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그림자 제8편 레위기의 율법과 예식 제 36 장 레위기의 각종 율법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을 가질 수가 없다(요 15:4~5). 그의 생애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크신 주인의 지도를 받고 있다. 이것은 옛날의 레위기의 예식들과 의식들에 의하여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272.1)
 고대 이스라엘인의 일상생활의 세부사항들이 모두 하나님의 지도하에 있었다. 그들의 음식, 의복, 농사와 건축, 매매 등 모든 것이 모세의 율법에 정해져 있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요구사항들이 단지 무의미한 형식들과 예식들을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일 테지만 그의 주인의 발자취를 세심히 살피는 성경 연구자에게는 레위기의 율법 하나하나가 의의 태양으로부터 귀중한 빛줄기를 그에게 비춰주는 하나의 반사경으로 보일 것이다. (272.2)
 우리는 성경에서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신 22:11)는 말씀을 읽는다. 왜 이런 요구가 주어졌나 하는 질문이 가끔 생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뒤에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들 가운데 하나는 그들을 위해 옷을 지어주신 것이다(창 3:21). (272.3)
 옷은 그리스도의 의의 표상이며, 이 옷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용서를 받은 모든 자들을 입히신다(사 61:10). 죄를 짓기 전에 인간은 빛과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입는 의복들은 그분이 구속받은 자들에게 입혀주실 하늘의 의상을 생각나게 하도록 계획하셨다(계 3:5; 19:8). (273.1)
 하나님께서는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사 44:6; 42:8). (273.2)
 생애의 한 부분은 우리 자신의 의의 “더러운 옷”(사 64:6)으로 입히고, 나머지 부분은 순결하고 흠 없는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로 입힐 수는 없다. 우리는 가정과 교회 생활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일상의 사업에서는 재물을 섬길 수는 없다. 그런 일을 계속하는 사람은 결코 하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리라”(마 6:24; 눅 16:13). (273.3)
 구주께서는 우리의 자기의(自己義)의 더러운 옷에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기워 붙일 수 없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눅 5:36). (273.4)
 평상복을 짜는 데에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짜는 일을 양심적으로 거절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계획하신 교훈을 깨달은 이스라엘 사람은 또한 죄짓기를 기꺼이 그칠 것이었다. 한 종류의 천으로만 만들어진 그의 의상 자체가 충성된 자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의 완전한 두루마기를 그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었다. (273.5)
 이스라엘 사람이 아침마다 하루의 일과를 수행하러 나갈 때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신 22:10)라는 또 하나의 명령이 그를 속박했다. 소는 정결한 짐승이었으나 나귀(ass) 혹은 당나귀(donkey)는 부정한 짐승이었다(레 11:3~4). 둘 다 유용한 짐승이었으나 함께 멍에를 메게 해서는 안 되었다. (274.1)
 구주께서는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데려감을 당하도록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처해 있으나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되도록 기도하셨다(요 17:15).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한 나귀를 사용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이용할 수는 있으나 세상의 악한 것들 가운데 어떤 것과도 멍에를 같이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랴?(고후 6:14~17). (274.2)
 이 명령에는 결혼관계와 모든 사업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신앙을 갖지 않은 사업가들은 때때로 그들의 사업을 경영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그의 신앙적 정절을 손상하지 않고는 사용할 수 없는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 (274.3)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어야 하며, 그가 염려와 곤란의 짐을 질 때에 그리스도께서 도우실 수 없는 사업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 구주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마 11:29)고 말씀하신다. (274.4)
 구약의 모든 교훈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다. 이것은 특히 다음의 명령에서 더욱 그러하다.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신 22:9). (275.1)
 원예가들은 이 명령의 진가를 안다. 밀과 귀리를 함께 뿌리면 귀리는 망치고, 밀은 상한다. 레위기의 다른 율법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이스라엘 백성의 일시적인 번영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그것은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진실하게 남아 있고자 하면, 악한 무리들과 연합해선 안 될 것을 가르쳤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 15:33). (275.2)
 「개정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 신약에는 “악한 친구들은 선한 행실을 부패시킨다”고 되어 있다. 또 「20세기신약」(Twentieth Century New Testament)은 더욱 강하게 표현하여, 악한 친구와 어울리는 것은 외면적 행실 그 이상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성경은 “속지 말라. 선한 성품이 악한 친구들로 말미암아 훼손을 받는다”라고 말한다. (275.3)
 「시리아어신약」(Syriac New Testament)은 “악한 동무” 혹은 “악한 교제”라는 용어 가운데 포함된 의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다. “속지 말라. 악한 이야기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더럽히나니.” 구두(口頭)로 듣든지, 아니면 유행하는 소설을 읽음으로써든지, 혹은 일간신문의 기사를 통해서든지 간에, 그것들이 받아들여지는 방법 여하에 상관없이, 이 말은 여전히 진실이다. 즉 아름다운 마음씨는 그런 것들을 통하여 더럽혀진다. (275.4)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는 밀이 밭에서 다른 씨와 함께 뿌려짐으로 손상을 입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가장 신령한 마음의 소유자라도 악한 사람들과 교제함으로 빗나가게 될 터이니, 이는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짐과 같기”(딤후 2:17) 때문이다.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저는 열국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저로 왕을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저로 범죄케 하였나니”(느 13:23~26). (276.1)
 “바라봄으로 우리는 변화된다”라는 말은 우리의 존재에 관한 법칙이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수건을 벗은 얼굴로 바라보면, 그의 형상으로 변한다(고후 3:18). 우리의 마음이 악한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 우리도 악해진다. 다윗처럼 우리도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 119:37)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276.2)
 가옥을 건축하는 개인에게는 이런 명령이 주어졌다. “네가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르는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신 22:8). 팔레스타인의 집들은 일반적으로 지붕이 평평하여, 그 위에서 사람들은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거닐기도 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또 잠을 자기도 한다. 따라서 난간의 필요성은 매우 뚜렷하다. (276.3)
 그러나 이 명령 가운데는 우리가 배울 하나의 더욱 깊은 영적 교훈이 담겨져 있다.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하는데 모든 집은 주님께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 3:9~17). (27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