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3 부 안식일과 생명 제 15 장  안식일과 가정, 에덴으로 가는 두 길
 고향과 어린 시절로 가는 길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한다. 가고싶은 고향이 있고, 가고싶은 그 고향에 언제나 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416.1)
 고향은 어떤 곳인가.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있는 곳이다. 우리들의 낙원 같은 시절이 있는 곳이다. 성경에는 낙원이 있다. 낙원은 인류의 어린 시절이 있는 곳이다. 인류의 고향이다. 인류는 그같은 고향을 가지고 있어서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고향을 찾고 싶을 때 언제나 찾아갈 수 있듯이 그 에덴에 찾아갈 수 있다면 인류는 한층 더 행복할 것이다. (416.2)
 사람들은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고 떠나온 옛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람들의 이와 같은 욕망에서 출발한 학문들이 역사요, 인류학이요, 고고학이다. 민속학이요, 신화학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노력이다.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과 물건들과 공간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살던 옛날을 재현하는 노력들이다. 떠나온 시간들로 다시 돌아가 보는 노력들이다. (416.3)
 사람들은 이처럼 옛 공간을 통하여 옛 시간으로 돌아간다. “옛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면” 부분적으로나마 “옛 놀던 옛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고향의 옛 초등학교 교정에 “오늘 와 다시 서면” 부분적으로나마 우리가 떠나온 어린 시절의 그 시간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고향의 옛집에 “오늘 와 다시 서면” 지금은 돌아가시어 여기 계시지 않는 부모님과 형제들과 이웃의 옛날이 부분적으로나마 되살아 나는 것이다. (416.4)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 때문에 고향을 찾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 때문에 역사를 공부하고, 인류학과 고고학 탐사에 참가한다. 인류의 길고 긴 문학과 예술과 전설의 역사는 이같이 인류가 고향을 갈망하고 추구해 온 그리고 노래해 온 역사이다. 에덴은 인류가 떠나온 고향이다. 인류가 떠나와 그리워하는 고향이다. (417.1)
 에덴의 날로 가는 공간의 길
 그렇다면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많은 종교들이 그 길을 가르친다. 성경도 인류가 어린 시절에 놀던 에덴의 날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한다. 거룩한 곳 하나님의 성전에서 에덴의 날을 되찾을 수 있다하고 거룩한 시간,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서 에덴의 공간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 거룩한 곳의 대표가 가정이고, 그 거룩한 시간의 대표가 안식일이다. 안식일과 가정은 에덴 밖의 인류에게 남겨진 에덴적 기원을 가진 두 개의 제도이다. (417.2)
 인류의 거룩한 가정은 작은 천국이다. 그 공간에서는 하늘의 시간이 흐른다. 에덴의 나날이 이어진다. 인류가 그 옛날 어린 시절에 놀던 “옛 동산”이다. 에덴의 동산이다. 이 동산이 낙원의 세월이 재현되는 공간이다. 고향의 옛 집 같은 곳이다. 사람들이 옛 가정으로 갈 때 사람들은 에덴으로 가는 것이다. (417.3)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에덴의 동쪽으로 떠나올 때, 에덴의 모든 것을 다 놓고 떠나왔다. 생명 과일들을 뒤에 두고 떠나왔고, 생명 강수를 뒤에 두고 떠나왔다. 은혜의 두루마기를 벗어놓고 떠나왔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에덴의 것을 가지고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에덴의 것 하나를 지니고 가게 하셨다. 인류가 에덴으로 다시 찾아올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것이 가정이다. 가정은 에덴의 제도이고, 에덴의 기관이다. 이리하여 인류는 가정을 통하여 이 땅에서 에덴을 부분적으로 회복하고, 에덴의 삶을 부분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는 가정을 통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에덴의 삶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417.4)
 그렇다면 모든 가정은 천국으로 가는 문이고 길인가? 모든 가정 생활은 천국 생활이고 에덴의 삶인가? 하늘나라 에덴의 삶은 사람이 인생으로 사는 삶이 아니다. 사람이 목숨만으로 사는 삶이 아니다. 사람이 생물로서만 사는 삶이 아니다. 사람이 인간으로 사는 삶이다. 사람이 관계를 트고 사는 삶이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는 삶이다. 부부가 되고 자식이 되는 삶이다. 부부의 영으로 살고, 부모의 영으로 살고, 자녀의 영으로 사는 삶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삶이다. 인생이 인간의 영으로 그리고 부부와 부모와 자녀의 영으로 살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으로 사는 나라가 에덴이다. 부부와 부모와 자녀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의 은사이다. 사람이 성령을 나누어 받은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나누어 받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나누어 받은 것이다. 에덴동산을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인생이 인간으로 향하는 길이 인간이 에덴으로 향하는 길이다. 인생이 부부와 부모와 자녀로 향하는 길이 에덴으로 향하는 길이다. 가정으로 가서 가족이 되는 길이 우리가 떠나온 에덴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길이다. (418.1)
 이처럼 인류는 가정이란 특수한 공간에서 인류가 오래 전에 상실한 에덴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을 일곱 시대의 예언적 상징으로 이해하려는 방식도 공간을 통하여 시간으로 가는 성서적 인식 방식의 하나이다(계 2, 3장). (418.2)
 에덴의 세계로 가는 시간의 길
 마찬가지로 인류는 특정한 시간을 빌어서 잃어버린 공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가. 인류에게 특정의 공간을 빌어서 일찍이 상실했던 에덴의 어린 시절을 되찾게 하였듯이, 특정의 시간을 빌어서 잃어버린 옛 나라, 에덴의 공간으로 되돌아가게 하지는 않았는가. 옛 동산에서 옛 시절을 되찾듯이, 옛 시절에서 옛 공간을 경험하게 하지는 않았는가. 생명나무와 생명강물의 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시간의 배가 우리에게 마련되어 있지는 않는 것인가. 우리가 시간의 배를 타고 에덴의 옛 삶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까. (419.1)
 제칠일 안식일이란 시간이 바로 그러한 시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에덴으로 초청하는 하나의 길이 제칠일 안식일의 시간이다. 하나님은 이 시간을 통하여 태초의 세계와 태초의 삶을 인류들에게 재현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을 통하여 인류의 마음에 에덴의 공간을 재현하려는 것이다. (419.2)
 하나님은 제칠일 안식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재현하시려는 태초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제칠일 안식일을 통하여 재현되는 에덴적인 세계와 삶은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해와 달과 별이 있으라” 하는 세계이다(창 1:3, 15).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고 없이 하는 세계가 아니다. 살생과 살인의 세계가 아니라, 생명을 생육하고 번성케 하는 세계이다(창 1:21, 22). “너를 나쁘다”고 정죄하고 너를 향하여 “없이 되라”고 아우성치는 세계가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너 좋다”(창 1:4), “심히 좋다”(창 1:31), “거룩하다”고 선언하는 세계이며, 모든 생물이 생물들에게 “너 좋다,” “심히 좋다,” “거룩하다”(창 2:3)고 화답하는 세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너는 의롭다”고 선포하는 세계이다. 하나님이 죄 많고 불의한 우리를 의롭고 착하고 거룩하다고 선포하는 세계이며, 하나님이 너를 의롭다 하시는데 누가 너를 감히 정죄할 수 있느냐고 만물이 화답하는 세계이다(롬 8:33, 34). 그러므로 너희는 “풍성히 살라”(요 10:10)고 하나님과 만유가 우리의 삶을 지지하는 세계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이러한 세계로 우리를 초청하는 하나님의 시간적 수단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문으로 나아가도록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기회이다. 따라서 안식일 교인은 누구인가. 제칠일 안식일 안에서 태초의 세계와 태초의 삶으로 초청된 사람들이며, 그 삶을 맛보는 사람들이다. 안식일 안에서 태초의 세계와 태초의 삶을 이웃들에게 증거하고 나누어주는 사람들이다. (419.3)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제칠일 안식일은 그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천국과 에덴으로 인도하는 길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적 경험에서 가정이 작은 천국이라고 하여 모든 가정이 작은 천국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제칠일 안식일을 통하여 에덴의 세계와 삶으로 갔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칠일 안식일이 사람들에게 삶의 미로로 경험되고, 삶의 거친 길로 경험되었던 역사적 사례들도 적지 않은 것이다. 왜 그랬는가. 인류가 가정의 본성과 기능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안식일의 본성과 기능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류가 가정과 안식일의 본성과 기능대로 가정과 안식일의 길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20.1)
 에덴의 날로 가고 에덴의 세계로 가는 참 가정과 참 안식일
 가정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한다면 현실적으로 모든 가정이 에덴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인의 노래처럼 “옛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옛 시인이 허사로다” 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가정의 경험도 이 땅에는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오늘의 대부분의 가정은 아담과 하와가 놀던 옛 가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산천은 어찌하여 옛날과 같지 않으며 가정은 어찌하여 옛 에덴의 날과 같지 않는가? “옛 섰던 그 큰 소나무 배어지고 없기” 때문이다. “옛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는 옛 동산”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삶을 재현할 수가 없다. 이미 옛 동산이 아니며, 이미 옛 가정이 아니다. 옛 동산은 옛 섰던 그 큰 소나무가 있어서 옛 동산이다. 마찬가지로 옛 가정도 “그 큰 나무”가 있어서 옛 가정이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첫 가정인 옛 에덴 동산에는 가운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창 2:9).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창 2:15). 하나님이 사람을 가정에 두어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을 때 생명나무를 함께 다스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함께 지키게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17) 하셨다. (420.2)
 그런데 인류는 이 나무의 실과를 유린하고 이 나무를 유린함으로써 인류의 첫 가정을 유린하고 에덴을 유린하였다. 이로써 가정이 에덴이고 가정이 천국이라는 옛 말이 허사가 되게 되었다. 옛 섰던 옛 동산이 옛날과 같은 동산이 되려면 지금은 “베어지고 없는” 그 큰 나무가 복원되어야 한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복원되어야 한다. (4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