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사람들은 크게 호산나를 외치고 꽃다발을 흔들며 노래하기를, “호산나 당신께, 오 우리의 창조주시여, 호산나 당신께, 오. 우리의 구속주시여, 호산나 당신께, 오 우리를 찾는 자시여, 호산나!”(Sukkah 4:5)한다. (449.6)
 마치 삼위의 하나님께 무의식중에 기원하듯이,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의 호산나의 외침과 종려가지들을 흔드는 중에 사람들은 이 예식들이 메시야를 통해 성취됨을 느꼈다(마 21:8, 9; 요 12:12, 13). (450.1)
 빛의 축제
 이 주일 동안 매일 밤 성전 뜰에 들 불이 밝혀졌다. 쉐키나가 나타났을 때는 불필요했었는데, 바벨론 유랑에서 돌아온 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 의식을 제정하였다. 그리스도 당시에는 크고 높은 지주(standards)두 개가 뜰에 세워져 큰 사이즈의 등대를 지탱하였고(시대의 소망, 463), 많은 다른 등들이 성전 뜰 이곳 저곳에 놓여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얕은 도기 접시들이며, 기름이 가득한 그 안에 심지가 담겨져 있었다. 저녁 희생 제사 후에 제단으로부터 불을 당겨 등잔들에 불을 밝히고 이내 곧 “성전과 그 뜰이 인공 불빛으로 반짝여서 도시 전체가 환하게 되었다”(2SP, 345). 이 광채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한 불기둥”을 기념하는 것이 었으며, “또한 메시야의 오심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였다”(시대의 소망, 463). (450.2)
 예루살렘을 불빛으로 환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당신의 빛을 이스라엘에 비추시러 오실 메시야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예수께는 그 장면이 더 넓은 의미가 있었다. 환한 성소의 등불이 그들 주변을 비추듯이, 영적 빛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어두움을 환하게 하신다. 그러나 상징은 불완전하였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이 축제의 등불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생애의 목적을 나타내는 이 별로 중요치 않은 표(tokens)가 필요하지 않으셨지만, 이 진지한 예배 행위를 그는 받으셨다. “손수 하늘들에 다신 그 큰 빛이 그분의 사명의 영광을 더 잘 나타내는 것이었다”(시대의 소망, 463). (450.3)
 온 세상에 비추기 위한 빛
 우리 주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이스라엘 뿐 아니라 열국의 “세상에 오는 모든 사람들을”(요 1:9 KJV) 비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사야는 메시야의 빛이 유대인들의 편견과 배타주의를 쫓아버릴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 9:1, 2; 60:1~5). 예수께서 친히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셔서 이 예언들을 성취하신 것은 장막절 때였다(요 8:13, 시대의 소망, 463, 464). (450.4)
 빛은 하나님에 대한 상징이다. 빛은 암흑의 물이 대양 깊은 곳을 덮어 넘칠 때 생명을 창조하셨고(창 1:2~5), 헤브론의 장막에서 충성된 자들의 조상(아브라함)과 언약하시기 위해 피가 흥건한 사이를 지나셨다(창 15:17, 18). 빛은 호렙의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당신의 모습을 보이셨고(revealed incarnation 출 3:2), 오합지졸의 무리로 가나안을 정복하도록 인도하셨다(출 13:21, 22). 빛은 율법을 반포하기 위해 시내산에 내려오셨으며(출 33:18, 19; 34:5~7, 29, 30), 더럽혀진 갈멜산 위에서 엘리야의 믿음을 옹호하셨다(왕상 18:38). 그리고 요람(cradle)이 죄로 생긴 심연(chasm)에 다리를 놓을 때 빛은 구유를 둘러쌌으며,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의 믿는 마음에 비치셨다(눅 2:9). 이리하여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그리스도의 주장이 “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 깨달음(insight)을 가져왔다. (450.5)
 그들은 이전의 모든 계시들이 그분 안에서 실현됨을 느끼고, 한 층 더 큰 능력이 곧 보여질 것을 희망하였다. (451.1)
 부활의 빛
 빛은 예수의 무덤 주변의 흑암의 군대를 물리치고, 죽음의 밤이 끝났음을 선포해야 하였다(마 28:2, 3). 빛은 이름 모를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의 더듬거리는 입술에 기름을 바르고, 살아나신 구세주에 대한 이야기로 그들을 놀라게 할 것이었다(행 2:3). 빛은 베드로를 놓아 주었고(행 12:7), 사울을 변화시켰으며(행 9:3), 바울을 위로하였고(행 23:11), 구원의 동굴에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비추었으며, 거기로부터 빛난 광채를 지상의 가장 어두운 구석까지 던졌고, 마침내 다시 오시는 구세주의 얼굴에 초점을 모았다. (451.2)
 어떤 이들은 등잔이 매일 저녁 켜질 때, 레위인 합창대가 15편의 “올라가는 노래”(시 120~134)에 맞게 15번째 계단에서 멈춰 서서 악기의 반주에 따라 노래를 불렀다고 생각한다. 성전에서 타오르는 등잔 불빛 속에서 즐거워하는 경배자들에게 그들 국가의 과거 영광에 대한 추억과 미래의 축복에 대한 희망이 떠올랐다. (451.3)
 동일한 보이지 않는 광채가 오늘날에도 비치고 있다. 그리스도인 순례자들은, 세상의 빛께서 그들의 가는 길을 비추고 계시기 때문에 더이상 거룩한 성으로 여행할 필요가 없다. 갈바리에서 흘러나오는 빛(splendor)이 이제 세상을 밝히고, 성령에 의해 밝아진 은혜가 죄의 음울(gloom)을 몰아낸다. 예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샘이 흐르고, 그의 피로 인준된 언약이 각자의 생애에 영광스런 구세주의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참 포도나무에서 짜낸 포도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고, 실로암 못에 눈을 씻어 시력을 회복한 소경처럼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451.4)
 장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하늘 아버지께서 제공하신 식량을 거둠으로써 즐거워하고, 그분이 그들의 갈증을 풀기 위해 주신 물을 마시며, 그분의 성전 가까이에 세워진 초막에서 살면서 그 장소를 즐기고, 수천 개의 등잔 빛 속을 걸으며, 같은 믿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과 같이 교제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는 다가오는 해에도 인정 많으신 하늘 아버지의 크신 섭리가 있겠지 하고 기대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행복들은 우리의 영존하시는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추수 때에 누릴 즐거움과 휴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451.5)
 “절기의 큰 날”인 티스리 22일 제8일에 축제 행사의 총 마무리를 하여, 그날을 안식일로 지키고 성회로 모인 후 간단한 희생을 드린다.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움막에 살지 않고 물 긷는 일도 중지하며 등불들도 다 꺼진다. 이렇게 해서 그 해의 장막절은 끝난다. (451.6)
 장막절은 영원한 성(city)을 가리킴
 장막절은, “지난날의 광야 여행을 회상하게 함과 동시에 추수절로서, 마지막 수확의 큰 날, 추수의 주님께서 당신들의 일꾼(reapers)을 보내시어 가라지는 묶어 불에 던지고 알곡(wheat)은 모아 곳간에 들이게 하실 그 때를 가리켰다”(부조와 선지자, 541). 이스라엘의 선지자(스가랴)는 새 세상에서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을 내다 보았다(슥 14:16). (451.7)
 이 예언은 곧 성취될 것이다. (452.1)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실 것이다(사 25:6~8). (452.2)
 생각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연상하면서 절기를 지켰다(시대의 소망, 454).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들도 초막절—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들을 기쁨으로 기념하는 절기를 갖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베푸신 구원을 기념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오류의 암혹으로부터 당신의 은혜와 진리의 귀한 빛 안으로 인도하신 것을 기쁨으로 회상하여야 할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540, 541). (4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