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본체를 붙잡다 서문 추천의 글
  • 1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히 5:9)이시다. (9.1)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이 영원하신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히 10:20)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시며,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행 4:12). (9.2)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요 3:16) 되고,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마 3:17) “자녀가 되는 권세(특권)를”(요 1:12) 가지게 된다. (9.3)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롬 8:17),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받으실 영원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함께 받게 된다(단 7:14, 18, 22, 27). (9.4)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하고 ‘예수 믿는 믿음’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승리하지 못하고 오직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고전 15:57) 승리한다. (9.5)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신가? 그분만이 구주가 무엇인가? (9.6)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근본적인 자격이 무엇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주인가? (10.1)
 첫째, 인류의 구주는 죄 없는 자라야 한다. 속죄의 제사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언제나 ‘흠 없는’ 것이어야 했던 구약시대의 제사제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죄 없는 구속자 예수를 의미했다. 유대의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죄 있는 자로 고소하여 로마 총독의 법정에 세웠지만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눅 23:4, 14, 15)고 선고했다. 은 30냥에 스승을 팔아넘겼던 예수님의 제자 가롯 유다는 “내가 무죄한 피를 팔”(마27:4)았다고 양심선언을 하였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 모든 여정을 호위하며 예수님을 줄곧 지켜보았던 로마군의 백부장도 “이 사람은 정녕 의인”(눅 23:47; 마 27:54)이었다고 증언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10.2)
 둘째, 인류의 구주는 창조자라야 한다.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창조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없어진 인간을 다시 있게 하는 것을 “부활”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재창조이다. 처음에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여 없던 사람을 존재하게 했던 것과 똑같은 과정이기 때문에 재창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로 말미암아 본래의 흙으로 해체되어 없어진 인간을 다시 있게 하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인류의 구주는 창조자가 아니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창 1:1)하신 그 하나님이시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태초에” 창조력을 행하셨던 ‘말씀’이라고 하였으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그 창조주이신 말씀 하나님이 ‘육신(사람)’이 되어 인류 가운데 계셨는데(요 1:14) 그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신”(요 1:18) 것이라고 하였다. (10.3)
 셋째, 인류의 죄와 벌을 구속하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지셨기 때문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 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 6). (10.4)
 예수님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11.1)
 존재의 문제는 처음부터 창조적인 문제이며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다. 존재의 위기를 안고 있는, 인류의 구원이란 다시 존재의 문제이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은 것도 존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창조와 재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6, 17).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즉, 부활의 하나님, 재창조의 하나님을 믿었으며, 또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11.2)
 김중훈 목사님께서 여러날 동안 많은 노고 끝에 마침내 번역하신 <영원한 본체를 붙잡다(Touched with our feellings)> 책을 통하여 아무쪼록 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 더욱 돈독하여져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구원의 소망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 ‘예수 믿는 믿음’이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굳게 세우는”(롬 3:31) 유일한 원동력이 되어 종말적 최후의 위협적 상황(계 13:10, 15~17, 14:12)하에 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게 할 수 없는 흔들림 없는 순종의 삶을 살게 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승리를 얻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 (11.3)
 한국연합회 목회부장 홍성선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