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7 부 삶의 순환 속의 그리스도 (죄의 결과(assignations)로부터의 자유) 33. 유월절과 무교절 (나의 모든 보호는 그리스도의 것임)
 오직 부패되거나 발효되지 않는 순수한 “포도의 즙”(blood of grapes)만이 부패에 물들지 않은 구세주의 피를 표상할 수 있었다. (428.6)
 누룩 없는 떡처럼 발효되지 않는 포도주도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자양분을 받고자 하는 모든 자들은 죄의 누룩을 없애 버려야 한다”(부조와 선지자, 278)는 교훈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인들의 “양식”에 대한 이 표상은 메시야의 봉사에서 보존하고 지키는 면을 가리키는데, 이는 “구세주께서, 믿음으로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는 모든 자들을 최후에 죽음에서 일으키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영적 양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에서 살기 위해 불멸의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뿌리 깊은 희망을 심어 준다”(2SP, 278). 장막절 때에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단 것”을 마시라고 권하였으며(느 8:10), 그의 추천은 유월절 때에도 적용되리라 본다. (429.1)
 쓴 나물을 먹음
 “쓴 나물” 찬으로는 야생 엔다이브, 상추, 치커리, 다닥냉이 무리의 식물(pepperwort), 민들레(출 12:8; Pesahim 2:6)등을 음식과 함께 먹어서 이스라엘의 노예살이에 대한 기억들을 풍기게 했다. 이 쓴 맛은 일부러 첨가한 것인데 양고기와 떡의 냄새에 흡수되게 한 것이 아니라, 그 “쓴” 맛이 강하게 느껴져서 애굽에서 그들이 겪은 잔인하게 고통스러웠던(bittermess) 노예 생활과(출 1:14, Pesahim 10:5) 광야에서의 고달팠던 방랑 생활을(부조와 선지자, 278) 회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출 1:14, Pesahim 10:5). (429.2)
 이 쓰디쓴 이파리들은 빵을 찍어 먹는 매운 소스에도 넣어 사용하였다(Pesahim 10:3).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을 때에 그것은 우리 죄 때문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것이다”(Bible Training School, 1904. 4). (429.3)
 애굽에서 유월절을 지킨 사람들은 그들의 집에 서서 허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지팡이를 손에 쥐고 곧 떠날 차림을 하였다. 이 모든 상징적 준비를 통하여 그들은 그들의 음식이면에 놓인 것들에 생각을 집중시켜야 하였다. 그들이 식사를 끝내자마자 그들은 애굽의 압제에서 놓여 자유하게 되었다(출 12:31~36). 이런 특별한 음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향하여 바다를 건너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힘겨운 여행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429.4)
 팔레스틴에서는 유월절을 “휴식” 상태에서 먹음
 그러나 그리스도 당시에는 사람들이 예루살렘까지 여행해 가서 거기서 한가하게 유월절을 먹었다. 요한이 구세주의 가슴에 기대어 있는 모습은, 구속주께서 피곤한 순례자들에게 “휴식”을 주시며 풍랑에 시달린 자들에게 안식처를 주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요 13:23, 25). 유월절 식사가 끝났을 때는 사용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불에 사르어야 했다(페사힘, 7:10). (429.5)
 유월절 식사는 화목제 잔치였다. 그것은 경축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속량하시겠다는 맹세로써 당신의 약속을 확증하셨다. 약속을 이루셨을 때는 식사로써 그것을 표하셨다. 어린 양, 떡 포도주, 쓴 나물,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그것들의 성취요, 그것들의 실재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함께 즐기도록 초청된 그 “식사”로서의 당신의 아들의 모습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주셨다. (429.6)
 이스라엘의 유월절과 그리스도인들의 성찬식을 연결해 주는 다리는 십자가이다. (430.1)
 요점을 다시 생각해 보자. 헌신과 깨달음으로 “가정”(family)은 그들이 선택한 어린 양을 죽여, 그 피를 문설주에, 후에는 성전 제단에 뿌리고, 규정에 따라 여러 음식들을 요리하여 먹었다. 이것이 유월절의 언약 식사(covenant meal)였다. (430.2)
 이 하루 동안의 사건이 있은 후에 일 주일 동안의 무교절이 있었다. 이 주일의 첫날과 마지막 날, 그러니까 니산(혹은 아빕)월 15일과 21일은 특별히 거룩하게 여겨졌다. 이 두 날은 연중 일곱예식 안식일 중 처음 두 안식일이며(레 23:15~21; 23:23~25; 23:27~32; 23:33~42), 주일 중 어느 날에 오든지 그들은 이 날을 지켰다. 사람들은 각 지방에 있는 경배 장소로 모여야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시간들은 진행되고 있는 것들의 의미를 깊이 사색해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도들이 즐기도록 초청하시는 그 언약의 친교와 우애를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레 23:6~8). 이 두 “안식일” 이 인간의 순례 생활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영원한 안식 기간으로 둘러싸여 있거나 그 기간 안에 들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이 주일의 평일에는 세상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430.3)
 보리 단을 흔듦
 무교절의 둘째날, 니산월 16일에 익은 보리를 한 단 거두어 주님께 드렸다(레 23:10~14). 이 의식은 매해마다 첫 예식 안식일(15일) 다음날—그 날이 주일 중 어느 날에 오든—에 있었다. 그리하여 16일은 언제나 유월절 양을 드린후 “사흘날”이 되었다. 이 “사흘날” 이라고 하는 상용구는 유월절 의식에서 생긴 말이지만, 첫 곡식단을 주님께 드리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430.4)
 그리스도 당시에 특별히 이 의식을 위하여 예루살렘 근처에 보리가 경작되었다. 적절한 시기에 사람이 바구니와 낫을 들고 보리 단을 베러 가도록 되어 있었다. 이미 선채로 묶여 자라고 잇는 보리 세줌(shocks)을 증인들이 보는 데서 잘라서 하나의 큰 단으로 묶는다(Menahotk 10:1~3). 제사장은 그것을 성전으로 조심스럽게(Solemnly)옮겨 와서, 큰 제단 앞에 서 있는 “아론의 자손” 중 하나에게 건네준다. 그러면 그는 그 보리 단을 위 아래로 여호와 앞에 흔든다. (430.5)
 이것은 그 곡식단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드려졌다가, 다시 제사장에게 돌려지는 것을 뜻했다. 이러한 표시(gesture)를 통하여, 이스라엘 국가 전체 추수의 “첫 열매”를 대표하는 이 곡식 단이, 모든 좋은 선물의 시여자께 드려졌다. 그것을 받으신 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자들을 양육하시고 축복하시기 위해 그것을 다시 돌려주신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즐기는 모든 물질적 이익들이, 그들을 창조하시고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손에서 받은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 의식이 진행될 때까지는 이스라엘의 어떤 농부도 곡식을 개인적으로 수확해들이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430.6)
 히브리 사람들이 이 의식을 처음으로 수행하며 보리 단을 하나님께 흔들어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팔레스틴에 정착한 후 곡식을 뿌리고 처음으로 수확한 그제서였다. 애굽에서 죽임을 당한 유월절 양이, 구원의 여행을 시작하게 하기 위해 그 피를 제공했었다. (430.7)
 이제 수확된 “첫 열매”가, 주님께서 당신의 예언을 성취하셔서 약속의 땅을 그들에게 주시고 은택(bounties)을 더하셨음을 증거하였다. 이리하여 이 의식은, 구속받은 자들이 하늘 낙원에서 하나님께 선물들의 바치게 될 때의 그 감사를 나타내었다. (431.1)
 요제는 제3일에 드림
 예수께서는 거듭거듭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후, “제 3일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다(시대의 소망, 785, 186, 마 16:21; 20:19). 그분께서 유월절양이 되실 것이었기 때문에, 유월절 의식에서 빌어 온 이 구절은 그들에게, 그분의 부활이 성전에서 “첫 열매”가 드려진 바로 그 날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음에 틀림없다. 익은 보리단은 이스라엘 농산물의 첫 것으로서 “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 23)뿐만 아니라 부활의 구세주이신 예수를 예표하였다. 예수께서(첫 예식) “안식일 이튿날”(레 23:10, 11)인 “사흘 되던 날”에 실제로 무덤에서 일어나심으로써 이 거룩한 상징은 니산월 16일, 일요일에 그 원형과 만났다. (4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