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3 부 안식일과 생명 제 14 장  안식일, 기억과 기념의 세계
 영적인 삶에서 기억의 몫
 안식일은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에 대한 사람의 관계들을 강조하는 날이다. 창조와 더불어 맺어진 사랑의 관계를 더욱 심화시키고 고양시키며 견고케 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이러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날이다. 관계의 삶이 바로 영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식일은 사람의 관계를 가장 극진한 삶의 도리, 곧 천륜의 옷으로 옷 입히고 인륜의 띠로 묶은 날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영적 존재로 만드는 언약의 날이기 때문이다. (403.1)
 그런데 사람의 관계와 사람의 영적 활동은 모두 사람의 기억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진다. 기억이 쓰러지면 사람의 사회적, 지적, 도덕적, 영적인 삶도 함께 쓰러진다. 한 단락의 노래 가사와 곡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사람은 마지막 낱말과 음절을 듣기까지 최초의 낱말과 음절을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특정한 사람에 대하여 부모나 자식이나 친구의 삶을 살기 위해서도, 그 사람과 그 사람의 특별한 모양과 그의 신분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삶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기억이 끝나면 모든 관계가 끝난다. 언약도 끝나고 사람의 도리도 끝난다. (403.2)
 기억이 관계의 토대이고 언약의 핵심이다. 사람의 영적 생명의 지성소가 기억에 있다.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할 영혼의 지성소가 기억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그 안에 두었기”(출 23:21) 때문이다.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가 기억의 자리이다. 영혼의 빛이 거기서 나온다.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에 대한 가장 절실한 마음을 담고 있는 자리가 기억의 자리이다. 가장 아름다운 행복도, 안타까운 사랑도, 힘든 고통도, 벅찬 기쁨과 소망도 기억 속에 담겨 있다. 따라서 사람의 가장 기초적인 사랑과 윤리가 기억이고 가장 높은 사랑과 도덕이 기억이다. 모든 선한 행동이 기억에서 출발하고, 가장 귀한 대접도 마음의 기억이며, 그 기억의 다짐이다. 기억은 바로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최대의 바램은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이다. 기억이야말로 최대의 보은이고 사랑이다. 그리고 망각과 망덕이야말로 최대의 배은이요 배신이다. (403.3)
 그리하여 은혜를 잊지 않고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은 그 은혜와 사랑을 종이에 쓰고 돌에 새기고 마음에 간직하여 기억한다. 하나님도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겨”(사 49:16) 사람을 기억하신다고 하셨다. “저희와의 새 언약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 렘 31:33)고 하셨다.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고 하나님의 마음에 기억되는 존재들은 모두 거룩한 존재이고 구원 얻을 존재들이다.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에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을 것이다”(사 4:3). “무릇 책에 기록된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단 12:1) 하였다. (404.1)
 진실로 사람은 비록 그 육체적 생명이 끊어져 땅에 묻힌다 하여도 그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마음에 기억되고 있는 한 그는 결코 죽은 자가 아니다. 그는 어느 순간이든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천사장의 호명소리와 더불어 무덤에서 깨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살전 4:16). 기억이 생명이고 기록이 생명이다. 오직 “어린양이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모두 짐승에게 경배할 것이다”(계 13: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고 말씀하셨다. 기억에 거룩이 있고 기억에 생명이 있고 기억에 구원이 있다. 보혜사 성령도 우리의 기억을 도우시는 성령이다(요 14:26). 우리의 기억을 도움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도우시는 성령이시다. (404.2)
 안식일은 기억의 날이며, 기억해야 하는 날이고, 기억을 더욱 튼튼하게 하는 날이다. 튼튼한 기억을 통해 튼튼한 생명으로 가고, 사람의 튼튼한 본분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기억을 통하여 사랑과 보은의 깊은 기쁨과 보람으로 가는 날이다. 그리고 기억을 통하여 “나의 사랑과 삶이 하나님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영원히 기억되고 보존되기를” 바라는 영혼의 소망을 키우는 날이다. 그리고 “나의 마음에 하나님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과 삶이 영원히 기억되고 보존되리라”는 자신의 결의를 다짐하는 날이다. 그러나 이날은 나 혼자 이 기억의 소망과 결의를 불태우는 날이 아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에게 맡긴 모든 것”과 너희를 위하여 행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요 14:26)는 날이다. (405.1)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
 성경상 자신의 생명이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기를 바라는 사람의 소망이 가장 비장하게 피력되고 있는 장면은 골고다 십자가의 회심한 강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일 것이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십자가상의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호소하는 영혼의 부탁도 그 어떤 것 못지 않게 비장하고 강렬한 호소이다: “아버지여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두 경우 모두 최후를 앞에 둔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유언이었다. 이 마지막 소망이 바로 기억의 부탁이었던 것이다. (405.2)
 두 사람은 모두 십자가에서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두 사람의 기도는 인류의 기도를 대신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은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예수]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1)라는 강도의 고백은 우리를 대신한 고백이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라는 강도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였다. 이 기도는 운명의 순간에 우리가 드릴 기도이다. 십자가의 강도가 우리에 앞서 우리를 대신해 올린 기도이다. 그의 기도는 즉각 응답되었다. 그의 기도가 응답되면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었다. “오늘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406.1)
 예수님의 기도도 우리를 대신한 기도였다. 그는 죄가 없으시면서도 죄로 죽을 우리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렸다. 그리고 죄로 죽어 가는 죄인의 고통과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의 낙망과 절규는 우리의 낙망과 절규였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그리고 그의 기도는 그가 위하여 죽어 가는 우리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는 기도, 우리 모든 죄인들의 탄원이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 기도는 죄 많은 우리가 마지막 숨을 내 쉬기 직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드릴 영혼의 부탁이었다. 예수님이 우리에 앞서 우리를 대신하여 드린 영혼의 부탁이었다. (406.2)
 이 기도의 응답은 어디서 들리는가. 짙은 구름으로 뒤덮인 골고다의 하늘로부터는 아무 소리도 우리 귀에 들린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응답은 회심한 강도의 부탁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대답에 이미 있었다. “오늘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406.3)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예수님이 “영혼의 부탁”을 토로하고 운명하던 순간에 마치 칠흑 같은 골고다의 하늘이 번개로 찢어지듯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마 27:51). 이때 번개로 찢어지는 골고다의 하늘로부터 3년 전 요단강의 하늘위로부터 쏟아지던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님의 귀에 들렸을 것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 “내가 죄인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너를 살리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고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너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리라”(행 5:30, 31). “네가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리라”(히 8:1). (407.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당부를 생각하면서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의 기도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너희가 너희의 땅과 너희의 삶에 임할 때 “안식일을 기억하고 나를 기억하라”는 하나님의 당부, 곧 넷째 계명의 당부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인간의 간구의 맞은편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상에서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부르짖던 우리들의 처절했던 심정을 잊고서는 “안식일을 기억하고 나를 기억하라”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르짖은 “영혼의 부탁”에 그렇게 속히 응답하시고 그렇게 응답하신 “약속에 그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신 7:8)을 생각하지 않고는 “안식일을 기억하고 나를 기억하라”시는 하나님의 호소에 우리가 바르게 대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407.2)
 안식일을 기억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호소를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억을 처절히 부르짖어야 했던 우리의 지난 날들을 기억해야 한다. 절박한 삶의 한 가운데서 그리고 그 끝 벼랑에서 우리는 저 십자가의 강도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의 기억을 간청했다. 애굽에서 “고역을 인하여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기억과 구원을 부르짖었으며(출 2:23), “홍해에서 부르짖었다”(출 10:11): “우리를 기억하소서,” “우리와의 언약을 기억하소서.” (407.3)
 “하나님이 그 고통을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면하셨다”(출 2:24, 25). “주께서 들으시고 이적과 기사를 베푸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나라 온 백성을 치셨사오며”(느 9:10), “주께서 또 우리 열조 앞에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사 저희로 바다 가운데로 육지같이 통과하게 하시고 쫓아오는 자를 돌을 큰물에 던짐같이 깊은 물에 던지시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추셨사오며 또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저희와 말씀하사 정직한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저희에게 주시고 거룩한 안식일을 저희에게 알리며 주의 종 모세로 계명과 율례와 율법을 저희에게 명하시고 저희의 주림을 인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주시며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또 주께서 옛적에 손을 들어 맹세하시고 주마하신 땅을 들어가서 차지하라 명하셨다”(느 9:10-15). (408.1)
 “우리 열조가 교만히 하고 목을 곧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패역하여 스스로. . .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다”(느 9:16-17). 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고. . . 하나님을 크게 모욕하였으나 주께서는 연이어 긍휼을 베푸사 저희로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름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고 불기둥으로 길을 비추사 떠나게 아니하셨사오며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로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를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사 사십 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사오며 또 나라들과 족속들을 저희에게 각각 나누어주시며 주께서 그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시고 그 열조에게 명하사 들어가서 차지하라 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이르게 하셨다”(느 9:28). (408.2)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주께서 경계하셨으나 저희가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여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어 밀며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다. . . 그러나 주께서 여러 해 동안 용서하시고 또 선지자로 말미암아 주의 신으로 저희로 경계하시되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의 손에 붙이고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로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느 9:29-31). (409.1)
 하나님이 그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 언약에 신실하심이 이와 같았다(신 7:9). 우리들이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었사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애 5:20)라고 주님을 원망하고 탄식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을 듣고 자신의 언약을 지키셨다”(출 6:5). (409.2)
 안식일을 기억하라 나 여호와를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