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진행 과정 속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창조 주간의 매일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은 우리에게 그의 창조 사역이 단순한 에너지(빛)와 공기 중에 있는 무생물과 바다와 땅에서 시작되어 식물과 동물로 옮겨지고, 마침내는 사람을 절정으로 끝맺어졌다고 말한다. 창조의 완성을 나타내는 선포에도 차이가 있다. 사람이 창조되기 전에는 단순히 “좋았더라”(4, 12, 18, 21, 25절)는 말로 그 완성을 선포하지만, 사람의 창조가 완성된 후에는 “심히 좋았더라”(31절)라는 말로 그것을 선포한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람의 창조를 위해서만 그 일을 하시기에 앞서서 그것을 위해 논의하셨다(26절). 사람에게 최상의 지위가 부여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실 때 보여 주셨던 그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통해서 확인된다(창 2:7). 더군다나 아담은 동물 중에서는 자기의 적절한 배필을 찾을 수 가 없었다(20절). 창세기 9:6은 사람을 죽인 죄를 범한 자에게 죽음의 형벌이 뒤따를 것이라고 말하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의 존엄성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를 대표하는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곧 그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하신다. (254.6)
 2.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
 우리가 정확히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명시적으로 말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만일 그 강조점이 하나님을 닮은 데 있다면, 하잘 것 없는 인간이 어떻게 그 무한하신 분을 닮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몸은 그 모든 부분이 다 환경적인 필요에 반응한다. 우리 몸의 모양과 크기와 존재 형태는 지구의 상태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과 유사한 환경에서 살고 계시는가? 우리는 그 유사성을 영적인 측면에서만 찾아야 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육체적 특성들 보다는 영적 특성들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시는 분이신가? 이 질문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철학자들이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제기해 오고 있는 질문들이다. 본 장의 ‘역사적 개관’에 이런 질문들에 대한 그들의 답변들이 요약되어 있다(참조 V. 역사적 개관). 여기서는 이 질문들에 대한 성경의 답변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55.1)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에서 창세기 1:26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하셨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하셨다. 이 성경구절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도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람이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밀하게 디자인된 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분이 창조 활동을 하시는 중에 무심코 투영하신 그분의 모습이 아니다. 그분의 형상에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이에 더하여, 이 성경구절에 진술되어 있는 하나님의 의도는 그가 갖고 계신 더 큰 목적을 알아볼 수 있는 통찰력을 우리에게 부여하기도 한다.(참조 창조 I. A. 1-2) (255.2)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열등한 피조물들을 주관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26, 27절;시 8:6-8). 사람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역에서 하시는 일과 유사한 것이었다. 이런 개념은 사실 고대 근동지방에서 사람에게 붙였던 “신의 형상”이라는 표현이 지닌 의미를 내포한다. 예를 들어, 바로는 아몬(Amon) 혹은 라(Ra)의 “살아있는 형상”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 속에는 그를 대표한다는 개념이 그를 닮았다는 개념보다 훨씬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협력자이며(창 2:4-6, 15) 또한 그의 보좌관이다(시 8:3-8; 115:16). (255.3)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과 닮은 것이 핵심적 요소는 아니지만 그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사람의 역할은 그를 만드신 분과의 교통이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 따라서 사람에게 주어진 육체적, 지적, 사회적, 영적 능력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개념 형성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그에게 열등한 피조물들을 다스릴 수 있는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므로,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세계를 다스리시는 것처럼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세계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포든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255.4)
 신약은 지식(골 3:10)과 의와 거룩함(엡 4:24)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으라고 역설한다. 이 본문들은 사람이 본래는 만물을 “심히 좋”게 만드신 창조자로부터 선량한 마음을 부여 받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인간은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회상이기 때문에 그들도 감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선한 삶을 사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또한 도덕적 속성까지도 포함한다. (255.5)
 인도주의적인 생태학자들은 종종 사람이 만물을 주관함으로 그것들을 학대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주장과 반대로, 자연에 대한 사람의 통치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통치 행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만 하는 존재가 되게 하였다. 학대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산에 접근할 수는 있지만 그것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은 없는 사람들에 의해 자행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사람에게 완전한 통치권이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 보호가 그분의 관심의 초점임을 강조할 따름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단지 이 땅에 있는 천연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만을 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사람에게 그 모든 것들을 관리해야 하는 온전한 청지기직분을 부여하셨다(창 1:26). 성경은 자연이 사람에게 주어진 귀중한 유산임을 가르쳐 준다.(참조 청지기직분 I. B) (256.1)
 3. 본래의 의
 사람에게 주어진 육체적, 지적, 사회적, 영적 능력들은 그를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인 그의 존엄성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전 11:7).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최대의 겸비한 마음과 무한한 존경심을 표하는 가운데서 이 모든 재능을 우리에게 부여하신 그분의 풍성하심에 경탄한다. 우리는 또한 그분이 사람을 완성하신 것을 경축하기도 한다(시 8편). 하지만 우리는 그와 동시에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이 매우 악한 행위들을 자행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큰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이 같은 행위들은 근세의 역사 속에서 문명이 매우 발달한 나라들에서까지도 수없이 많이 자행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피조물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할 수 있겠는가? (256.2)
 이 같은 역설적인 상황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귀중한 능력들 중의 하나인 “자유”로 인해서 발생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곧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어떤 것이든 자신의 모본이 되는 존재를 따르는 범위 안에서만 그 모본의 형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는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며, 또한 그 결과로 모본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여지도 만들어준다. 하지만 자율성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자기가 따르고자 하는 별도의 예정표가 있을 때에만 그를 자기의 모본으로부터 독립하도록 이끌어간다. 예정표가 다른 것은 곧 다른 원칙과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원칙에 동의하면서 그분의 형상으로서의 우리의 지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우리가 그분에게 종속된 존재임을 겸허히 인정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것을 거절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하나님께 대한 배반의 형태로 전환시킬 수도 있다. (256.3)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다(전 7:29). 하지만 그분은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완전한 지점까지 도달한 상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서, 그는 하나님의 지시, 특히 지식의 나무(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한 시험과 관련된 지시를 필요로 하였다. 이 시험은 그를 도덕적으로 성숙된 존재로 성장시키기 위해 의도된 것으로(약 1:2-4), 그 결과가 많은 중요한 문제들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었다. (256.4)
 우리의 첫 조상들이 창조 시에 부여 받은 도덕적 상태는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미덕(도덕적으로 잘못을 범하지 않을 자유)이 아직 시험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죄 없는 상태로 묘사된다. 미덕은 선택할 수 있는 능력, 곧 자유의지를 전제로 한다. 성경이 사람의 의지와 관련해서 많은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람이 누리는 자유에 대해서는 매우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고대에는 포로들과 종들이 비참한 상태로 생활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지만, 구약의 사회 규범은 그들이 그와 같은 상태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규정하였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자신들이 소유한 재산처럼 팔고 사는 것도 금지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는 자(사 41:14; 렘 50:34) 또는 해방시키는 자(사 61:1)로 일하신다. (256.5)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의 사명을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하셨다(눅 4:16-21). 하지만 여기에 언급된 해방은 단지 정치사회적인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은 사람이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죄의 종이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롬 3장;7장). 하나님의 뜻이나 율법에 대한 단순한 지식만 가지고는 이룰 수 없었던 바로 그 일을 예수께서 자신의 죄 없는 상태를 유지하시면서(롬 8:3)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빌 2:6-8) 성취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 그분은 죄의 종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의 구속자가 되셨다(히 2:15). 그들이 죄의 종으로 있는 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롬 6:23)이기 때문이다. (257.1)
 그러나 이와 같은 해방이 보편적이거나 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꺼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해방이다(요 1:12). 그 결과로 그들은 자유를 얻게 되는데, 이 자유는 제멋대로 하던 옛 습관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자유의 율법”(히 2:12) 아래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 할 수 있는 자유이다.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257.2)
 히브리어 하페츠라촌 그리고 헬라어 쎌레마를 비롯한 성경의 많은 용어가 개인적인 선택과 결정의 능력을 묘사하는데 쓰이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 전반에 걸쳐서 무수히 많이 나오는 권고의 말씀들과 도덕적 명령들은 사람에게 주어진 자유와 선택의 능력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의지는 속박이 없는 무한한 의지이다. 그분은 그분의 피조물들에게도 의지의 자유를 주셨다. (257.3)
 선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심오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재의 상태에서도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들이 선한 것이라는 데 동의함으로(롬 7:15-18) 옳은 것에 대하여 쉽게 시인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죄된 상태에서는 사람의 의지가 죄의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분의 선하신 뜻을 이룰 수가 없다(24, 25절). 본래의 정직한 상태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에게 자신의 지침을 온전히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창 2:17) 우주에 죄가 없도록 계획하셨다(롬 8:21). 하지만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동일한 자유로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죽음을 선택하였다(“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다른 설명들에 관해서는 죄론 I. A, C;생활양식 I. A. 2를 보라) (257.4)
 C. 본래 상태에서의 성(性)
 1. 교제에 대한 인간의 필요
 창세기 2장의 기록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는 동시에 창조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은 이 같은 시간적 차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27절). 정확히 말하면 히브리어에서 “아담”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인류” 또는 “사람들”(참조 창 5:2)로 번역 될 수 있는 집합명사다. 성경에서 남자를 의미하는 특정한 용어인 이쉬는 여자를 의미하는 잇샤가 언급된 다음에야 처음으로 등장한다(창 2:23). (25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