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다니엘 1장 하나님과 바벨론의 다니엘 I. 유대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다니엘 1장에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전체 기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관건이 되는 여러 기별들이 제시되어 있다. (19.1)
 이 개념들을 검토해 보노라면, 성경 시대에 있어서 선지자라는 용어가 단순히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만을 뜻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물론, 성경의 선지자들은 미래를 예언하였고, 또 다니엘에게 있어서도 예언은 그의 특장(特長)에 속하는 분야이다. 그러나, 선지자라는 용어가 가진 근본적인 뜻은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하는 사람”이다. 선지자들은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그들에게 전해진 어떤 기별을 전달하였다. 그래서,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기별이라 해서 반드시 예언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며, 어느 때에라도 유용한 기별이다. (19.2)
 다니엘 1장에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첫번째의 개념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다. (19.3)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국을 제 부왕의 제국 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었을 때, 그는 이 성공을 자신의 능력과 지혜의 결과로 보았음이 분명했다(4장 참조).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을 그(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이”신 것이 라고 하였다(단 1:2). (19.4)
 그렇지만,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스라엘의 왕을 이방 나라 왕의 손에 붙이신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매우 중대한 통찰을 얻을 수가 있다. 동시에, 이 대답은 다니엘과 요한계시록 이해의 열쇠가 될 것이다. (19.5)
 신명기 32장 9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기원전 1445년 저 출애굽의 때에 이스라엘을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사도행전 13장 47, 48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 일을 단순히 이스라엘만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민의 구원과 행복을 위하여 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방의 빛”으로 삼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열방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율법의 지혜에 대하여 증거하게 하고자 하셨다. (19.6)
 총애는 항상 그것에 못지않는 성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율법에 조화된 생활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의 참되고 인자한 성품을 나타내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종을 강요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잘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나의 소유가 되겠고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다(출 19:5, 6). (19.7)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서로 화목하고 단결하는 일조차 하지 못했을 때가 많았다. 솔로몬의 통치가 끝난 기원전 931년경, 유다 왕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어서 서로 싸웠다. 남방을 유다 왕국이라 하였고, 북방은 이스라엘 왕국 또는 에브라임 왕국이라 하였다. (19.8)
 믿기 어려울지 모르나, 북방 왕국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를 공식 종교로 채택하였다(왕상 12:25-3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국을 즉각적으로 “포기하”시지는 않았다. (19.9)
 엘리야, 아모스, 호세아 등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2세기 이상을 호소하면서 백성들이 회개하면 깨끗이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20.1)
 이 때에, 앗시리아 제국이 일어나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였다. 만약에 이스라엘의 주민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깨끗하고 인자하신 성품을 반영하기로 작정하였던들, 하나님께서는 앗시리아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기적적으로 지키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기적적인 보호는 주변의 다른 민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다”(행 10:34). 이스라엘이 제 길을 고집해 달려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도 다른 민족과 똑같이 저들의 소행의 자연적인 응보를 감내하도록 놔둘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는 것이다. (20.2)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시겠는가! (20.3)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포기하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20.4)
 기원전 722년에, 하나님은 드디어 이스라엘을 앗시리아의 손에 “놓고(포기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은 대단히 아프셨다. (20.5)
 그 후 세월은 흘렀는데, 이제는 유다가 배도의 길로 달려나가, 그 심각함이 이스라엘의 처지보다 더 하였다. 그러나, 몇 차례의 예외가 있었다. 일례로, 앗시리아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 유다 왕 히스기야는 우상을 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도움을 간구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간절히 간구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기적을 베푸셨다. 한 천사가 내려와 앗시리아 군사 18만 5천을 멸망시켰다(왕하 18장, 19장). 바빌로니아 군대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호야김 왕을 보호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이 때는 유다 백성들의 죄가 참으로 위중한 상태에 있었다. (20.6)
 그렇다면, 선지자들이 그토록 통탄해 하던 그 끔찍한 죄들이란 도대체 어떤 것들이었는가? 부정직, 가난한 자들에 대한 비리, 살인, 안식일의 유린, 참된 선지자에 대한 박해, 악덕을 정죄하지 않고 번영만을 약속하는 설교자에 대한 추종, 바알 숭배 등이다(렘 9:14; 17:19-27; 22:1~5; 28). 바알 숭배에는 혼전 성교, 혼외 정사(情事), 동성 연애, 수간(獸衰) 등 여러 가지의 “성적인 경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안식일 유린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로부터 휴식과 공중 예배의 시간을 박탈하였다. 불의라는 것은 피해를 입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차별 없는 관대함을 거짓으로 인식시키는 것이다. (20.7)
 이 같은 죄악들이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예사로운 일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 죄악들은 하나님께서 볼 때 “예사로운”것들이 아니었다. 그 죄들은 하나님의 깨끗하고 자비로운 성품에 대한 진리들을 파괴시켰으며, 그 죄악들을 범하는 백성들의 성품과 가정과 사회를 타락시켰다. (20.8)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크게 외치라”고 촉구하셨다(사 58:1). 에스겔 33장 11절에서는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가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고 탄원하셨다. (20.9)
 선지자들은 그 전에 북방의 이스라엘 왕국을 위하여 그러하였듯이 남방의 유다 왕국을 위해서도 차례로 나타나 호소하기를 마지않았다. 미가, 이사야, 하박국, 스바냐, 예레미야, 그리고 그 밖의 선지자들이 회개를 호소하고 용서를 보증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호소는 소 귀에 경 읽기였다.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였다. (20.10)
 성경은 말하기를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갈대아 왕(느부갓네살)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셨다고 하였다 (대하 36:15~17).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