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누구인가?
 우리는 앞에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란 이름을 자주 언급했다(p. 156, 157). 아직도 미진하게 여길 사람들을 위해 조금 더 보탤 필요가 있을 것이다. (186.1)
 출신 :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니엘 8장의 예언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상관시키는 까닭은 아마도 그에 관한 그들의 지식의 제한성에 기인하는 바 크다고 생각된다. 그들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란 고작 성경 예언서의 한두 소절이나 성경 참고서에 기술된 간략한 참고 사항에 그치고 있다. 그들이 그에 대해 조금만 더 알고 있었다 해도 그를 다니엘 8장의 작은 뿔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86.2)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여러 헬레니즘 왕국 중 셀류키아(Seleucid)란 이름을 가진 한 왕조의 제8대(175~164 BC) 왕이다. 셀류키아는 나중에 시리아란 이름으로 알려진다. 이 왕의 이름은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Livius, Titus)의 「로마사」(History of Rome, 권 44, 45)와 희랍의 역사가 폴리비우스의 「역사」(The Histories, 권 26, 27), 그리고 익명의 유대 역사가들이 저술한 경외서인 마카비전 후서에 언급되었다. 그는 위의 글에서 좀처럼 전설적인 적 그리스도로 묘사되고 있지 않다. 그는 타고난 패배자, 진실로 비극적인 약자로 기술되고 있다. (186.3)
 그의 부왕 안티오쿠스 3세 대왕은 셀류키아의 국경을 원 위치까지 확장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기원전 190년의 마그네시아 전투(Battle of Magnesia)에서 서방의 신홍 왕국인 로마에게 패배하여 전 국토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소아시아의 거의 전부를 상실하였다. (186.4)
 로마는 안티오쿠스 3세에게 탈취한 지역을 해방시켰지만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다. 로마는 아직도 네 바람의 하나에서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한 “작은 뿔”에 불과하였다(단 8:8, 9). 그러나, 로마로부터 배를 타고 동쪽으로 파견돼 오는 로마의 사절들이 중동의 국제 정치를 확실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186.5)
 로마인들은 마그네시아의 승리 끝에 체결한 강화 조약을 안티오쿠스 3세로 하여금 파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왕자 한 사람을 볼모로 잡아갔는데, 그가 후일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이다. 젊은 안티오쿠스는 로마에 체류하면서, 또 후에 희랍을 방문하면서 희랍 문화에 심취하게 되었다. 당시 로마는 문화적으로 희랍에 압도되고 있었다. 부왕이 사망하자 로마는 이 젊은이의 왕위 계승을 허락하였고, 그는 안디옥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는 귀국에 앞서 두 가지의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어떠한 대가를 무릅쓰고라도 헬레니즘 즉 희랍의 사상과 습관을 전파시키고, 둘째는 부왕의 유지를 따라 영토 확장에 전념한다는 것이다. (186.6)
 그의 군사적인 야망이 일개 로마 사절이 그의 둘레에 작대기로 원을 그었을 때 무산된 이야기는 앞에서 소개했다. 그의 문화적인 야심은 조금 형편이 나았지만, 그것 또한 종래는 파국을 면치 못했다. 그가 의도한 헬레니즘 전파 계획은 여러 도시에 재정적인 지원을 후히 함으로써 희랍식 신전들과 체육관을 건립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은 자국의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 그는 이 같은 재정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대외 원정을 감행하던 중에 전사하였다. 이 원정은 동방의 한 고대 신전에서 보물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 앞서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 성전의 보물을 탈취해 갔었다. (186.7)
 그의 군사 및 문화적 야심이 모두 유대인들에게는 악몽과 같은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마카비전서 1장 11~15절; 2장 43~52절에 나타나 있는 대로, 유대인 대제사장 야손(Jason)이 이끄는 헬라화주의 파(原化主義派) 유대인 그룹이 안티오쿠스에게 예루살렘에 희랍식 체육관을 짓는 기금을 얻어 내는 운동의 선두에 섰다. (187.1)
 희랍의 체육관에서는 모든 선수들이 남자들이었는데 알몸으로 경기를 하였다(김나지움(gymnasium)이란 단어는 “벌거숭이가 되는 장소”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관습은 남성다움을 존중하자는 데에 그 취지가 있다고 이유를 내세웠다. 심지어, 제사장들까지 대제사장의 교사를 받아 체육관에 나체극을 연출하느라고 그들의 성전 의무들을 태만히 하였다(마카비 후서 4:17~27). 보수적인 유대인들이 격분했음은 물론이다. (187.2)
 안티오쿠스는 화를 내지 않을 때는 쾌활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복 차림으로 선거에 입후보하는 일을 즐겼다. 안티오쿠스가 이집트에서 로마의 사절에 의해 쫓겨나게 되지 않았던들 보수적인 유대인들의 반대에 대해 그가 그렇게 대응했을지는 분명치 않다. 그의 이집트 원정에는 재정적 지출이 많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빈손으로 이집트를 돌아서게 됨으로서 재정적 지출은 심각한 손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가 귀국 길에 올랐을 때, 제사장 야손이 동포 유대인들과 싸움 중이라는 소식에 접했다. 이집트에서 당한 모멸로 크게 비위가 뒤틀려 있던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에게 개인적인 분풀이를 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집트 원정으로 생긴 재정적 손실을 메꾸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그가 만약 야손을 대신하여 대제사장이 되려고 뇌물 공세를 취하고 있던 헬라화주의자 유대인 제사장인 메네라우스(Menelaus)의 사주를 받지 않았던들 성전을 약탈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87.3)
 반역적인 유대인들이 주동이 되어 추진한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이 진행된 후, 안티오쿠스는 유대인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문화적 통일 정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강압적인 종교 통합의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187.4)
 새로운 사태 진전의 일환으로서 기원전 168년 치슬렙 월(月) 15일에 희랍의 신(神) 제우스의 상(像)이 번제단 위에 건립되었다. 마카비전서 1장에 의하면, 이 때도 자유주의적인 유대인들이 앞장섰다는 것이다. 10 일 후 곧 치슬렙 월 25일에, 그들은 제단 위에 돼지 등 “부정한” 동물로 희생 제물을 삼기 시작하였다(마카비후서 6:5). (187.5)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유다스 마카비우스(Judas Maccabeeus)의 휘하에 뭉쳤다. 그들은 마카비우스의 대담 무쌍한 지도하에 안티오쿠스의 군대와 싸워 여러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다. 안티오쿠스의 유대 정복 사업도 그의 여타 사업과 마찬가지로 실패였다. (187.6)
 드디어, 미친 왕의 적개심과 자유주의적인 유대인들의 책략에서 벗어나게 된 경건한 유대인들은 더러워진 제단을 헐고 새 제단을 세웠다. 제우스의 신상이 건립된 때로부터 3년 10일 만이요, 부정한 희생 제물을 바치기 시작한 때로부터 3년 만의 일이었다. 유대력 치슬렙 월 25일은 그레고리우스역(曆)의 크리스마스에 가깝다. 이 날은 오늘날 “하눅카”(Hanukkah)로 기념되고 있는데, 바로 기원전 165년에 새 제단을 봉헌한 사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신약 성경 요한복음 10장 22, 23절에 보면, 예수님에 관한 한 일화가 바로 이 명절의 때에 관련하여 소개 되었는데 “예루살렘에 수전절(修殿節)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하였다. (187.7)
 안티오쿠스가 성전 봉사를 중단시킨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일을 다니엘 8장 14절의 2천 3백 “주야”에 맞추려는 모든 시도는 한결같이 실패로 끝났다. 2천 3백 주야를 3 년이나 3 년 10일에 맞출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187.8)
 그리고, 성전의 황폐가 안티오쿠스의 광기 못지않게 유대인들의 불충에 기인한 바 크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안티오쿠스가 성전을 황폐케 하지 않았다 해도, 조만간 성전은 자유주의적인 유대인들의 손에 황폐될 입장에 있었다. (187.9)
 그들은 이미 체육관에서 나체 놀음을 하기 위해 성전의 종교 의식을 등한히 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을 헬라화하기 위하여 이미 안 티오쿠스의 지원을 확보해 있었던 것이다. (188.1)
 이미 1733년에 저 만유 인력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우튼(Isaac Newton)경은 다니엘 9장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88.2)
어떤 사람들은 이 마지막 뿔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고 말한다. 그러나, 퍽 적절한 판단은 아니다. 짐승의 뿔이 한 개인을 나타낸 일은 없다. 언제나 그것은 새로운 왕국을 나타내고 있다. 안티오쿠스의 왕국은 오래 된 왕국이었다. 안티오 쿠스는 네 뿔 중 하나를 다스렸다. 작은 뿔은 다섯 번째의 뿔이며, 그 뿔의 고유한 왕들이 통치하였다. 이 뿔은 처음에는 작은 뿔이었으나 심히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그렇지 않았다. 작은 뿔은 그전에 나오는 모든 뿔들 이상으로 위대하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왕국은 로마에게 조공을 바치는 약한 나라였고 그는 그 나라를 확장하지 못했다. 마지막 뿔은 엄장한 얼굴의 왕이며, 비상하게 파괴를 행하고 번영하고 능란하였다. 그는 거룩한 백성들을 대적하는 일에도 성공하였다.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로마의 경고 메시지 하나에 질겁하여 이집트에서 철군하였으며, 그 후에는 유대인들로부터도 패 배를 안아야 했다. 작은 뿔은 다른 세력에 의해 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자의로 행동했다. 작은 뿔은 하늘 군대의 주재, 만왕의 왕을 대적하여 일어났다. 이것은 안티오쿠스의 모습이 아니라 안티크리스트 즉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작은 뿔은 성소를 땅에 헐었으나, 안티오쿠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안티오쿠스는 성소의 건물을 그대로 두었다. 2,300일 동안 성소와 백성들이 짓밟혔다. 그리고, 다니엘에서의 날은 연(年)을 뜻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에 의해 성전이 더럽혀진 기간은 그렇게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이 일들은 마지막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즉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가 끝날 때 까지이다. 그러나, 이 분노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버려진 성소가 정결케 되기까지 계속되어야 하는데, 성소는 아직도 정결되지 않았다.35
(18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