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다니엘 8장 하나님과 그분의 성소 IV. 모호해진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
 교회가 사람들이 십계명에 지시된 대로 주일의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을 못하게 하고 대신에 일요일을 지키게 한 것은 잘못이 아닐까? (171.4)
 가톨릭 신도들이 오늘날 고통스럽게 결단을 내려야 할 입장에 있게 된 것이 이상한 일인가? 가톨릭 신도들 중 상당수가 이로 말미암아 종교 자체를 등지게 되고 또 적지 않은 가톨릭 교도들이 개신교로 개종한다고 해서 놀라울 것인가? (171.5)
 이러한 사정으로 하여 개신교로 개종한 가톨릭 신도들은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 보다 더 헌신적인 개신교도가 되는 경우가 많다. (171.6)
 의심스러운 전통과 선한 동기
 개신교 신자들은 요술을 부리는 주교들의 집단이 때때로 마귀와 더불어 모의를 하고 성경에는 찾아볼 수 없는 교리들을 고의적으로 날조한다고 상상할 필요는 없다. 중세 기독교의 전통은 오히려 그렇게 나무랄 수 없는 동기에 종속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부터 발전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71.7)
 이미 앞에서(134~137페이지) 보았듯이, 2세기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상의 안식일을 포기한 배경에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비인도적으로 잘못 사용했다는 사실과 일요일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에 더 적절하게 보였다는 점이 작용했던 것이다. (171.8)
 가톨릭 사제들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는 전통이 발전된 배경에는 기원후 250년의, 단기 간이지만 혹독하였던 데키우스(Decius) 박해 때 상당수의 교인들이 배도한 사정이 깔려 있다. 당시 노바티안주의 자들(Novatianists)로 일컬어지는 대단히 엄격한 감독들의 집단은 데키우스 박해 기간에 배도한 교인들이 너무나 치명적인 죄를 범했기 때문에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다른 감독들은 하나님께서 뉘우치는 모든 영혼들을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일단 감독들에게 죄를 자복한 배교자들에게는 용서를 베풀었다. (171.9)
 고행의 관습도 거의 같은 시기에 도입되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중한 죄를 가벼이 여기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작용하였다. 처음에 실시된 고행은, 죄 지은 사람을 여러해에 걸쳐 공중 예배에 참석치 못하게 하고 대신 교회 문 밖에 서서 환시 속에서 예배 기간을 보내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나중에는 서 있는 곳이 교회 밖에서 교회 안으로 바뀌어 졌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형태로 달라졌다. 세월과 함께, 너무 심한 고행은 오히려 효과가 좋지 못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사람들은 죄를 되로 짓고 고행을 말로 치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71.10)
 그래서 덜 무거운 고행이 제시되었다. 돈을 내게 한다든가 십자군에 복무케 하는 것 등이다. 이 때쯤 해서는 다른 동기도 작용했다. 죄의 용서를 돈 받고 팔고 그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름다운 교회들을 짓는 데 사용하면 좋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다. (172.1)
 성만찬에 사용하는 포도주를 “하나님의 피”로 간주하게 되자, 12세기경의 가톨릭 사제들은 대단히 그럴 듯한 이유를 가지고 평신도들에 대한 포도주의 제공을 중단하였다. 평신도들이 부주의하여 하나님의 피를 마룻바닥에 엎지르는 불경죄를 지으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염려에서였다. (172.2)
 13세기 교황청의 종교 재판소 관리들도,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비로운 동기를 가지고 이 단자들을 화형장으로 양도했다는 것이다. 그 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잠깐 동안 불에 타죽는 고통을 치르는 대신에 죽은 다음에 지옥불에 타는 더 큰 고통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172.3)
 의심스러운 전통들은 그럴 듯한 동기에서 발전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선한 동기로 잘 못할 가능성이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셨다. 말씀하시기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하셨다(요 16:2). (172.4)
 언젠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예수님은 단순한 풍자 이상의 뜻으로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라고 하셨다(막 7:9). 같은 자리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권위에만 기초한 예배를 “헛되고”, 쓸모없는 것이라고 낙인을 찍으셨다(마 7:7). (172.5)
 서민 종교
 교회의 공식적인 교훈의 질(質)이 여하하든, 신학자들의 주장과 일반 목사들 및 신도들의 믿고 생활하는 것의 사이에는 늘 어떤 간극이 있게 마련이다. 중세기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실제로 교인들을 계속적인 제사직의 봉사 즉 하늘 성소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타밋으로부터 분리시킨 증거가 있는가? 실지로 중세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용서에 대한 진리와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심령속에 승리자로 거하시려는 소망에 관한 진리를 어둡게 하였는가? (172.6)
 슬프게도, 중세기를 통하여 설교단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좀처럼 설교되지 않았다. 아예, 어떤 주제에 관한 것이건 설교 자체가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1281년에 펙함(Peckham) 추기경이 휘하 사제들에게 최소한 1 년에 네 번의 설교를 하게 했을 때, 이 조치가 하나의 개혁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었다.18 그런데, 사제들의 설교란 것이 터무니 없는 기적들의 이야기와 일곱 가지 무서운 죄에 대한 끔직한 예화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사람들이 설교 시간을 기피하고 미사 때에나 교회를 찾게 되었다. 또 설교 시간에 교회 안에 머문다고 해도 설교에 귀기울이기는커녕 잡담이나 하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장기를 두는 일도 있었다 한다.19 (172.7)
 이렇게,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으나, 중세 후기에 와서 떠돌이 면죄부 판매인들이 크게 재미를 보고, 때에 따라서는 대단한 스캔들까지 야기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면죄부 판매인들은 일종의 수사(修士)들인데, 교황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권리에 의해 신도들의 고해를 듣고 죄를 용서해 주면서 그 대가로 돈을 받았다. 면죄부 판매인들은 실제로 죄의 용서를 행상하였다.20 그들은 면죄부 대금의 일부를 코미션으로 떼어 갖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면죄부를 주는 경향을 보였다. 술주정꾼들과 밀통꾼들이 면죄부를 애용하였다. 그러나, 사려 깊은 사람들은 달리 생각했다. 마르틴 루터가 태어나기 벌써 1세기 전에, 죠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윌리암 랑랜드(William Langland), 존 위클립(John Wycliffe) 등은 면죄부 판매인들이 참된 종교에 위배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랑랜드는 「농부 피어즈의 환상」에서 면죄부 판매인들을 평하여 이르기를, 돈만 주면 누구에게나 고해를 들어 주고 면죄부를 나눠 주면서 불쑥 나온 배에 가방을 메고서 온 땅을 떼지어 다니는 “덩치 큰 게으름뱅이”라고 하였다.21 (172.8)
 물러빠진 순회 고해 사인 면죄부 판매인과 지역의 교구 신부들 사이에 보기 민망한 싸움이 발생하곤 하였다. 교회의 강단을 사용하는 문제로 이 순회 고해사와 교구 사제가 멱살을 잡고 몸다툼을 했던 경우도 있다. 단상에서 밀려난 면죄부 판매인은 단 아래서나마 기어코 그 싸구려 면죄부 광고를 해내고 만다. 교회 예배가 엉망이 되었을 것은 불문 가지의 일이다. (173.1)
 그러나, 신도들은 사제의 설교에 만족을 얻지 못하고 면죄부 판매인들이 방매하는 “은혜”에 기만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미사에 의해 오도되기 일쑤였다. (173.2)
 사제(司祭)는 사제 좌(司祭座)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서 등을 돌리고 서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그리고는, 조그만한 종을 울린 다음 라틴어 주문을 외운다. “호크 에스트 코르푸스 메움(Hoc est corpus meum:이것은 나의 살이다)”. 신도들은 옛날 베들레헴에서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듯이 사제가 제단에서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줄로 믿었다. 예외적으로,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성찬 예배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위안의 순간이었겠으나, 일반 신도들에게는 미사 참석 자체가 일종의 마술에 의한 구원을 뜻했다. 다소 지루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연옥의 고통을 피하는 손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진짜 그리스도가 살아 계셔서 하늘 성소에서 용서의 봉사를 행하시며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의 심령에 승리자로 거하려 하신다는 인식은 확실히 감추어지게 마련이었다.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