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절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축제이며 예수님 당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던 순례 절기였다(요 7:2, 참고 대하 8:13; 스 3:4; 슥 14:16~19). 히브리인들은 그것은 수코트(Succoth) 혹은 “초막절”(of booths)(학하—수코트)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 경배자들이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만든 구조물 속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우리(lair)를 뜻하는(렘 25:38; 시 10: 9; 사 1:8; 요 4:5) “움막”(booth)은 간단한 모양의 목가적(bucolic) 오두막을 말하는 것이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스케네 혹은 스큐오스)는 용기(container, 벧전 3:7; 마 12:29; 17:4; 고후 4:7; 행 27:17; 9:15), 모세의 성막(히 12:9), 텐트,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밑에서 안전하게 쉬는 쉐키나의 날개(시 69:11; 욥 36:29; 삼하 22:11) 등으로 사용되었다. (444.1)
 요한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자들 위에 펼치시는 사랑의 장막(pavillion)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였으며(계 7:15; 참고 요 1:14), 다윗은 오래전에, 하나님의 성도들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시 23:6) 거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였다. 이런 모든 개념이 “움막”(booth)이란 말 속에 숨겨 있다. 애굽의 “속박의 집”을 떠난 이스라엘은 잠시 광야의 임시 숙소(shelter)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 곳은 태양빛과 열기, 바람과 비를 막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광야에서 헤매는 동안 하늘의 보호, 자유와 행복 등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시 31:21; 사 4:6; 신 8:7~15). 이 짧은 기간의 임시 생활을 통해 그들은 삶의 덧없음과 삶의 여로 끝에 만나게 될 영원한 집에 대한 동경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444.2)
 초막들을 성막 주변에 만듦
 이 “여호와의 절기”가 후에 야훼께서 당신의 성막을 위해 선택하셨던 팔레스틴의 여기저기에서 경축될 때, 성소(Shrine)가까이 편리한 곳이면 아무데나 초막들이 쳐졌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전을 세운 후에는 이 임시 숙소들은, 때로는 집의 평평한 지붕에, 혹은 길가의 넓은 곳에, 심지어는 성전 뜰에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들은 안식일에 갈 수 있는 거리의 주변 언덕들 이곳저곳에 자리하였다(A, Edersheim, The Temple, 277). (444.3)
 느헤미야는 이 움막을 위해 사용한 나무들의 목록을 우리에게 남겼다. (444.4)
 심산의 향기를 내뿜는 소나무,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풍작의 상징인 올리브, 수줍은 도금양, 포로 시절 흘린 눈물의 추억 버들 등으로 만든 이 오두막은 제7월 티스리 14일까지 완성해야 했으며 15일부터 1주를 차지하였다. 이 축제 기간 동안 예루살렘은 “아름다운 숲의 모습을 지녔으며”(시대의 소망, 448), 그러나 싱그러운 봄의 푸른색이 아니라 가을의 붉은색, 노란색, 밤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회색이 간간이 섞인 이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은 인간의 날이 곧 사라질 것을 속삭였고, 이 시들어 가는 군엽속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순례 생애의 비문(epitaph)을 읽었다. 죽음의 노래를 부르는 마른 잎들의 바스락대는 소리는 사람들로 영원한 희생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445.1)
 봄에 있은 무교절에는 보리단이 추수기를 맞기 위해 성별되었고, 어른의 오순절엔 두 밀가루 빵이 드려졌으며,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가을 “수확절”(출 23:16)때엔 과수원과 포도원에서의 추수가 완료됨을 경축하였다. (445.2)
 기쁜 추억의 시간
 이 교제의 한 주간을 통해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들은 그들이 받는 모든 축복들이 하늘 아버지의 풍성한 손에서 오는 것임을 인식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농작물이 안전하게 거두어 들여지고 올리브로부터 기름이 짜지고, 포도가 말려지거나 으깨져서 값비싼 상품이 되고, 밭이나 과수원에서 추수 작업이 끝나 다음 계절을 맞을 준비가 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느낀 것이 틀림없다. “이 시기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 그분의 계획이었다”(시대의 소망, 447, 신 16:13~17). 경배자들은 휴일(holiday)분위기 속에서 성소에 모여, 하나님의 모든 풍성하신 축복에 대해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찬양과 자원하는 제물(free-will offering)을 드릴 준비를 했다(레 23:1~36). (445.3)
 마침내 준비를 끝내고 사람들은 티스리 15일부터 22일까지 성전 주변에 머물렀다. 짧고 상쾌한 가을날들은 따뜻하고 유쾌한 밤이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워지게 만들었고,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의 성당에서 함께 교제하도록 초대하고 또 초대를 받았다. 집안일은 까맣게 잊혀지고, 매일 저녁 순례 가족들은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레위인, 과부, 고아, 나그네(신 16:14)—을 초대하여, 함께 잔치를 즐겼다. “이스라엘에서 난” 사람들은 다 초막에 거하면서,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나 부조들의 유목 생활을 회상하였다. 그들의 선조들이 했던 이같은 경험들은, 하나님의 여행객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점점 더 잘 신뢰하기 위해서는 희생적으로 사는 생애의 불확실성을 견뎌 낼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함을 말해 주었다(벧전 2:11). (445.4)
 연말에 오는 이 수장절(출 23:16)은 이스라엘의 신성한 축제 싸이클의 절정 일 뿐만 아니라, 휴식기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절기는 하나님의 과거의 선하심에 대한 즐거운 추억과 함께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을 느끼게 하는 때였다. 여기(출 23:16) 히브리어 “종”(終)은 “밖으로 나감”의 뜻도 있고 “안으로 들어옴”의 뜻도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끝”뿐만 아니라 “시작”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이 단어는 떠오르는 태양을 묘사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어 왔고(출 34:22; 창 19:23), 아이의 출산(욥 1:21; 왕상 8:19; 사 11:1)을 뜻하기도 했고 계절의 순환을 암시하기도 한다. (445.5)
 이 축제 주간은,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이 삶의 순환을 생각해 보며 그리스도는 “처음”이시요 “나중”이심을 명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446.1)
 이 순례 축제의 시기가 중요했음
 5일 전에 있었던 속죄일의 거룩한 의식은 모든 경배자들로 자신의 생애를 살펴보게 했었다. 그리고 나서 아사셀 염소가 광야로 인도되어 사라지게 함으로써 그 의식은 진영에 평화를 가져왔다. 그런 후에 바로 “오 여호와께 감사할지어다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는 승리에 찬 노래가, 장막절을 위해 거룩한 성을 향해 걷는 기쁜 순례자들에게서 흘러 나온다. 종종 히브리인들은 장막절을 단순히 “절기”(왕상 8:2; 대하 5:3)라고 부르기도 했다. 요세푸스는 이 절기가 유대 역사 후반기에는 가장 거룩하고 가장 두드러진 축제였었다고 회상하였다(Antiquities VI: 4:1). (446.2)
 특별히 시편의 세 노래(7, 80, 83, 시편 8, 81, 84의 표제를 통해 알게 됨, E. W. Bullinger, The Companion Bible, 부록 93, 95)가 이 절기 동안 불러졌고, 압착기, 종종 포도즙틀을 말하는 카트(gath)란 말에서 파생한 깃딧(Gittith)이라고 이름하였다(이 말에서 기름짜는 틀을 말하는 겟세마네란 단어가 파생됨, 참고 유 6:11). 기톳(Gittoth, 과일)은 가을에 대해 말하며 추수 감사와 장막절을 암시한다. 소산님(시편 44, 48, 제목)은 꽃 혹은 백합을 말하며, 몸과 그 희망을 가리킨다. 시편의 이 두 그룹의 노래들은, 축제 행사 동안 생각이 있는 경배자들에게 봄철에 유월절과 가을에 장막절의 깊은 의미를 상기시켜 주기 위해 불려졌다. 깃딧 노래와 함께 지키는 유월절은 주님의 구속하는 힘을 가르쳐 준다. 소산님 시와 함께 보내는 장막절은 주님의 계속적인 내재와 최고 상태의 그분의 추수하는 집(His harvest home)의 모습을 그려 준다. 이 다섯 시들을 순례 절기들과 관련해서 연구해 보면, 당신의 백성을 구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다. (446.3)
 경축 주간에(신 16:13) 제8일이 첨가되었다(부조와 선지자, 540). 그러나 첫날과 여덟째날 만이 아무 노동도 하지 말도록 규정된 “성회”로 여겨졌다(레 23:35, 36). 이 두 날이 일곱 예식 안식일의 마지막 두 날이었다. 그 사이 날 동안에는 일상 업무를 볼 수 있었다. 이 주일의 첫날의 안식(Sabbath)의 에덴에서의 평화를 가리키며, 마지막 여덟째 날의 안식이 회복된 에덴에서의 예상되는 안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446.4)
 이 절기의 역사적 관련
 모세에 의해 지어진 성막의 봉헌식(출 25: 8. A. Edersheim, op. cit., 286),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성전의 성별식(왕상 8:2; 대하 7:8), 스룹바벨의 성전 정화식(마카비하 10: 6~8)등이 장막절 때에 있었다. 이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에 대한 성취로 열국의 소망을 보내심으로써 사람의 아들들 사이에 당신의 “장막”을 세우실(요 1:14) 그 때를 예기하였다(학 2:7; 시대의 소망, 23). 그러나 이런 영감적 모임들에도 불구하고 포로 생활 이전의 이스라엘은 이 절기를 대체로 소홀히 한듯하다. (446.5)
 느헤미야 시대에(느 8:17), 영감받은 서기관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의 날 때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그 절기를 지키지 않”을 슬픈 탈선의 역사를 생각하였다. (447.1)
 번영 중에 간과되었던 장막절이 바벨론으로부터 황폐된 땅과 더럽혀진 성전으로 돌아온 소수의 초라한 망명객들에 의해 감사의 예물과 함께 하나님께 드려졌다. 갈대아의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 놓고 울던 사람들이, 가나안의 버드나무로 움막을 짓고 기뻐하였다.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틀에서 짓밟히던 그들이 이제는 감사에 찬 남은 자들이 되어서, 아버지의 추수집으로 돌아오는 탕자처럼 돌아와 노예 생활의 곡괭이를 구원의 종려가지와 바꾸었고, 거룩한 도성의 폐허 무더기 속에 움막이 다시 세워졌다. (4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