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과 술 제 7 장 주정 음료와 관련하여 잘못 이해된 성경 귀절 2. 잠언 31:6 “독주를•••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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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귀절이 중요한 이유
 잠언 31:6, 7에는 역설적인 충고가 나온다.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그는 마시고 그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그 고통을 기억지 아니하리라.” 이 귀절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알코올로 근심 걱정을 잊으라는 처방처럼 들릴 수 있다. (243.1)
 이 본문을 취하게 하는 음료를 적당히 마셔 고통, 스트레스, 긴장을 풀어 주는 진정제로 사용하라는 것을 권고하여 주는 것으로 여긴 이들도 있다. 이것이 이 귀절의 의도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훈계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하여 문맥과 본문을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243.2)
 문맥
 6절이 속하여 있는 직접적인 문맥에는 왕들과 통치자들이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라는 훈계가 나온다. 이유는 그들의 법을 기억하는 능력이 손상되어 사법적인 직무를 공평하게 행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243.3)
 문맥은 “알코올을 과도하게 마시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마시지 말라”고 금함으로 주정 음료에 관한 가치 판단을 내린다. “왕은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고 (4절)”라고 말한다. 4, 5절에 나오는 단언적인 금주 명령에 비추어 볼 때, 영감 받은 저술가들이 일반적인 고통을 경감시켜 주고 인생의 스트레스와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하여 포도주를 적당히 마시라고 권할 리가 절대로 없다. (243.4)
 이 훈계의 형태
 직접적인 문맥에 비추어 보면 “주라 (tenu)”라는 첫 번째 명령이 고통 중에 있는 모튼 사람에게 알코올을 주라는 강제적인 명령일 수가 없다. 조건적인 명령으로 보야야만 한다. 그 의미는 “(만일 너희가 독주를 준다면) 죽어가는 자에게 독주를 주라”이다. (243.5)
 이 문장의 문법적인 구조는 이 입장을 지지하여 준다. 왜냐하면 “포도주와 독주를 괴로워하는 자에게 줘서 그들의 고통을 잊게 하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포도주와 독주를 줘서 그들로 마시게 하여 고통을 잊게 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앞 문장은 의무적인 명령이 아니라 조건적 명령으로 정의될 수 있다. (244.1)
 “주라”는 명령은 조건적인 비교로 여겨질 수 있다. 왕들과 통치자는 주정 음료로 인하여 그들의 정신적인 명료함과 사법적인 진실성이 손상되기 때문에 금주하여야만 하였다 (4, 5절). 만일 포도주는 책임감 있는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맞겠는가? 6절에 답이 나온다. “(만일 네가 주정 음료를 준다면) 죽어가는 이에게 독주를 줘서 그로 자신의 고통을 덜게하라.” (244.2)
 이 귀절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 면에는 “주정 음료는 책임감 있고 생각하는 백성에게는 적합치가 않다와 다른 면에는 주정 음료는 희망 없이 죽어가는 이들에게만 오직 적합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6절은 풍자적이고 아이러니컬한 충고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왕자에게 취하게 하는 음료의 위험성에 관하여 경고한 후에 아이러니컬하게 비참한 사람에게만 알코올이 적합하다고 가르쳤다. 주정 음료에 대하여 이 보다 더하게 강한 비난을 퍼부을 수가 있겠는가? (244.3)
 어떤 비참함인가?
 주정 음료를 마셔도 된다고 허락을 받은 이들이 겪는 고통은 이 귀절을 더 잘 이해하게 하여 준다. 본문은 “죽게 된 자(obed)”“마음에 근심하는 자(marei naphesh)”들 이라고 표현한다. 이 두 히브리 어 용어는 절망적이고 희망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목말라 죽겠어. 맥주를 마셔야만 하겠어”라고, 또는 “잠을 도통 청할 수가 없어. 수면제를 먹도록 해 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 “아파 죽겠어. 아프지 않게 하는 약을 줘”라고 부르짖는 상황이다. 십자가 처형에서와 같이 몹시 괴로운 고통으로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묘사이다. (244.4)
 탈무드는 잠언 31:6이 처형되는 이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취하게 하는 것을 주라는 권고라고 해석한다. 산헤드린 43a는 “랍비 에이스다 (Ehisda)는 처형대에 나가는 이에게 그의 의식을 빼앗고자 포도주와 섞은 적은 양의 유향을 주었다”고 말한다.22 시즈만(Seesemann)은 신약성경 신학 사전에 실린 그의 소논문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에게 주어졌으나 그 분이 거부한 “몰약을 탄 포도주”(막 15:23)와 이 귀절을 연관시킨다. 그는 예수께서 이 음료를 거부하신 것은 그분이 십자가의 고통을 모두 다 받아들이시겠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하였다.23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속주가 아니었다면 그것을 마셨을 것이다. 성경은 고통을 잠재우는 약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덜수 있는, 취하게 하는 포도주를 거부하신 것은 그분께서 취하게 하는 음료를 불허한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다음에 취하지 않는 신 포도 음료 (oxos)를 사람들이 주었을 때 받아 마셨다(요 19:29, 30). (244.5)
 알코올을 의약적으로 사용하는 것
 잠언 31:6은 어떤 이들로 알코올을 의약적으로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결론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귀절이 일시적인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알코올을 마셔서 그 고통을 경감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본문은 고통 당하는 자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기 위하여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알코올을 주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현대에 적용한다면 오직 자격 있는 의사의 처방에 의해서만 환자에게 약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244.6)
 또 환자가 의사의 처방을 받았다 할지라도 알코올 같은 마약을 사용하는 데에는 주의하여야 한다. 이 모든 약들은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마약들이다. 알코올을 마시는 것이 의료적인 목적이라면 그 양이 보통 소량이고, 환자가 침상에 있기에 다른 이들의 생명을 위험에 처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기에 그 영향은 극소화된다. (244.7)
 요약하여 말한다면 잠언 31:6은 쾌락을 위하여 주정 음료를 적당히 마시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 귀절은 알코올이 죽어가는 이의 참기 어려운 고통을 가라앉히는데 적합하다는 것을 아이러니컬한 방법으로 제시하여 준다. (2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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