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7 부 삶의 순환 속의 그리스도 (죄의 결과(assignations)로부터의 자유) 33. 유월절과 무교절 (나의 모든 보호는 그리스도의 것임)
 “그분, 원형의 어린양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봉헌물(oblation)로 구별하시는 그 시간에, 사람들은 유월절을 경축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후세대의 교회가 깊은 사색과 연구의 주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다. 그것과 관련된 모든 사실들은 의심이 없도록 입증되어야 했다. 그리고 나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분을 향하여야 한다. 그분의 크신 희생 바로 전에 있었던 시위를 통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희생 제물 자체에 끌려진 것과 같이 말이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그런 전시(exhibition)후에 모든 눈이 마지막 끝을 향하여 급속히 나아가시는 그분을 따라가게 될 것이었다”(Redemption: or The Teaching of Christ the Anointed One, 118). (423.1)
 그리스도께서 정죄되신 후 나흘 동안 예수의 이름은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 며칠 동안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는 것을 명절, 즉 유월절에 하게 되지 않게 하라는 대제사장의 말을 확실히 이행하기 위해서 배반자와 음모하였는데, 이는 백성들 중에 소요가 있을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마 26:5; 막 14:2). 그러나 가야바는 실패하였고, 그와 함께, 예언적 표상이 실현 되지 못하게 하고자 했던 사단의 책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일단 죄의 길에 들어서면 인간은 자신을 더이상 통제할 수 없이 되고 넘어지게 하는 폭군이 통제권을 장악하게 된다. (423.2)
 예수를 정죄한 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함
 이스라엘의 최고 회의에서 이같은 결정이 있은 후 아침에, 아직 니산월 10일인 월요일에 예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행동으로 보여진 이 비유는 그분께서 선택하신 국가가 그 구세주를 거절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알려 주었다(마 21:19). 마른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 백성들에게서 거두어질 때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 주었고”, 이 신의 능력과 자비를 보류하심으로써, 주께서는 “저주”의 성서적 의미를 나타내 보이셨다(시대의 소망, 582~584). (423.3)
 하나님께서는 규정을 통해, 유월절 양이 니산월 10일에 운명이 결정된 후, 그달 14일에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출 12:6)을 때까지 전시해 줄 것을 명하셨다. 그 죽이는 날이 다가오자, 제사장들, 관원들, 서기관들, 율법사들 등 히브리 국가의 가장 권세 있는 대표 사람들이, 평민들이 함께한 가운데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과 함께, 로마 총독 빌라도와 그의 군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구세주를 처형하는 데 연합하였다(행 4:27, 28). (423.4)
 이 일은 니산월 14일 금요일에 행해졌다(눅 22:7, 15)!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이 되”(고전 5:7)심으로써, 표상은 정확히 원형과 만났다. 이 표상적 예언이 세세하게 그대로 성취된 것은 참으로 놀랍다. 이것은 의심의 그늘을 넘어, 그리스도가 메시야적 유월절 양이셨음을 확실히 알게 해 준다. (423.5)
 “저녁들 사이에” 잡음
 유월절 양은 “저녁에” 잡도록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저녁이란 말은 문자적으로(두) “저녁들 사이에”를 뜻하는 히브리 사람들의 관용적 표현이다(출 12:6, Pesahim 5:1, 3, Zebohim 1:3. Josephus, Wars, W: 9:3). (423.6)
 이 구절의 함축된 의미가 정확히 이것이다라고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수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게세니우스가 폭넓게 그 의미를 추적하고 분석해 본 바에 의하면, 양은 13일 정오 이후, 즉 14일의 “저녁”이 시작되는 때부터, 14일의 해질 때, 그러니까 저녁 때 해가 지면서 다음날이 시작되는 그 때 사이에는 어느 때든지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30 시간의 기간이 영감된 표현이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목요일 저녁에 예수께서 다락방의(만찬)에 참여하신 시간과(마 26:17~29), 금요일에 바리새인들이 가진 유월절 잔치 시간(요 18:28)이 다 조화될 것이다. 미쉬나가, 13일 정오까지 잡은 양이면 유효하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 생각을 확증해 주는 듯하다(Pesahim 5:3, 1, Zebahim 1:3, n. 11). 이 30 시간의 기간은 또 그리스도의 당시의 유월절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요세푸스가 기억하는 24만 마리의 양들을 잡을 넉넉한 시간이 된다. (424.1)
 어떤 결론을 우리가 내리든간에, 니산월 13일 목요일 오후 시간 중에 예수께서 제자들 중 두 사람에게 성전에 가서 양을 드리고 그 적은 무리를 위하여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도록 시키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목요일 해질 무렵, 니산월 14일 금요일이 시작되는 시간에, 14세기 전에 친히 시작하신 오랜 관습에 따라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셨다. 이리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이 의식에 당신의 승인의 인을 치셨고, 당신의 생애와 분으로써 그 의식이 의도한 바를 이루셨다. (424.2)
 모든 누룩이 이스라엘 가정에서 제거됨
 법은 이 절기를 준비함에 있어 모든 누룩이 각 히브리 가정으로부터 옮겨져야 함을 규정하였다. 유대인들은 각 가정의 가장이 집안의 이상적인 장소에 누룩을 잘 보관해 오다가 니산월 14일이 가까워 오면 자녀들과 함께 이 의식을 행한 것을 기억한다(Pesahim 1:1~3:6). 가장은 촛불을 켜들고 집안 구석 구석을 뒤졌다.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해서 그는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습 1:12)으리라는 예언을 이루었다. 이 누룩에 대한 금지는 유월절에 뒤이어 계속된 7일간의 무교절 기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는 데(출 12:18~20; 13:7; 민 28:17; 레 23:5~14), 이 규정은 예배자들이 “등불”인 성경의(시 119:105) 도움으로 모든 해로운 요소들을 찾아내어 자신들의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제거할 필요를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 (424.3)
 성경 시대에 사용된 누룩은 발효된 반죽으로서 자체에 불리는 힘을 가진 것이었다. 새 밀가루 반죽에 넣어졌을 때 이것은 작은 부분들로부터 작용하기 시작하여 전체 반죽에 영향을 미쳐 드디어 부풀어 오르게 한다. 성경에서 이 누룩은 도덕적 원칙, 인간의 의지에 일단 들어가면 내부로부터 계속 작용하여 가득 퍼지고 암암리에 한 사람의 본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도덕적 힘을 비유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 누룩이 선한 생각을 나타내는지 악한 생각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문맥에 따라 판단된다(마 13:33; 고전 5:8). 구주께서는 누룩을 예로 드셔서, 사람의 생각 속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빼앗고, 그 당시 사회에서 그가 보신 많은 사람들의 성품을 꼴지운 사상들을 통렬히 비난하셨다. (424.4)
 바리새인들의 누룩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예수께서 경고하셨을 때 물론 그것은 그들의 “가르침”(doctrine)을 말씀하신 것이다(마 16:6~12; 막 8:14~21). 그는 계속 설명하셨다. 이것은 형식주의와 광신적 신앙이 합성된 생활 양식으로 “위선”이며 “이기주의”의 산물이다. “오늘날 우리의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 그들의 삶의 목적으로서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는, 미묘하고도 기만적인 이 죄가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가”(시대의 소망, 409). (425.1)
 바리새인들은 구원의 수단으로써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율법에 얽매인 자들이다. 이 형식주의자들은 구원을 보장하기 위하여,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 주위를 셀 수 없이 많은 불문 규율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규정들—하찮은 것이 많고 때로는 복잡하기도 함—로 울타리를 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의 변질된 경건과 지나치게 따지는 정신 때문에, 죄인들이라고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들은 분리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을 믿었고, 신체적 부활과 내새를 믿었다. 그들 중에 매우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들인 니고데모와 다소의 사울이 있었다. (425.2)
 사두개인들의 누룩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마 16:2)고 청중들에게 경고하셨다. 이 누룩은 온갖 나쁜 형태의 물질주의를 뜻한다. 사두개인들은, 솔로몬 시대에 일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함께, 왕위를 취하고자 하는 아도니야와 합세했을 때, 솔로몬 편에 섰던 다른 제사장 사독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여러 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들은 점점 부해지면서 함께 영향력이 대단한 귀족 사회로 발전하였다. 그들 중에서 능력 있는 대제사장들, 판관들, 통치자들이 많이 나왔다. 이 자유주의자들은 독립적 사고를 강조하고, 의지의 자유를 주장하며, 초자연적인 것, 천사, 영들을 믿지 않는(행 23:8) 사실상 무신론자들이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교리”(SR, 250)는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였다고 외치는 몇몇 사도들을 체포하여 괴롭힘으로써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냈고, 사도들이 죽음에서 부활한 자들과 같이 있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발견하고 마음이 더욱 어지러웠다(행 4:1~3). 영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 그들이, 귀신들린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을 보고(행 5:16~18) 더욱 불쾌해했다. (425.3)
 그들은 기도를 무시하였고, 모세의 경전들을 제외하고는 구약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이 책들의 일부에 대한 확실성을 의심하였다(마 22:23~33). 바리새인들의 전통적 규정들을 반대하면서 이들은 구전법(oral law)을 배척하고, 미래의 상벌 관념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실존주의자들이었고, “편리!”가 그들의 모토였다(요 11:47~50).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처형하기 위해 바리새인들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유주의자들과 세속적인 사두개인들도 반대하셨지만,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바리새인들을 더욱 냉혹하게 반대하셨다. (425.4)
 헤롯의 누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