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사용된 용어들의 정의를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다.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라는 표현은 영어 표현에 흔치 않다. 또 가브리엘 천사의 이 말은 히브리어로도 이례적인 표현에 속한다. 구약 성경은 어떤 사람의 단순한 언약 체결에 대해 말할 때에 언제나 “쪼개어 언약을 맺음”(cutting a covenant)*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언약을 굳게 정하다”라는 번역의 원문은 그 표현 구성이 전혀 다르다.

* cutting a covenant란 관용어는 동물의 희생을 쪼개어 여러 제단에 쪼갠 희생 제물을 올려 놓던 고대의 관습에서 유래한 것 같다. 언약 체결의 쌍방은 쪼갠 희생을 올려 놓은 제단들의 사이로 지나가 는 것이 상례다(창 15장).
이 의식이 뜻하는 바 의의는 “우리 중 어느 쪽이 이 언약을 쪼개면 이 동물들처럼 쪼개지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에 나타나 있다.
(223.3)
 자, 예수님은 그가 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 가장 확실하게 언약을 체결하셨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포도주 잔을 높이 드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그분이 “언약”이란 단어와 “많은 사람을 위하여”라는 관용구를 사용한 사실은 그분이 최후의 만찬에서 다니엘 9장 27절“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라는 구절을 생각하고 계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분은 자신의 피에 대해 언급하심으로 그 언약이 자신의 십자가 희생에 의해서만 유효케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부자가 “마지막 유언과 증언”에서 친구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이라고 했다면 그 친구가 무엇인가 유산을 받게 되는 것으로 생각해도 된다. 그러나, 그 일이 현실로 나타나려면 그 부자가 죽은 다음에라야 가능하다. 갈 3:15~18히 9:15~17은 새 언약과 이런 유언을 비교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이 언약을 맺은 그 순간부터 유효하다. 하나님은 거짓말 하지 않으며(히 6:18), 예수님께서 어떤 대가가 요구되어도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를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의 본질상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죄를 용서 하실 수가 없다. 새 언약의 효력이 나타나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요구되었다.
(223.4)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체결하신 언약은 물론 그 영예스러운 “새 언약” 이다(겔 36:25~28; 렘 31:31~34; 히 8:10, 11). 이미 167, 168페이지에서 토의한 바 있다. 이 언약은(1) 모든 죄의 용서, (2) 하나님의 선민의 일원(一員)이 되는 자격, (3)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에 일치하는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하늘의 힘 등을 제공한다. (223.5)
 예수님은 분명히 갈바리에서 이 언약을 체결 하셨다. 그러나, 다니엘 9장 27절에는 단순히 그가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되어 있지 않다. 에드워드 영(Edward Young) 교수가 정확히 그 사실을 지적했다.9 (223.6)
(다니엘 서의) 저자는 그가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관용구로는 “쪼개어 언약을 맺다”(to cut a covenant)란 것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관용구는 이것이 아니다. 자, 만약 저자가 언약이 체결될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려고 했다면, 어째서 그런 뜻을 나타내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관용구를 사용하지 않았겠는가? 어째서 그는 성경의 다른 곳에는 단 한번(시 12:4, 여기에서는 아첨하는 입술의 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밖에 사용된 일이 없는, “이기게 하다”란 낯선 어구를 굳이 사용한 것일까?
(223.7)
 R.S.V.(개역 표준 번역)의 “그가 강력한 언약을 체결하리라”에는 그 차이를 나타내 보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그 역시 그 핵심을 놓치기는 마찬가지이다. 히브리 원문은 “가바르”란 어원에 기초를 둔 한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가바르란 말은 ‘고집하다, 우세하다, 이기다, 성공을 거두다’를 뜻하는 “우세하다(to prevail)”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예:창 7:18; 49:26; 출 17:11; 애 1:16). 영 교수는 다니엘 9장 27절에 대해 “이기게(실효가 나타나게) 하다”(cause to prevail)란 번역을 제안하고 있고, 「현대어 성경」(Modern Language Bible)도 거의 동일하게 “언약이 이기게(실효가 나타나게) 하다” 라고 번역했다. (224.1)
 아마도 “예수께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그의 언약을 효과적으로 존중하실 것이다”라는 말이 그 의미의 가장 단순한 표현이 될 것 같다. (224.2)
 언약이란 약속을 말한다. “새 언약”이란 최상의 “새 약속”을 말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 새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약속을 반복하셨다. 이렇게 약속이 두 번씩 들어간다. 약속을 지키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은 당신의 아버지께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히 10:7). (224.3)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온갖 역경을 무릅쓰시면서 하늘의 엄숙한 맹세를 존중하셨다. 제아무리 조롱과 위협과 고문과 공포와 죽음이 연합하여—밖으로는 투쟁이, 안으로는 공포가—대항하여 일어나도, 그리스도는 기어코 당신의 언약이 이기게 하였다. 그분은 당신의 약속이 모든 것 위에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 (224.4)
 자기에게 해로울지라도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을 예수님께서는 변치 않으셨다. 그는 여하한 대가를 치르면서라도 그 약속을 비준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비준된 약속의 혜택을 찾는 가장 극악스러운 죄인들에게 까지라도 그 혜택이 돌아가게 하셨다. (224.5)
 한 이레(주일)의 언약을 지키심
 다니엘 9장 27절은 말하기를 메시아는 “한 이레(주일) 동안의” 약속을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실 것이라 하였다. 여기의 한 이레(주일)는 특별히 유대인들을 위해 할당된 70 이레의 마지막 한 이레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69 이레의 다음에 오게 되어 있다. “그 이레의 절반(중간)에”* 예수님께서 제사를 중지하도록 해야 하셨다. 즉, 마지막 한 이레 중에서 아직 3년 반을 남겨 둔채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셔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그 약속을 지키려 하셨다. 이 예언은 주님의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이 예언에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에도 유대인 들에 대한 자신의 약속을 계속 이행하려 하신다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 “한 이레의 절반”이란 번역은 유감스럽게도 그 예언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뜻하는 것이란 가정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졌다. Jacques Doukham 교수의 “The Seventy Weeks of Daniel 9:An Exegetical Study”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17(1979):13)에 의하면, 비록 히브리어 단어 “카찌”(chatsi)에 무엇들의 절반이란 뜻이 있기는 하나 이것이 문법 구조상 어떤 시간의 개념(여기서는 한 주일)과 함께 사용되면 항상 중간(middle of)의 뜻을 갖는다. 절반이 아니다.
출 12:29; 사 16:3; 룻 3:8; 렘 17:11; 시 102:24. 또 여호수아 10장 13절에는 카찌(chatsi)가 하늘의 중간을 뜻하고 있다. 다니엘 9장 27절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3년 반 동안 유대의 제사 행위를 중단시킨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사실 에피파네스가 그런 일을 하지도 않았다. 마카 바전서 1:54, 59; 4:52~54에 의하면, 그는 단지 3년 10일 동안만 제사를 금지시켰다고 한다. 다니엘 9장 27절의 의미는 제 70주일의 중간에 메시야가 유대의 제사의 의의를 철폐, 무효화 · 종료케 하리라는 것이다.
(224.6)
 성경을 보면 그분이 실지로 그렇게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몇 시간 전에, 난폭한 군중은 미친 듯 외쳐 댔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 십자가 사건 후 6주가 지난 오순절(五句節)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용하면서 이 동일한 백성, 동일한 자손들에게 용서를 권고하였다. (224.7)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 39). 그 때에 3천 명의 유대인들이 이 약속의 허락을 받았다(행 2:41). 얼마 후 5천 명의 남자와 수많은 여인들과 어린이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었다. 베드로는 설교하기를 “너희들은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 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행 3:25, 26). (225.1)
 이 같은 무비의 사랑이야말로 설득력이 있으며, 배척과 십자가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속을 지킨 하나님의 호소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힘이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道)에 복종하”였다(행 6:7). (225.2)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반대하는 쪽으로 몰고 갔었다. 그러나, 용서하고 구원하려는 그리스도의 결의는 너무나 단호하고 확고하였기 때문에, 그분은 변덕스럽고 잔인한 제사장들의 마음에서 조차 당신의 언약을 승리하게 하셨던 것이다. (225.3)
 이와 같이, 십자가의 사건이 있은 직후 몇년 안에, 수천 명의 유대인들은 새로운 언약의 삼중적인 혜택을 받았다. 곧

 (1) 모든 죄의 용서,

 (2) 변화된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

 (3)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에 가담하는 자격이 그것이다. (225.4)
 새 언약과 여러분의 가족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베드로는 오순절에 설교했다(행 2:39). (225.5)
 우리 모두는 “주의 장막에 유하며”, “주의 성산에 거할” 날을 고대한다(시 15). 그러나, 우리는 그럴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항상 진실을 이야기 하지도 않고, 공의를 일삼거나 일구 이언을 안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심지어는 제 식구들에게도 한결 같이 친절하지 못하다. 때때로,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야비하게도 된다. (2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