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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7년에 시작된 종교개혁은 기독교회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도 전환점이 된 큰 사건이다. 그것은 교황권으로 대표되는 구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근대 역사가 시작되는 사건이었으며 절대 권력인 교황권에 도전하여 오직 성경으로 승리한 위대한 사건이었다. (177.1)
 종교 개혁은 성령론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중세시대의 제도화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보다 역동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변화되었다 .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의 관심은 형이상학적 교리가 아니라 신자의 삶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 즉 성령의 내적 증거, 성령의 조명, 그리고 칭의, 중생, 회심, 성화 등에서 성령의 역할에 관한 것이 었다.27) (178.1)
 마르틴 루터는 성령은 믿음을 창조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며,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는 사역을 한다고 하였다.28) 신자들의 성화 과정에서 성령은 새로운 용서와 평안을 경험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성령의 사역이 반드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루터의 입장은 말씀의 우월성을 강조한 나머지 성령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고 결국 성령이 말씀에 예속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할수 있다.29) (178.2)
 칼뱅은 루터보다 성령에 대해 더 많이 강조하고 서술하였다. 칼뱅은 특별히 성경과 그리스도인의 삶 및 성례전에서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였다. 워필드(B. B. Warfield)는 칼뱅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부르면서 신학에 대한 칼뱅의 가장 위대한 기여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교리라고 하였다.30) (178.3)
 그는 성령의 역사를 크게 4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첫째, 성령의 내적 조명이다. 칼뱅은 성경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의 절대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성령의 내적 조명이라고 보았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회의 권위를 절대시 하는데 대항하여 칼뱅은 성령의 절대권을 가지고 대항했다. 성경을 해석하는 권위가 교회의 권위나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에 있고, 이 성경의 권위는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31) (179.1)
 둘째, 구원의 은총을 전달해주는 성령이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실제로 결합시켜 주는 줄이라고 보았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성부로부터 받은 것과 그리스도 자신이 하신 사역, 즉 구원의 은총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실제로 결합시켜 준다. 따라서 성령은 성부의 영이면서 성자의 영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구원의 사역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나를 위한 구원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포도나무의 비유처럼 가지와 줄기가 하나로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179.2)
 셋째, 성령은 우리를 회개케 한다. 우리가 말씀을 들어도 내적 교사인 성령이 그 말씀을 우리에게 깨닫도록 하지 않으면 그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179.3)
 칼뱅은 특별히 신앙과 회개가 성령의 사역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180.1)
 넷째, 성례전에서의 성령의 사역이다. 성례전은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하나의 인간적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떡과 잔은 표징이고, 실체는 그리스도이며, 그 둘을 연결하는 것이 성령이라고 하였다. 칼뱅은 떡과 잔이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살과 피라고 주장하는 가톨릭의 화체설뿐만 아니라 떡과 잔 안에 그리스도가 실재한다는 루터의 공재설도 반대하였다. 그 대신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떡과 잔안에 임재하는 것이며 그 임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능력이라는 영적임재설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성만찬 예식에 효과를 가져오는 힘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이다. 성령이 임재하지 않는 성례전은 아무 효과가 없다고 보았다.32) (180.2)
 이처럼 종교개혁자들의 성령론은 성령의 내적 증거는 강조하였으나, 성령의 외적 증거와 객관적인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그들의 성경관이 기록된 문자에 집착한 나머지 성경을 통해서 사역하시는 성령의 사역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은 아직 성자에게 종속된 성령 이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성령론적 관점에서 볼 때 종교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서방교회의 성자 중심의 성령 이해라는 성령 소외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33) (180.3)
 개신교 신학이 점차로 교조주의에 빠지게 되었을 때, 여기에 대해 반대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영국에서는 ‘내적인 빛’(inner light)을 강조하는 퀘이커 운동과 성화의 체험을 강조하는 감리회 운동이 일어났으며 대륙에서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서 루터교회의 정통주의 신학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181.1)
 루터, 칼뱅의 종교개혁이 너무 미온적이라고 비판하고 보다 철저한 개혁을 주장한 운동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재세례파(Anabaptist) 운동이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성인의 침례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근원적인 사회개혁을 수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성경보다도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을 강조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과격한 혁명주의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들이었다. (181.2)
 급진적 종교개혁자인 토마스 뮌처(Thomas Muntzer) 말씀보다 성령의 사역을 더 중요시 여겼다. 그는 루터가 교황을 떠나 성경으로 돌아갔으나 성경을 떠나서 성령의 음성을 듣는 데까지 가지 못했으므로 성령의 능력에 의해 초기교회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뮌스터(Munster) 지방을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만으로 구성된 천국으로 건설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여 점령하고 많은 시민들을 살해하고 일시적으로 지배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왕의 군대와 합세하여 재세례파 세력을 격파하고 뮌스터를 탈환하였다.34) 재세례파 운동은 종교개혁의 한 분파로서 부패한 기독교를 개혁하고 진정한 기독교를 건설하고자 했다. (181.3)
 그러나 이 운동은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를 강조하는 대신에 성경을 등한시한 면이 없지 않다. (182.1)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부흥운동은 현대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의 진정한 뿌리라고 할 수 있다.35) 그는 감리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신학적으로 종교개혁의 완성자로 불린다. 그의 감리교운동은 19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모체가 되었고, 20세기 오순절운동의 신학적 토양이 되었다. (182.2)
 웨슬리는 성령을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하였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구분되는 동시에 그들과 한 본질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성령이 있는 곳에는 성부와 성자가 그 안에 함께 계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내재를 나타내며 사람의 요구를 위해 항상 함께 하신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령론은 기독론과 신론을 연결시켜 주는 은혜의 인식점이 되었다. (182.3)
 또한 웨슬리는 성령을 구원의 사역자로 이해하였다. 구원의 사역자로서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인간 속에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어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웨슬리는 이것을 선재 은혜(prevenient grace)로 보았다. 구원사역은 우리 안에서 위격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일인데, 그 일을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웨슬리의 신학의 중심은 구원론이며 그 핵심은 성화론인데, 그 구원의 역사와 성화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82.4)
 이처럼 웨슬리는 성령의 체험을 참된 신앙의 본질로 보았다. 그것은 이성으로만 아니라 감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적 능력의 체험이며 하나님의 생명의 영과의 교통이라고 하였다. 특히 이러한 이해에 계기가 된 것은 미국 조지아 주에서 선교사업에 실패하고 영국으로 돌아와 낙담해 있던 어느 날, 런던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에 있는 교회의 수요예배에 참석하였다. 그 때가 1738년 5월 24일이었는데, 그 날 저녁 8시 45분경, 사회자가 낭독한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듣고 있던 중에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리를 깨닫고 구원의 확신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경험은 웨슬리 개인 뿐 아니라 교회사에 일어나 위대한 신앙 체험운동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183.1)
 웨슬리의 부흥은 그의 말년에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남겼다. “그는 나이 80세가 넘은 만년에 가서, 곧 반세기 이상의 봉사의 생애를 통하여 50만 명 이상의 영혼들을 신자로 얻었다. 그리고 그의 봉사를 통하여 타락과 멸망의 구덩이에서 고상하고 순결한 생애로 들어간 무리들과 그의 교훈으로 말미암아 더욱 깊고 풍부한 체험을 얻은 사람들의 수는 구속받은 가족이 하나님의 나라에 모일 그 때에 가서야 비로소 밝히 알려질 것이다.”36)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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