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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시대의 성령론은 고대신학에 나타난 성령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 시대의 성령이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전통을 따라서 성령은 사랑의 띠로서 성부와 성자를 연합하는 상호간의 사랑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었다. (174.1)
 제11차 톨레도회의(Toledo XI, 675)에서는 성령이 삼위일체의 제 3위격이며 한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였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등하시며, 동일본질이라고 하였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심으로 태어나신 것도 아니요 창조된 것도 아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보내진 두 분 모두의 영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하나님이시며, 그 존재와 활동에 있어서 나눌 수 없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위격의 특징은 서로 다르다. 성부는 태어남이 없이 영원하고, 성자는 태어남과 함께 영원하며, 성령은 태어남이 없이 나오심을 가진 영원이다.22) (174.2)
 초기교회의 오순절적 성령의 역사는 이후 교회 역사에서 점점 약화되어 갔다. 특히 392년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기독교는 기득권 세력이 되고, 사회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러자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게 되었고 기독교는 본래의 순수한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교회는 형식주의와 교권주의로 변질되어 가게 되었고 선교정신은 사라지게 되었다. 아울러 성령의 은사는 점점 더 약화되어 갔으며 스콜라신학이 발전함에 따라 성령사역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75.1)
 신비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요아킴(Joachim of Flora, c. 1132~1202)을 들 수 있다. 그는 이탈리아 피오레의 수도원장으로서 성령론 발전 과정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성경에 대한 역사적-표상적 해석에 기초하여 최초로 3 시대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구약시대를 성부시대(율법시대) . 신약시대를 성자시대(복음시대)로 규정하고, 임박한 미래인 1260년 이후를 성령시대, 즉 영적 충만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제 3시대에 있어서 성령은 사람을 신적 존재로 만들어 성령에 전적으로 동참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요아킴은 중세시대 성령운동의 주창자이며, 삼위일체를 역사의 세 시대와 결부시켜 설명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175.2)
 요아킴은 회복주의 운동가로서 초대 교회와 유사한 성령으로 개혁된 교회를 시작하고자 하였다. 그는 중세의 대표적인 성령운동 주창자였으며, 중세 가톨릭교회의 계급주의적 구조와는 대조적으로 평등주의자였다. 그는 산상수훈은 삶의 규칙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고, 안수를 강조하였다. 그의 생전에 그의 영향이 프란체스코파 수도원에 미쳤으나 그의 예언대로 1260년에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의 영향은 약화되었다.23) (176.1)
 1215년 제4차 라테란 회의에서는 요아킴의 삼위론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한편 성령의 이중발원을 주장하였다. 서방측 입장에서 이것이 필리오케(filioque)를 주장한 최초의 에큐메니컬 대회라고 할 수 있다.24) (176.2)
 중세시대에 성령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의 하나는 필리오케(filioque) 논쟁이다. 필리오케“아들”(filius)+“그리고”(que)의 합성어로서 그 뜻이 “또한 아들에게서 역시”(and from the Son)라는 라틴어이다. 이 논쟁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본래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회의(381년)에서 채택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의 제3항에는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온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589년 제3차 톨레도 회의에서 아직 스페인 내에 잔존하고 있었던 아리우스주의를 경계할 의도로 서방교회가 라틴어로 번역한 조항에 처음으로 필리오케를 첨가하였다. 즉 성령은 아버지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176.3)
 그 회의 이후 서방교회는 이것을 공식적인 신앙의 조항으로 간주하였지만 동방교회는 이에 반대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25) (177.1)
 그 후 1014년 교황 베네딕토 8세(Benedict VIII)는 공식적으로 필리오케를 신조에 삽입할 것을 최종 승인하였다. 그 결과 필리오케 문제는 교황 수위권 논쟁 등 기타 여러 신학적 문제와 더불어 1054년 서방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분리되는 결정적인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 서방교회는 1215년 제 4차 라테란 회의(Lateran IV) 때 필리오케를 에큐메니칼 신조에 삽입하기로 결정하였다. 현재 동방 정교회는 필리오케가 없는 신경을, 로마 가톨릭교회와 그에서 갈라져나간 성공회 및 대부분의 개신교는 필리오케가 있는 신경을 받아들이고 있다. 필리오케 논쟁은 신학적 주제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에 존재하는 상호간의 이해관계 속에서도 크나큰 의미를 갖고 있다.26) (1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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