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3 부 안식일과 생명 제 11 장  안식일, 빈손과 맨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
 안식일은 사람을 근원적인 지식과 깨달음으로 초청하는 날이다. 사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요 8:14) 지식과 깨달음으로 초청하는 날이다. 안식일 신앙은 이 지식과 깨달음을 더욱 깊고 환하게 밝히는 날이다. “사람 안에 있는 이 빛”(눅 11:35)을 더욱 환하게 밝히는(마 6:22)것이 안식일 신앙이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이 엿새동안에 사람을 위시하여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이 사실을 거룩하게 하고 복되게 하여 사람으로 구별하게 한 제칠일의 계명이기 때문이다(출 20:11). 안식일 계명은 사람의 근본을 밝히는 계명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아는 지식과 깨달음이야말로 근본적인 깨달음이다. 이 지식, 이 깨달음이야말로 “참 명철”(잠 9:10)이요 지식의 근본이다. 이 지식, 이 깨달음에 기초한 증언만이 참되다 할 수 있다(요 8:14). (382.1)
 안식일의 지식과 깨달음에 의하면 사람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 3:19).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 돌아간다”(전 1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던”(창 2:7) 것이다. (382.2)
 사람은 흙에서 왔으며 또 하나님에게서 왔다. 첫 번째로 사람은 흙이요, 두 번째로 사람은 영이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고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다”(고전 15:47). “먼저 사람은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체의 사람이다. 두 번째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다”(고전 15:46). “무릇 흙의 인간들은 흙으로 된 사람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 분과 같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우리는 또한 하늘에 속한 그 분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이었다”(고전 15:47-49).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썩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썩을 몸이 죽지 않고 불멸의 몸으로 변화하려면 이 썩을 몸이 불멸의 몸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전 15:51-54)는 것이다. 안식일 신앙은 사람들에게 이같은 지식과 깨달음으로 초청하고 이 지식과 깨달음을 심화시키는 신앙이다. 안식일은 사람에게 그 근본이 흙이고 또 그 근본이 하나님의 신이라는 깨달음을 확실히 하고 흔들리지 않게 하는 날이다. (383.1)
 사람은 이러한 지식과 깨달음에 의해서만 변화된다. 사람의 눈에서 들보가 빠지는 변화는 이같은 깨달음에 의해서만 일어난다. 안식일은 우리가 우리의 입을 티끌에 대는 날 곧 우리의 생명에서 흙을 의식하는 날이다. 우리의 입을 티끌에 댈 때 우리에게 소망이 생긴다(애 3:29). 절대권력자, 백만장자, 힘센 장사, 희대의 천재나 미인이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은 그들이 입을 티끌에 대는 순간이다. 자신의 근본이 티끌임을 확인하는 날이다. 그들의 운명이 티끌에서 티끌로 돌아가는 것임을 깨닫는 날이다. 입을 티끌에 대는 체험은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체험이다. 사람이 죽을병이나 죽음에 가까이 가는 사고와 재난 등에 의하여 사람이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사실에 눈뜨게 될 때 사람은 달라진다. (383.2)
 그러나 안식일은 또 우리의 코끝에서 하나님의 콧김을 의식하는 날이다. 하나님이 흙 사람의 코에 생기로 불어 넣으시어 산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실로 사람의 근본은 티끌이면서 하나님의 콧김이다. 우리의 첫 번째 사람은 티끌이지만 우리의 두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숨길이다. 두 번째 사람은 하늘에 속해 있다. 하늘에 속한 분과 같은 존재이다. 진실로 “사람의 콧김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애 4:20) 이다. 사람의 콧김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 곧 하나님의 독생자이다. 우리가 낮고 천한 티끌의 세월 속에 누워있다가도 인간의 존엄한 품위를 되찾는 순간은 바로 우리의 숨길과 우리의 생명의 박동에서 “사과 냄새 같은 하나님의 콧김”(아 7:8)을 의식했을 때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이다. 안식일은 사람에게 이같은 두 근원, 즉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 돌아간다”(전 12:7)는 깨달음의 날인 것이다. (384.1)
 그리고 사람에게 제칠일 안식일은 사람이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 한 평생이 “참으로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된” 사람의 일의 결국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켜야 할 사람의 본분으로”(전 12:7, 13) 돌아가는 마지막 날이다. 사람에게 “사랑이 없으면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전 13:2)는 사실을 절감하는 마지막 날이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하고”(고전 13:8) 오직 “사랑만이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한다”(고전 13:8)는 인식을 새롭게 하는 마지막 날이다. 깨달음의 제칠일이다. 사람의 허망한 일평생 중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만이 항상 있을 것이며 그 중에도 사랑이 제일이라”(고전 13:13)는 깨달음에 이르는 날이다. 사람이 참으로 제 본분을 깨닫는 인생의 마지막 날이다. 인생이 마지막으로 희망을 붙든 날이다. 이 날이 안식일이다. (384.2)
 안식일은 사람이 하나님의 신과 진토로 창조되는 그 근본적 체험을 자신의 인식 속에 재연하고 재현함으로써 재창조되는 날이다. “자신의 근원에 대한 지식과 명철로 사람이 재창조되는 날이다”. “땅에 속하여 신령하지 못한” 내가 하늘에 속하여 “저 하늘에 속한 분과 같이 신령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는”(고전 15:46-49) 날이다. 첫째 사람, 곧 흙의 사람, 육체의 사람(고전 15:46)이 둘째 사람, 곧 하늘의 사람, 신령한 사람(고전 15:46-47)으로 거듭나는 날이다. (385.1)
 지, 정, 의의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창조와 종말을 체험하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다. 사람의 창조와 종말의 체험이 바로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가”의 깨달음이다. 흙으로 돌아가는 삶의 체험이 종말적 인식이며 종말 신앙이다. 헛되고 헛된 인간의 종말을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깨닫는 것이 궁극적 체험의 근원적인 깨달음이다. 사람이 부활하여 입게 될 불멸의 운명을 육체로 있으면서 깨닫는 것이 창조 신앙이며 부활 신앙이다. 궁극적 체험이다. 사람은 오직 이 깨달음에 의해서만 거듭난다. (385.2)
 사람은 대체로 이러한 체험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형제의 눈에서 티끌을 빼고자 하면서도 제 눈 속의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이같은 체험을 통하여 비로소 제 눈에서 들보가 빠져 나오는 변화를 얻게 된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얻은 체험이 바로 “바로 보게 되는 체험이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서 다시 보게 되었다”(행 9:18)는 체험이다. (385.3)
 6일로 표상되는 세속의 세월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눈에 비늘 같은 것에 덧 씌워져서 지낸다. 그 비늘은 안목의 정욕이라는 이름의 비늘이다. 안목의 정욕을 가지고 헛것을 보며 헛것을 좇으며 산다. 안목의 정욕이라는 비늘에 덧 씌워져 보는 세상은 온통 색이다. 색의 세상이다. 색계이다. 유혹의 세상이다. 색의 세상에서 색에 홀린 눈이 색맹이고 색에 홀려 색에 빠져 사는 인생이 색신이고 색골이다. (385.4)
 참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바로 보아야 한다. 세계관이 바로 되고 인생관이 바로 되고 사생관이 바로 되어야 변화된다. 안식일은 바른 인생관의 날, 바른 세계관의 날, 바른 사생관의 날이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마 6:21). 우리의 눈이 색을 밝힌다면 우리의 마음이 색에 있는 것이다. 참으로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다(마 6:21).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아야 한다(눅 11:35). 들보가 빠진 눈, 색을 벗어난 눈이 밝은 눈이다. (386.1)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성한 눈이고 밝은 눈이다. 성한 눈, 밝은 눈은 아무나 누리는 복이 아니다. 누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본다고 했는가.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볼 것이라 하였다(마 5:8). 하늘에 보물을 둔 사람, 하늘에 마음이 가 있는 사람(마 6:21)들이 하나님 나라를 볼 것이라 하였다.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하였다.(요 3:3). (386.2)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보는 사람이(요 3:3)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다(요 3:5).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보는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다(요 3:3). 제 눈에서 들보가 빠져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요 3:5). 반면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 15:50). 혈과 육의 눈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386.3)
 다시 말하거니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란 “네 속에 있는 빛이 밝아진” 사람이다(눅 11:35). “네 속에 있는 빛이 밝아 졌다”는 것은 사람의 눈에서 들보 같고 비늘 같은(행 9:18) 혈과 육의 안목이 떨어져 내렸다는 것이다. 진실로 사람이 거듭나는 경험은 사람의 안목이 달라지는 경험이다. 사람의 인식이 달라지고 사람의 관점이 달라지는 경험이다.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은 사물을 보는 사람의 눈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 사람이 달라진 것이다. (387.1)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내 눈에서 들보가 빠질까, 어찌하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 대신 내 눈 속의 들보를 깨달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고자 하기에 앞서 내 눈 속의 들보를 빼낼 수 있을까. (387.2)
 사람의 본성과 운명에 대한 근원적인 깨달음에 의해서 사람에게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내 입을 티끌에 대는 차원, 내 눈 속에 흙이 들어오는 차원, 죽음에 가까이 가는 체험에 의해서 사람이 달라진다. 이런 체험을 거치고도 달라지지 않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호흡에서 하나님의 콧김을 인식하는 차원에서 우리는 달라진다. 우리의 안목이 달라진다. 우리의 안목에서 정욕이 빠진다. 우리 눈에서 정욕의 들보가 빠진다. 안식일은 우리들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는 날이다. (387.3)
 안식일은 근원적인 경험으로의 초청이다. 이 초청은 곧 심령이 가난해지는 경험으로의 초청이다. 안식일은 인간의 시작과 끝에 대한 근원적인 깨달음에 의하여 사람의 심령이 가난해지는 날이다. 안식일은 인류 역사의 맨 처음의 날이다. 안식일은 인간이 핏덩어리로 발짓하던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배꼽 줄도 자르지 않은 핏덩어리 인간을 실로암 물로 씻겨서 그 피를 없이하며 사람에게 기름을 바르고 수놓은 옷을 입힌 날이다. 안식일은 사람이 사람의 맨 처음 날에 서서 그 심령을 가난하게 하는 날이다. 인류 역사의 맨 처음 날, 핏덩어리로 발짓하던 그 날로 돌아가는 날이다. (387.4)
 여섯 날 동안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고 떠들던 우리가 비로소 “제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계 3:17) 바로 보고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는”(애 3:41) 날이다.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수치를 깨닫고 “열심을 내어 회개하는 날이다.” “열심을 내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간구하게 되는 날이다. 열심히 긍휼의 문을 두드리는 날이다. 주권자에게 “엎드려 굴복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하는 날이다(마 18:26).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김 같이 나로 나의 동포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다고 깨닫는 날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우리가 입은 자비로 우리가 달라지는 날이다. (388.1)
 안식일에 사람이 거듭나는 차원은 사람이 육체에서 출생하는 차원이 아니다. 영적인 거듭남이다. 사람의 육욕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아버지 없이 태어나는 출생이다. 처녀의 수태와 같고 동정녀에서의 출생 같은 태어남이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대표된 출생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모두 예수와 동일한 출생의 반열에 속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두 번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자손들이다. “첫 사람 아담은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신령한 자이다”(고전 15:45, 46).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던”(고전 15:47) 것이다. (388.2)
 살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 받을 수가 없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몸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전 15:48-54). 그러나 사람이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변화하려면 먼저 그 심령이 불멸의 영으로 거듭나야 한다. 예수의 태어남 같이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 처녀가 성령으로 수태하듯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듯 사람이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계획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들보가 빠지는 삶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러한 새 사람이 안식일에 태어나는 사람이다. (3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