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십대의 소년기에 성경을 읽고 암기하는 일을 많이 했다. 언젠가는 시편을 암기하고 있었는데 뭔가 색다른 감동을 갖게 되었다. 필자는 취침 시간이 되어서 서재에 계신 아버님께 가서 흠정역 성경의 시편 15편을 펴 보였다. (221.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221.2)
 필자는 마지막 행(行) 곧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를 지적하며 여쭈었다. “이것은 아빠가 일단 약속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셔야 한다는 뜻이 아녀요?” (221.3)
 필자의 아버님은 간단히 “내게도 그렇게 뵈는구나” 하고 대답해 주셨다. 나는 깊이 감동 됐다. (221.4)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은 사람”이라! (221.5)
 「뉴 인터네쇼널 번역 성경」(New International Version)에는 “고통을 줄지라도 그 서약을 지키는 자”로 돼 있다. [예루살렘 성경」(Jerusalem Bible)은 “어떤 희생이 있어도 맹세를 지키는 자”라 하였고 Living Bible은 “망하게 되는 한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221.6)
 필자에게는 뭔가 확고하게 느끼는 것이 있다. 시편의 이 구절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성산(聖山)에 거하게 될 때, 여러분들은 이 시편 구절처럼 이 세상을 살고 간 사람들을 이웃하고 사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당신의 중고차를 산 후에 엔진이 다 타버린 사실을 알고도 모든 지불금을 지불했던 사람들. 당신에게 여러 품목들을 많이 주문 한 후에 당신의 경쟁자가 더 싼 가격으로 홍정을 제의해 왔어도 당신에게 주문한 물품을 취소하지 않았던 사람들. 당신의 자녀가 가담한 소년 개척대의 후원자가 되겠다고 약속한 다음에는 보좌 책임자가 이사해 갔어도 사퇴하지 않은 사람들. (221.7)
 더 나은 사람과 결혼을 했거나 더 못한 사람과 결혼을 했거나 일단 했으면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 (222.1)
 역사상 마음에 서원한 것을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았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분은 예수님이시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그분은 고뇌에 지친 몸으로 겟세마네 동산의 땅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인류를 구하는 방도로 십자가 말고 더 쉬운 길이 없습니까?”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222.2)
 십자가는 가장 끔찍한 죽음의 방식이었다. 로마 인들은 반역자와 강도들, 그리고 노예들 에게만 이 같은 처형 방식을 사용하였다. 로마인들은 일벌 백계(一罰百戒)의 효과를 기대하고 이 끔직한 십자가 형벌을 공개적으로 집행 하였다. 그들은 먼저 죄인을 알몸으로 만들고 가슴과 등어리가 누더기가 될 때까지 매질한다. 그 다음에는 두 다리를 불편하게 엮고 나무틀에 발목과 손목을 못질한다.8 (222.3)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십자가의 고문보다 더 큰 괴로움이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갈라지게 된다는 공포였다. 십자가 상의 그 숨막히는 고뇌 속에서, 그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라는 기도를 절규하셨다. 사실상 하나님은 그를 버리려 하시지 않았다(요한복음 16장 32절을 보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과 구세주가 되셔야 했기 때문에 어떤 불가사의한 형태로 모든 회개치 않은 죄인들이 받게 될 심판의 끔찍스러운 고뇌를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다. 죄인들이 자신들의 자업 자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느끼는 최종적인 형벌의 고통을 예수님이 체험 하셔야 했던 것이다. (222.4)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와 같이 되셨다. “죄를 모르시는”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심”을 당했다(고후 5:21).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갈라 놓았다(사 59:2).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우리의 모든 죄의 책임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쌓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제 죄인으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갈라서는 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셨다. 이 갈라섬, 이 끔찍한 소외 관계가 그분에게는 가장 두렵고 끔찍스러운 일이었다. 우리의 중보 자이신 그분은 당신 자신을 위한 중보자를 간원하였다. (222.5)
 예수님은 또 다른 불안에 억눌려 계셨다. 그것은 그 자신과 하나님의 연합이 깨짐으로써 심판과 십자가의 그 끔찍한 모욕과 고뇌를 인내와 동정심을 가지고 견뎌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었다. 우리의 속죄와 죄의 담당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완전히 죄와 상관없는 분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그분이 어떤 형태로든 사단의 교묘한 유혹에 굴복하는 날에는 그가 온 영혼을 기울여 사랑해온 인류는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는 것이다. 그분은 이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222.6)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하고 기도하셨다 해서 무엇이 이상스러울 것인가. (222.7)
 기진 맥진한 채 동산에 엎드러져 있는 그분은 두 손으로 땅 위의 풀포기를 거머쥐고 맹렬히 하나님과 씨름하셨다. 피부로 베어 나온 피와 공포로 인한 식은땀이 서로 섞여 그분의 이마를 타고 홀러내렸다(눅 22:44). 예수님은 그가 죽기로 결심하지 않는 한 인류는 잃어버린 바 되리라는 사실을 인식하셨다. (222.8)
 이제 그분의 기도는 오직 순명(順命)을 토로할 뿐이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222.9)
 그분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고 결심하셨다. 비록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이같이 위급한 밤을 그와 함께 깨어 지샐 만큼 성의를 다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분은 인간을 위하여 죽기로 마음을 다짐하셨다(마 26:40~46). 비록 유대인들의 부패한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 하고 있지만, 그분은 유대인들을 위해 죽기로 작정하셨다. (222.10)
 예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구세주이시며 “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이셨다. (223.1)
 다니엘 9장 27절에 그같이 예언하였다. 말하기를 메시아가 “한 이레(주일)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라 하였다. (223.2)
 용어의 정의(定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