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새 연구 제 4 장 신앙의 자유와 불 시련(단 3장)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들에게 명하시나니· ·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 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단 3:4-6). (69.33)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합당한 예배를 요청하신다. 그러나 그 요청은 얼마나 판이한가. (69.3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 5). (69.35)
 예배는 성질 상 명령될 수 없고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사랑을 강요할 수 없고 믿음을 명령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예배는 의지의 최고 결정으로 심령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자유 의지가 보장되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도 참된 예배도 있을 수 없다. 금 신상의 예배에는 왕권(王權)과 관권(官權)이 뒷받침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 총동원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음악의 악용(惡用)이다. (69.36)
 음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천사들에 의해 불리운 것이요(욥 38:7), 하나님을 찬양하는 힘 있는 방편이다(시 150편). 이토록 숭고하고 유력한 음악이 타락과 함께 퇴폐적인 오락이 방편으로, 전쟁의 수단으로, 거짓 신앙을 고취시키는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 음악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을 때 그것은 쉽사리 사단의 점유물이 되고 만다. (69.37)
 이제 이 금 신상에게 예배하라는 명령은 이미 종교와 양심의 영역을 넘어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문제로 번지게 되었다. 거절한다면 그것은 왕의 명령에 대한 항명(抗命)이요, 국가의 권위에 대한 반역(反逆)이 되는 반국가적 행위로 해석되어 법적으로 응징될 것이었다. 또한 바벨론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하는 바벨론의 종교와 바벨론의 신에 대한 모독(冒瀆)으로 간주되어 가장 혹독한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아울러 바벨론 신민(臣民)의 번영과 국익(國益)을 증진시키기 위해 의도된 이러한 범국민적인 염원을 저버리는 것은 곧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낙인 찍혀져 대중의 분노를 면치 못하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69.38)
 IV. 풀무 불의 시련과 승리
 가. 촛점이 된 세 젊은이
 이러한 분위기와 상황에서 감히 신상을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벨론 국립 관현악단의 장엄한 음악에 맞춰 느브갓네살 자신을 비롯하여 참집한 모든 사람이 일제히 격식을 갖추어 엎드렸으나 오직 히브리의 세 젊은이만이 그 대로 우뚝 서 있었다. 이들의 반역적인 행위가 이러한 일이 있을 줄로 예기했던 바벨론의 지배 계급인 갈대아인 몇 명에 의해 즉시 왕에게 고소되었다(3:8-13). (69.39)
 그 날 그 행사의 촛점은 금 신상이었으며 허다한 참배자들 가운데 유야무야한 이들 세 히브리인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들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갑자기 이들 세 젊은이가 이날 행사의 실제적인 표적으로 드러난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사단과 그의 악한 천사들, 그리고 이들의 사주(使嗾)를 받은 적대자들이 최고의 관심을 기울인 것은 금 신상이 아니었으며 다수의 일반 참배자도 아니었고 바로 참 하나님을 대표하는 히브리 청년들, 특히 그들의 의지가 표현되는 무릎이었다. (69.40)
 그들이야말로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신에게도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롬 11:3, 4) 어떠한 환경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 하늘의 영웅들이기 때문이다(삿 7:5-7). 이토록 장엄한 자리에서, 세상의 권세자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감히 왕의 직접적인 명령을 어긴 자들에 대한 왕의 분노는 격발되었으나 히브리 포로들에 관해 이전에 받았던 인상과(1:19-21), 인연 때문에(2:48, 49) 다시 한번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들의 반응은 단호했다. 바야흐로 제막식의 촛점은 눈을 어리게 하는 치솟은 금 신상으로부터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벧전 1:7) 신앙으로 새겨진 하나님 형상의 세 젊은이에게로 옮겨진 것이다. (69.41)
 나. 진정한 신앙고백
 「· · ·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라」(3:16, 17). (69.42)
 가) 뜻을 정한 젊은이들
 풀무처럼 달아 오른 분노를 억누르며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3:15)고 고함치는 왕 앞에서 세 친구가 말한 침착한 대답이다. (69.43)
 “왕이시여, 이 문제에 대하여는 저희가 달리 드릴 말씀도 없고 달리 취할 행동도 없습니다. 지금 취한 이 처신이 확고하고도 최종적인 것입니다. 왕이시여, 왕의 명령을 좇아 우상에게 경배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는 토론이나 협상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69.44)
 이러한 경우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을 빌린다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는 내용이 될 것이다. 왕 앞에서 이토록 담담하게 최후의 진술을 하고 있는 세 젊은이의 심중에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뿌리 깊은 감회가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왕이시여, 우리가 이 어린 나이들에 부모님 곁 정든 고국에 살지 못하고 이처럼 타향 만리 이국 땅에 포로가 되어 와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겪으며 고생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조상들이, 우리의 어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우리 나라의 속담에도 있듯이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겔 18:2)는 슬픈 역사를 다시는 반복할 수가 없습니다”M. R. DeHaan, Daniel the Prophet.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3), 31-34. (렘 31:29). (69.45)
 “젊은 꿈이 한껏 부푼 나이에 정든 고향, 그리운 부모님과 가족의 곁을 떠나 이 곳으로 잡혀 오던 그 괴롭고 가장 길었던 여름, 우리 몇 사람은 이미 바꿀 수 없는 결심을 했고,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편이 더욱 떳떳하고 후회가 없는 길임을 우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와 우리 어른들의 경험에서 충분히 배웠습니다. 선지자와 왕, 485. 우리는 이 뼈 아픈 민족의 비극을 다시는 반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이 비극은 끝나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이 비극의 막을 내려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신에게도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첫번째 계명입니다(출 20:3). 우리의 패역한 조상들처럼 또 다시 우상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두번째 계명입니다(출 20:4, 5).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 (69.46)
 뿐만 아니라 극렬히 타는 풀무불을 내세우며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3:15)고 고함치는 왕에게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건져내시리이다”(3:17). 히브리 젊은이들은 100여년전 이러한 때를 위한 이사야 선지자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69.47)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구속자임이라」 (이사야 43:1-3). (69.48)