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3 부 안식일과 생명 제 9 장  안식일, 거할 곳이 많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
 공간의 성소는 공간의 정점이고 정상이다. 두 사람이 함께 서있지 못할 독존과 독처의 공간이다. 공유하고 함께 사는 공간이 아니라 독점과 배타가 극대화된 공간이 공간의 성소이다. 이 장소가 생명의 터전으로, “평강과 희락”의 동산으로 하나님의 성소로 예찬된다면 이는 분명 희극이다. (360.4)
 역사적으로 공간의 성소는 공유하여 함께 사는 생명이 터전이나 피난처가 아니었다. 배타적 집단이 독점하고 독처하는 공간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공간이 아니었다. 선택받은 자들의 독점적인 공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공간이었다. 점유한자들의 교만의 공간이었고 차별 받는 자들을 학대하는 공간이었다. 이들의 정상에 독존적이고 배타적인 공간의 신들과 공간의 신이 있다. (360.5)
 공간의 성소는 공유와 공생, 상생과 상통을 알지 못하는 유아독존적인 신들과 독선적인 사제 계급들과 독선적인 민족들이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삶을 영위하는 “가증하고 미운 물건”이었다. 생명을 축복하는 전당이 아니라 특권의 수호와 배척받은 자들의 저주와 복수가 맹세되는 곳이었다. 생명을 북돋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사람의 피가 강을 이루는 곳이었다. 산자들의 공간이 아니라 죽음의 땅이었다. 죽음으로써 도전하고 죽음으로써 지킨 땅이었다. 죽음으로도 끝내 지키지 못한 땅이다. 이 신전의 신들과 신은 어느 한때도 산 자들의 신이 아니었다. 죽은 자들의 신들이었다. 삶을 부르는 신들이 아니라 죽음을 부르는 신들이었다. (361.1)
 예루살렘도 다윗이 빼앗은 성이다. 창칼로 빼앗고 창칼로 지킨 성이다. 빼앗아서 취한 ‘거처할’ 곳이다. 빼앗아서 세운 성소가 예루살렘 성소이다. 여부스족에게서 땅을 빼앗고, 레위족에게서 법궤를 빼앗고, 백성에게서 재물을 빼앗고, 어미에게서 자식들을 빼앗고, 아내에게 남편들을 빼앗아가 세운 성소이다. 땀과 눈물과 피로 세운 성소이다. 땀과 눈물과 피로 지킨 성소이다. 땀과 눈물과 피로도 지키지 못한 성소이다. 탈취하는 사람들이 죽고 지키는 자들이 죽어간 성소이다. (361.2)
 느브갓네살 왕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죽고 사로잡혀간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의 예루살렘 유린으로 흘린 피를 생각해 보라. 로마의 베스파시우스와 그 아들 티투스로 인한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생각해 보라. 이슬람 지배하의 기독교 성지를 탈환하고자 했던 십자군 전쟁의 피와 눈물을 생각해 보라. 현대사의 여러 종교분쟁들을 생각해 보라. 공간의 성소는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성소가 아니다. 사람 생명의 “있을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붙어있지 못한 곳이다. 그 조차도 생존의 성밖으로 끌려나가 나무에 매달려 죽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나라 이러한 성으로 “거할 곳이 많은 아버지의 집”을 대표할 수 없다. 이러한 성은 자애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의 집이 아니다. 천국이 아니다. ‘지옥’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이 “지옥문”을 향해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다”(렘 7:4)라고 외쳐왔다. (362.1)
 공간의 성소는 예루살렘과 메카와 황금 사원과 황룡사 9층탑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모두 공간의 성소이며 육체의 성소이다. 피 흘려 뺏은 성이며 피 흘리며 지키는 성소이다. 죽어도 지키지 못하는 썩어질 성소이다. 그런 점에서 육체의 순결도 공간의 성소이다. 취약한 성소이다. 언제나 유린당하는 성소이다. 많은 남성들은 성소를 유린하는 “짐승들”이었으며 “군인”들이었다. 이 성소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병들고 죽어야 했다. 죽음으로써도 결국 지키지 못했다. 진실로 허망한 것이 육체의 성소이요 공간의 성소이다. (362.2)
 공간의 성소와 육체의 성소에 이루어지는 이 모든 참극과 허망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공유가 불가능하고 함께 사는 삶이 불가능한 공간적 소유의 본성에 있고 그 공간의 속성에 길들여진 인간성에 있다. 이 세상 나라는 거할 곳과 양식이 부족하고 핍절해서 근심하고 싸우는 나라 일뿐 아니라 사람들이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나라이다. 아무리 풍족하고 제 아무리 성공해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걱정이 없어지지 않는 나라이다(신 28:47, 48). 함께 살수 없고 함께 살 마음이 없는 나라가 세상 나라이다. (363.1)
 이렇게 보면 함께 사는 나라가 좋은 나라이고, 우리와 함께 사시는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다.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독처하는 존재는 신이든 사람이든 누구를 막론하고 좋지 않은 존재이며 그런 나라는 나쁜 나라 곧 지옥이다. 세상 나라와 세상의 신들과 세상의 백성들은 하나같이 함께 사는 삶을 알지 못한다. 함께 사는 삶을 배척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 신들의 형상이고 세상나라는 그 신들의 나라의 형상이며 모양이다. 그 신들은 신들의 나라에서 사람들을 내쫓아 그 나라의 축복을 독차지한 신들이다. 사람들이 그 쫓겨난 낙원으로 쳐들어올까 불안해하는 신들이다. 그들이 들어와 신들의 양식을 축낼까 걱정하는 신들이다. 사람들도 신들처럼 행복해질까 걱정하고 사람들도 신들처럼 오래 살까 걱정하는 신들이다. 아궁이의 불씨 하나도 사람들과 같이 사용하지 못하는 신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씨를 훔쳐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불씨를 훔쳐온 사람의 영웅 프로메티우스는 신들의 노여움으로 극악한 처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간의 신들이 모두 이와 같다. (363.2)
 안식일, 우리와 함께 사시는 하나님의 넓고 풍족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넓고 풍족한 나라이다. 안식일은 이러한 나라의 상징이고 이러한 삶의 체험이다. (364.1)
 안식일은 시간의 왕국이다. 시간의 왕국은 넓고 풍족한 나라이다. 어느 누구도 시간을 독차지하지 못한다. 시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독점되지 않으며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도 모두 점유되지 못하는 넓은 세계이다. 시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평등한 세계이다. 아무리 강력한 임금이라도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순간은 없고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참여하지 못하는 순간은 없다. 왕에게 속한 순간은 동시에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속한 순간이다. 사람은 공간을 독점하지만 시간을 공유한다. (364.2)
 공간은 사람을 경쟁자와 적수로 만들며 이웃에 대해 거짓되게 만들지만 시간은 사람을 진실한 동시대인으로 만들고 동행자로 만든다. 시간은 사람에게 독처하는 집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는 집이다. 서로가 싸움하는 전쟁터가 아니라 친교를 나뉘는 사귐의 장이다. 시간의 왕국인 안식일로 표상된 하나님 아버지의 집은 강한 자와 부자와 의인만이 거처하는 곳이 아니라 “가난한 자와 포로된 자, 눈먼 자와 눌린 자들”(눅 4:18; 사 61:1, 2)이, “고아와 과부들과 고자들이”(사 56:4; 슥 7:10) 함께 즐겁게 살 수 있는 넓고 풍족한 집이다. 아비와 더불어 그 아들과 딸이, 주인과 더불어 그 남종과 여종이(출 20:1), 그리고 그 여종의 자식까지(출 23:12), 그리고 소와 나귀까지 (출 20:10; 23:12), 공중의 새들과 들의 풀과 꽃들까지 (마 6:26-30) 함께 은혜를 구가하며 삶을 누리는 넓고 풍족한 집이다. (364.3)
 진실로 안식일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사는 나라이다.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나라가 이러한 나라이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우리의 기업이 이 나라이다. 이 나라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벧전 21:4) 있는 것이며, 이 나라가 안식일을 통하여 공개되어 있는 것이다. (364.4)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하며 표범과 어린 염소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과 어린 아이가 함께 사는” 나라이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와 소가 함께 풀을 뜯는” 나라이다. “젖 먹는 아이와 독사가 같이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사 11:7, 8, 9) 나라이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사는 나라이다. (365.1)
 안식일의 나라는 또한 아무리 많은 사람과 함께 즐거워해도 기쁨이 줄어들지 않고 부족하지 않는 나라이다.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고”(사 65:18, 19), 만민이 함께 기뻐하는 나라이다.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는” 나라이다. 모든 축복과 은혜가 풍족하고 넉넉한 나라이다. 어찌하여 하나님 나라는 나누어도 나누어도 부족이 없고 무한하고 무량한 은혜의 넓은 세계이고 세상나라는 아무리 풍족해도 늘 핍절한 근심과 싸움의 나라가 되는가? (365.2)
 안식일은 시간의 왕국이다. 안식일의 삶은 넓고 풍족한 세계이다. 사람들이 안식일의 텅 빈 시간처럼 제 마음을 비우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넓고 풍족한 세계에 속한다. 나는 시간 안에서 모든 사람의 삶에 연루되고 모든 사람은 나의 삶에 연루된다. 타인의 시간에 내가 동참함은 언제나 나의 시간을 남에게 내어줌이다. 내가 이웃의 시간에 동참하지 않은 순간이 없고 내가 남에게 내어 주지 않은 순간이 없다. 우리는 시간과 같은 마음이 되어 시간과 같이 넓고 풍족한 세계에 속한다. (365.3)
 사람은 마음 하나로 넓고 풍족한 시간의 왕국에 속하기도 하고 발하나 들여놓을 틈이 없는 공간의 삶에 속하기도 한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가 모두 마음 하나에 달렸다. 마음에 세상 나라가 있고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 마음이 한 평이면 세상이 한 평이고 마음이 우주이면 세상도 우주이다. 하나님 나라는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 나라이다.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먹고도 일곱 광주리의 떡이 남아도는 나라가 안식일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나라이다. (366.1)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각박한 세상의 마음을 품으면 세상 나라가 된다. 마음이 변하면 천하가 변한다. 하나님의 재창조는 마음의 개벽이고 사람의 거듭남은 마음에서 다시 태어남이다. 성품의 변화가 재창조이다. 먹고 마시는 것을 걱정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어떤 마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걱정하는 나라가 개벽된 나라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나라가 넓고 풍족한 나라이다. (366.2)
 반면 부자의 마음은 좁고 인색한 마음이다. 부자의 마음, 어른의 마음, 의인의 마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마음이 자기만 알고 남을 모르고 자기만을 중히 여기고 남을 차별하는 좁고 인색한 마음이다. 자기의 의와 지식과 착함을 내세우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다른 사람을 삶의 처소와 기회에서 젖혀놓은 강퍅한 마음이다. 공간의 신들을 닮고 공간의 세상을 닮은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다. 거할 곳이 부족하고 양식이 핍절한 먼 나라에 속한다. 넓고 풍족한 나라로 나가려면 공간의 소유를 팔고 시간처럼 텅 빈 마음으로 가야한다. 텅 빈 마음과 텅 빈 손으로 텅 빈 시간의 세계로 가야한다. 아옹다옹하는 공간의 “소유를 다 팔아”(마 13:44) 광활한 시간의 밭, 공유의 밭, 생명의 밭을 사야한다. 공간의 협소한 소유에 집착하면 넓은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생명까지라도 소유의 관념으로 붙들면 생명을 잃는다. 생명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다. 공간의 소유물에 집착하듯 생명에 집착하는 자는 그 생명을 잃을 것이며 존재하는 생명을 위하여 소유의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하나님 안의 참 생명을 얻을 것이다(눅 9:24, 25). 하나님 안의 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지고 부활로 솟아난 생명이다. 하나님의 넓은 집은 하나님이 그의 텅 빈 마음으로, 소유를 버리는 마음으로 소유라면 생명도 아끼지 않는 마음으로 세우신 집이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상으로 내려간 마음으로, 만인을 위하여 제 생명을 내놓은 마음으로 세운 집이다. 안식일은 이 집을 상징하는 날이고 이 집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날이다. (366.3)
 나라와 의와 신성과 생명을 우리의 공유로 내놓은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