneumatic) 몸으로 다시 사나니”가 된다. 그러므로 이 성경구절은 물질적인 몸과 비물질적인 몸, 또는 자연적인 몸과 “초자연적”인 몸을 서로 대비시키거나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대립적인 특성들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성경구절은 부활한 몸을 묘사하는데 쓰이는 형이상학적인 용어들을 사용해서 현재의 우리의 몸을 묘사하고 있다. 현재 우리 몸의 “프쉬케적인” 상태가 물질적 특성을 배제하지 않는데, 왜 미래의 우리 몸의 “프뉴마적인” 상태는 그것을 배제 해야만 하는가? (272.1)
 프쉬키코스프뉴마티코스라는 두 형용사는 묘사와 설명을 위해 쓰인 용어들이지 어떤 완전한 의미와 정의를 나타내는 용어들이 아니다. 우리의 몸이 “프쉬케적인” 몸인 것은 우리가 프쉬케만을 소유했기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 외에도 물리적 체계를 비롯한 다른 많은것들도 부여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프쉬케적인” 몸과“프뉴마적인” 몸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신약에서 프쉬케는 생명 있는 존재의 핵심적 본질로, 때로는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참조 마 2:20; 요 10:11; 행 2:41-43; 롬 2:9; 16:4; 고후 1 2:5; 빌 2:30). 하지만 많은 경우에 이 용어는 프뉴마와 대조를 이루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한 구절들에서는 프쉬케가 회심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타고난 그대로의 본질을 나타낸다(프쉬키코스“자연적[natural]”으로 번역한 〈제임스왕역(KJV)〉과 〈새국제역(NIV)〉의 번역이 여기에서 유래된 것임). 프뉴마는 이와 대조적으로, 종종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통해 일어나는 사람의 내적 변화와 동일시되고 있다(고전 2:14, 15;유 19). 이러한 내적 변화는 부활한 후에 영광화를 통해서 완성되는데, 이 부활 또한 성경에서 종종성령이 하시는 일로 묘사되고 있다(롬 1:4; 8:11). (272.2)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현재의 몸이 프쉬케를 부여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프쉬케적인(psychic)” 몸이라고 일컬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몸은 아직 “프뉴마적인(pneumatic)” 몸은 아닌데, 이는 그 몸이 “프뉴마적인” 몸이 되는 것은 부활의 날이 되어서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쉬케적인” 몸과 “프뉴마적인” 몸의 대조는 그 앞의 성경구절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썩을 것”“썩지 않을 것”, “욕된 것”“영광스러운 것”, “약한 것”“강한 것”의 대조와 정확히 부합한다. (272.3)
 다음과 같은 번역이 이런 개념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연적인 생명을 부여받은 몸으로 심고 초자연적인 생명을 부여받은 몸으로 사나니.” 에덴에서는 생명나무를 통해서 초자연적인 생명을 가진 자연적인 몸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 성경구절에는 미래의 몸의 물질적 특성을 부정하거나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본래 상태로의 회귀를 부정하는 어떤 암시도 내포되어 있지 않다. (2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